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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의 꿈
창세기 28:10-1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이다. 더위가 가장 극에 달한다는 대서(大暑)이다. 아무쪼록 수재와 인재로 고통을 겪는 이 땅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같이 하시길 바란다.
이번 주 7월 27일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을 맺은지 70주년이다. 1953년 전쟁 중 태어난 갓난아기가 70세 고희를 맞도록 여전히 휴전 중이라니 얼마나 비정상인가? 이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와 교회는 또 얼마나 비상식적인가?
어제는 답답한 심정으로 광화문에서 열린 ‘정전(停戰)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행사에 참여하였다. 비가 내렸지만 서울 시내를 두 시간 가까이 행진하였다. 비가 오다 가다를 반복했는데 맨 앞자리에 선 외국인 손님들부터 대부분 참가자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구호를 외쳤다. “NO WAR, Yes Pea~ce.” 곁에서 함께 걷던 미국 장로교회 여자 목사님이 ‘PEACE’ 발음은 길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NO WAR, Yes Pea~~~ce.” 평화는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지키며 찾아올 것이다.
부끄러운 것은 평화를 훼방하는 이들은 길목마다 ‘그들의 예수’를 앞세우며 요란한 가짜 뉴스를 틀어댔다. 어쩌다 이 지경인지, 수치스럽다.
한국 언론은 무관심한데 외국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를 하였다. 하물며 내가 두 나라와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하나는 캐나다 기자가 취재하는 이란 방송이고, 하나는 아랍 여성기자가 나선 알자지라 방송이다. 물론 다 한국말로 인터뷰하였다. 주위에서 내가 중동 취향인 모양이라며 웃었다.
1)
오늘 본문은 마침 이란을 배경으로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지금의 이란까지 먼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남쪽 브엘세바에서 지금은 이란이지만 당시 메소포타미아 두 강 사이에 있는 하란까지 걸어갔다.
본문은 한 사람 야곱의 인생길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시작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10).
야곱은 누구인가? 이삭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걸어가는 중이다. 지금 그의 인생은 도망자였다. 그는 피난처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는 어디인가? 브엘세바는 아버지 이삭이 우물을 따라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중에 정착한 야곱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리고 하란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 온 그곳이다.
구약의 세계에서 보면 브엘세바가 남쪽 끝이고, 하란은 북쪽 끝과 같은 곳이다. 그 의미가 극과 극이라고 볼 수 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한다’는 의미는 삶이 보장된 안전지대에서 전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지역으로 길을 떠나는 중이란 뜻이다.
야곱은 누구인가?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 형제이다. 둘이 거의 비슷한 시각에 태어났는데, 유감스럽게도 야곱이 약간 늦게 나왔다. 오죽하면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창 25:26)고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큰 아들이 모든 권리를 차지하고, 가부장제의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러니 형제라도 쌍둥이 간은 경쟁적인 관계일 것이다. 가까스로 먼저 나온 형 에서에 비해, 둘째로 태어난 야곱은 모두 잃었다.
장자권과 축복권은 먼저 태어난 맏아들에게만 주어진 태초의 권력이었다. 야곱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곱은 성장하면서 장자의 권한과 축복의 권리를 얻기 위해 발버둥쳤다. 이미 끝난 싸움인데 번번히 형 에서와 경쟁하였다.
창세기 25장에 따르면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이 배고픈 형 에서를 말로 속여 장자권과 붉은 죽 한 그릇을 맞바꾼 대목이다. 그렇다고 성경은 야곱의 행위를 크게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서의 무책임을 나무란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창 25:34).
성경은 나중에 축복권을 얻으려고 늙은 아버지 이삭의 어두운 눈을 속였을 때도 야곱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사기행각은 야곱 단독범행이 아니라 그 어머니가 공모하였다.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편애하여 축복권을 받으라고 부추겼다(창 27:13).
연달아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형 에서는 분노하였고, 마침내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한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다시 집안 살인이 날판이다.
마침내 둘째 아들의 생명을 염려하게 된 부모는 합의하여 야곱을 북쪽 끝인 하란으로 빼돌린다. 이것이 야곱이 도망자가 된 사연이다.
2)
야곱의 피난길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안전지대를 살고자 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불안지역으로 피할 때가 있다. 야곱은 지금 인생의 막다른 길을 겪는 중이다.
야곱의 외로운 도망자의 길에 동행해 보자. 성경은 야곱의 길 떠남을 가리키는 단어로 “야차”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가볍게 일상의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출애굽(출 13:3)이나, 바벨론 포로 귀환(겔 20:41)처럼 극적이고, 구원사건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야곱의 ‘떠남’은 좋게 말하면 탈출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피이다. 그런데 본문은 야곱의 ‘떠남’을 하나님의 시야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도망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다.
히브리 신비주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지옥이란 신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이고, 천국이란 신으로까지 ‘남은’ 거리이다.”
누구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그의 인생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면 천국으로 가는 길이란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께 향하느냐, 하나님과 등지느냐, 사람의 인생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야곱의 심경이 그렇다. 그는 지금 형과 등을 돌린 채 도망 중이다. 아마 그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끝없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야곱은 남다른 인생의 야망이 있고, 뜨거운 삶의 의지로 가득했던 사람이었다. 오직 자기에게만 희망을 걸던 사람 야곱은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야 길에 해가 지고, 돌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11).
