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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주기철(朱基徹)로 바꾸었다.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다.
호는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의미의 '소양(蘇羊)'이다.
이후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담임하며 아내 정신여학교 출산 안갑수와 의신학교에서 일하던 오정모를 교사로 삼았다.
1933년, 안갑수 아내가 병에 걸려 사별했고, 과로와 허약에 시달렸다.
이를 보다못한 제직들의 권유로 오정모와 재혼하고
1936년 평양 오산학교 시절 교장 조만식 장로가 사무하는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도 경남성경학교에서 그에게 성경을 배웠다.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진해시 웅천1동)에서 출생
1906년
사립 개통소학교 입학
1910년
웅천읍교회에 나가면서 주기철로 개명
1912년
평안남도 정주의 오산학교 입학
1916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 진학
1917년
서울 정신여학교 출신의 안갑수와 결혼
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1926년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첫 부임
1929년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반대안 첫 제출
1931년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1939년
경북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 연루
1944년
감옥에서 병사
주기철 목사가 살았던 시대는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가 통치하는 시대였다.
이때 일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것이 자기들의 사명임을 깨달았고,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조선 땅에 임하기를 간구했다.
주기철은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현재 진해시)에서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이복형제와 사촌들 사이에서 따돌림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워낙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오히려 형제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 조만식 선생 등을 만나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안질이 심해져 웅천에 낙향했는데,
재산 상속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생겼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별거로 그는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 안갑수 사모 주광조.
주기철은 청년운동과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목사님의 중매로 결혼하였다.
그런데 장모인 안씨는 그를 목회자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권유하였다.
이후 4살 된 아들 영묵이와 2살 된 딸 영덕이의 죽음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인간의 참된 도리임을 깨닫는다.
그는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성령체험을 한 뒤
헌신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기도처를 정해놓고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올 때는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젖어있었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 원고를 집필하고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 번 낭독하고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
평양 산정현교회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왔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였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주기철 목사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주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했다.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하게 했는지 고문을 받고 나면 통증으로 온 방을 뒹굴었고 밤새도록 울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고통을 잊기 위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찬송을 불렀다.
다섯 번째로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행한 생애 마지막 설교에서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당하시고 날 위해 죽으셨거늘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까? 다만 ‘일사 각오’ (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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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은 조선반도를 35년 동안 강점했다.
일본은 일본과 조선반도를 동일시하는 내선일체,
즉 ‘일본열도와 조선은 한 몸이다’는 정책을 펼쳤다.
정신적인 일체감을 위해 조선인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하게 했다.
각 사람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조선어교육, 한글교육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런 음흉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는 엄연한 우상숭배다.
우리는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에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훈령을 내려 보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일본의 강제적인 세뇌 공작에 서서히 동화되고 있었다.
세뇌 공작의 내용은 “신사참배는 애국심의 발로이자 나라 충성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했다.
조선의 처녀들을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성노예화 하여
성을 착취하고 인격을 모독했다.
한국교회는 흔들렸습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1936년 6월에 신사참배 결의를 하였다.
다른 개신교 종파들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도 1938년 27회 총회 때 부끄럽게도 신사참배 결의를 하였다.
당시 총회장의 이름으로 나왔던 성명 내용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음이 그 글입니다.
“우리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시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신사참배를 저항하는 모습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중에서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거절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다.
그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주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자
그가 속해 있었던 평양노회는 1939년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합니다.
목사직을 박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이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교회를 말뚝을 박아 폐쇄하였다.
1938년 2월 주 목사님이 41살 때,
일본 정부는 국가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죄목으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총 네 차례 감옥 생활을 하게 되는데, 약 7년 동안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48살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의 정절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적십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순교자의 길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일본 제국 시대의 반일민족운동의 소중한 지표가 되었음을 우리는 지금도 그의 글과 그의 말씀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주기철 목사님이
산정현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말씀을
다시금 나누며 목사님의 신앙의 모습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이자 애국의 선배인 그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오산학교의 선생님으로 있던 당대의 민족지도자 조만식, 이승훈 두 분으로부터
신앙의 정신, 애국정신을 배워 나갔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은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집회의 영향이 컸다.
그곳에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은 그는 192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목회한 곳은 평양 산정현교회였습니다.
그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일본 제국주의라는 절대 권력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의 지조와 정절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설교의 제목은 ‘다섯 종류의 나의 기원’이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산정현교회 성도님들과 어떤 말씀을 나누었는지 함께 보겠다.
