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훈 토마스 신부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사야 2,1-5 마태오 8,5-11
기다림의 시간이 모두 같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풍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의 기다림과 시험 전날 잠을 못 자며 공부하는 아이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과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하고 기대되는지의 여부는 누구를, 무엇을, 그리고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인대장의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아픈 종을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배려합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마침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을 만난 백인대장은 이를 표현합니다.
“주님, 제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욕심과 바람만을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표현합니다.
“수고롭게 이방인인 저의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시면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기다림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기쁨과 행복의 기다림인가요?
아니면 고통과 초조함의 기다림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기에 너무 익숙해진, 그래서 아무 느낌 없는
기다림인가요?
우리는 가난한 구유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의 활기 속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기다림인지 잘 바라보아야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가난하게 오신,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 봅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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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사야 2,1-5 마태오 8,5-11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 에언서 2,1-5 참조)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대림 시기에 우리를 맞이해 주는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유배 이전, 유배, 유배 이후, 이렇게 세 세대를 아울러 활동했던
예언자 학파의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는 제1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제1이사야는 유다의 사제 귀족이었으므로 유다 왕실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밝았고,
머지않아 유다 왕국은 망할 것이며 백성은 유배를 당할 것과 이 참담한 유배 역사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 메시아가 오셔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주님의 산으로 올라오는 그날이 오리라.”
그날이 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국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국운이 다하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때에 가장 찬란한 미래를 보았을 만큼
이사야의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내다본 장밋빛 미래는 단지 유다인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한 미래는
아니었고, 예수님을 내칠 그들 대신에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새로운 백성이 나타날 것임을
내다본 예언이었는데, 그 백성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처음부터 이사야가 내다본 국제적 연대와 미래지향적 개방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꽉 막힌 유다인들로부터 견제를 받거나 배척을 당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
(마태오 8,5-11)에서는 모처럼 열린 이방인을 만나시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무력으로 식민 통치하는 로마 군대의 고급 장교였으므로
공적으로는 유다인들의 원수라 불릴 만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다인들의 원로들은 그를 예수님께 소개하기를 그가 유다인들의 회당을
지어 주었고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니 도와줄 만하다고 추천하였습니다.
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유다인 종들을 매우 아꼈으며 또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사람이어서 신앙마저도 군인다운 단순함으로
예수님께 믿음을 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처형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 미사에 도입하였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또한 1945년에 출범한 국제연합은 미국 뉴욕에 세워진 본부 건물의 외벽에 이사야의
그 유명한 예언이자 인류의 이상을 크게 써 놓았습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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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사야 2,1-5 마태오 8,5-11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오 8,5-11 참조)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면 그 옛날 예루살렘의 성전에는 두 개의 성지가 있습니다.
회교도의 모스크가 솔로몬 성전 그 자리에 있어서 아랍인들이 코란을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구역에서 로마의 헤로데가 유대인들의 성전을 무너트리고 남긴 성전의 한 귀퉁이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아브람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유대인들과 앙숙지간인 회교도인에게도 아브라함은 그들의 깊은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만들어 농경사회의 평화를 구가하듯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예언말씀을 골고타의 언덕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쟁과 무력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위력을 과시하려고 하지만
‘사람의 아들’께서는 지상에서 그들에게 버림을 받으신 돌이셨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건물의 모퉁이의 중요한 돌이 되게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고 온 민족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과 회교도 사람들이 전쟁인 아닌 평화를 지니고
예루살렘을 찾고 있는지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는 예루살렘에 서서 이사야의 예언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스런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십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서 2장 2절-3절)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한 백인대장의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에 대해서
감탄하고 계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아끼는 종이 중풍으로 누워있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그 종을 고쳐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말을 받아들여 고쳐주시려 그 집으로 가려고 하자
그는 주님께서 굳이 가지 않으시고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8,8)라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미사전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놀라운 믿음을 본받아 성체를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의 이 말을 새기며 깊은 신앙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감탄하시지만 우리에게도 믿음의 소중한 본보기이고
그 믿음으로 주님의 성체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대림시기의 첫 주간 첫 날을 맞으며 우리도 이사야의 놀라운 예언말씀과 백인대장의 전적인
신앙이 담긴 말씀을 묵상하며 ‘늘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합시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