브엘세바에서 서둘러 도망쳐 도착한 곳은 루스라는 곳이다. 팔레스타인 중부 지역이니 아직 그리 멀리 도망가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도망치면서 형의 복수의 칼날이 뒤 쫒아 올 것 같아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래서 빈 몸, 빈손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만약 사냥으로 산과 들에서 잔뼈가 굵은 에서가 추격한다면 아마 한나절도 못되어 붙잡히고 말 것이다.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잠시 몸을 피하려고 한 하란은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피난길에 지쳐 쓰러진 채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야곱의 꿈이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12).
지금 야곱에게는 삶이 악몽과 같았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와 돌베개를 베고 누웠다. 외로움, 두려움, 배고픔, 막막함.. 인생이 느낄 수 있는 온갖 비참함에 지치고, 지쳐서 금새 잠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꿈속에서 하늘의 신비를 본다. 본문에서 ‘사닥다리, 하나님의 사자들, 여호와’는 신의 현존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야곱이 누워있는 그 땅에서 하늘까지 계단이 놓여있고, 천사들이 땅과 하늘 사이를 오르내린다. 성경은 ‘보라!’(힌네)라는 감탄사를 세 번씩 사용하여 말한다.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12).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12).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13).
야곱은 놀란다. 그는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버지의 고향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그 들판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죄인이 되어 쫒기는 신세였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곱은 감격하여 외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야곱이 실토한 “여기”는 낯선 땅이었다. “여기”는 도망자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삶의 사각지대였다. “여기”는 피난길의 초조한 나그네의 불안한 쉼터였다. 야곱이 놀라워하는 “여기”는 인생이 포기한 불모지였다. 세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막다른 처지이기에 이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낮아져야 하는 겸손한 자리였다. 하나님을 만난 “여기”는 인간의 마음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의 막다른 길에서 만나주신다. 야곱의 피난길은 바로 하나님에게로 통하는 길이었다. 지금 야곱의 피난길은 자포자기한 현실이지만, 바로 그 절박함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되었다. 우리 인생의 피난길은 은총의 순간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신다. 네가 지쳐 쓰러져 누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 때문에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너를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
3)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길을 가는 존재’이다. 예수님은 길 위의 존재로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 13:33).
그리고 우리에게 그 길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역사에도 ‘돌베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장준하란 분이다. 그는 1944년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출하였다. 무려 6천리 대장정 끝에 대한민국 충칭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중에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장준하는 아내에게 약속하였다. 그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한 거사를 벌일 때 그가 아내에게 암호를 보내 알리기로 하였다. 그것이 ‘돌베개’이다. 그는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빌어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앞으로 베어야 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 줄 것이다.” 돌베개는 장준하에게 희망을 부르는 항일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장준하 선생의 회고록 <돌베개>는 현존하는 항일수기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죽을 것 같은 배고픔과 뒤따라오는 일본군의 추적을 가까스로 피해 중국 중앙군에 몸을 피했고,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에 가기 위해 6천 리의 길을 걷는 대장정에 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야곱의 길을 따랐다. 서양에서 야콥, 제이콥, 야코부스, 야고보, 디에고, 제임스 모두 야곱의 이름에서 나왔다. 유명한 순례길 산티아고도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의 순례길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야곱을 사랑한다.
누구나 야곱의 운명을 닮았기 때문이다. 삶의 위기와 위험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처럼 광야 길을 걸어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야곱은 돌베개의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그 하나님은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는다. 먼 길을 떠나, 기약 없이 도망치는 야곱에게 귀향의 약속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하나님은 야곱의 범죄를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떠남’(10)을 독려하신다.
야곱은 그의 인생에서 진정한 탈출과 회복을 얻게 되었다. 그 자신감으로 야곱은 그 땅을 루스가 아닌 벧엘로 불렀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 하나님의 집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 그곳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된다.
‘루스에서 벧엘로!’ 그가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은 삶의 적극적인 변화를 뜻한다. 그것 때문에 야곱의 인생이 바뀌고, 그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바뀔 것이다.
이제 야곱은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더 이상 야곱의 피난길은 도망자의 길이 아니다. 그의 피난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다. 이제 야곱은 불안 중에서도 희망을 갖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선조들의 삶의 자리 역시 광야와 돌베개와 같았다. 지금도 불운한 역사는 계속된다. 다만 자신의 꿈자리,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고단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야곱은 길을 떠난 사람이었다. 모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피난길의 어귀에서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그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그와 동행하셨고, 그의 목적지가 되셨다.
하나님은 무의미한 길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길은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향이다. 우리는 그 길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기도 하고,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주저 않지 말라. 너무 오래 쉬지 말라. 숙명처럼 여기는 일로부터 탈출하라. 보다 멀리 내다 보라. 길을 가다가 마침내 길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야곱처럼 먼 길을 돌아온 우리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억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인생길을 가는 여러분과 언제나 동행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