훨씬 더 긴 기도문의 일부를 뽑아 나누는 것이니 나중에 꼭 찾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첫 번째 기원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저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제가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하리이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일사각오. 한 번 죽는 것 당연하니 죽음을 맞겠다는 겁니다. 즉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드리라는 요청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장 용기 있는 자가 누구일까요? 주님을 위해서 일사각오를 한 사람, 바로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두 번째 기원입니다.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오리까. 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감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고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특별히 주기철 목사님은 단번에 죽음에 이르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문한 후 살려놓고 고문한 후 살려놓는 반복을 통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그에게도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7년 동안 그 고통을 겪으며 몸이 쇠약해진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기도는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의 기도입니다.
세 번째 기원입니다.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제 어머님이 저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는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제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차이고 매 맞아 상할 때 제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제 어머님을, 칠십 넘어 늙으신 제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제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제게 바치었거늘 저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제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늘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제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들을, 제 양 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납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 떼 중에 제 양들을 두고 갑니다. 맡기나이다. 제 양들은 대목자장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가족, 그리고 교우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네 번째 기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圖生 :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려고 함) 피할 줄이 있겠습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모든 백성,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과 성도들까지 다 신사참배를 하던 때에 그는 외롭게 자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평양아 평양아, 예루살렘아, 모란봉아, 대동강아’ 부르고 통곡하면서 의에 살고 의에 죽겠다는 고백과 함께 이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원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그는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1944년 4월 21일,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1년 전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병이 들어 다 죽게 된 것을 일본 경찰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의 면회를 허락합니다. 바로 오종모 사모님과의 면회였습니다.
사모님은 주 목사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목사님을 향해서 순교의 길을 가라고 한 분은 바로 사모님이셨습니다.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가 있었기에
주기철 목사님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지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가라는 사모님의 요청에 주기철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 거요.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를 구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
면회가 끝나려는 순간, 오정모 사모님은 주 목사님께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가 목마르다” 하셨던 것처럼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다던 그의 마지막 말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옵니다. 목사님은 바로 그날 밤, 평양 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의 나이 48살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에는 복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5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10)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수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나는 주님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 아프고 힘든 적이 있습니까?
보통 세 종류의 순교가 있다고 말합니다. 적색순교, 백색순교, 녹색순교. 적색순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곧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백색순교는 직접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피를 흘릴 순교의 각오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녹색순교는 신앙의 자유의 시대에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린 상록수처럼 우리 인생을 다하면서 내 시간, 내 재물, 내 정성, 내 달란트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 놓으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적색순교를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준비를 하며 내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감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일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교회가 다시 회복 될 것이고, 이 민족의 역사가 다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 받을 각오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주 목사님의 기도문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설교>
소양 주기철 목사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었다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오늘은 옥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5종목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을 면하려고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셋째, 노모와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에게는 70 넘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아들 넷이 있습니다. 이 몸이 매 맞아 상할 때 어머니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나는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가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늙으신 어머님과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과 사랑하는 양 떼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주 안에서 자랐고 주 앞에 헌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오직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히틀러는 인류역사상 가장 흉악한 권세자였습니다. 인명을 파리 잡듯 죽였습니다. 특히 유태인들의 수난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유태인들을 자그만 치천만 인구 가운데 600만 명을 생매장하여 죽였고 시체를 기름 짜서 겨울 전장에서 땔감으로 빨래비누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어느 날 하늘이 심판해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은 또 어떻습니까. 일본은 우리나라 여성들을 무작위로 잡아 전쟁터로 끌어가 짐승처럼 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서 모두 정신병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억압하고 압제하고 교회에 몰아넣고 불 질러 죽이고 고문하고 희생을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할 짓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마 일본처럼 철저하게 심판받은 역사도 없을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삼일 후 8월 9일에는 나까사기에 또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그 폭탄은 TNT화약의 2천만배의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입니다. 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반경 1Km내의 모든 생명체는 타죽거나 후폭풍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모두 69만 명이 죽었고 우리나라 사람도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심판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억압하고 구속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고상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과 형상을 부여해서 창조하신 값있고 품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압제하고 구속하고 착취하고 죽이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라크라는 나라도 하늘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후세인이 백성들을 얼마나 압제했습니까. 후세인은 히틀러 이상이었습니다. 숫한 백성들을 음지로 끌고 가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북한도 언젠가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북한은 하나님 방법으로 징계 받아서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라면 어찌 북한 땅을 모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은 압제받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압제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압제받는 사람도 나쁩니다. 억압받는 사람을 보면 억압받을 짓을 합니다. 일본이 이 땅을 강점하던 시기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압제받을 짓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궁중생활을 그린 궁중사화를 보십시오. 거기 어디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말 한마디가 나옵니까. 매일같이 권력다툼이나 하고 모략중상이나 하고 음모하는 말만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극은 보기가 싫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에 지배받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가시거든 흑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그 사람들은 꼭 무시 받고 억압당하고 살아갈 행동만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로부터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