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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조명
____임현정 / 2001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이 있다.
∥시인이 뽑은 대표시____
어쩌다 곰 외 4편
어쩐 일로 나는 곰이었는데
철창 밖으로 찔끔찔끔
쓸개즙 같은 사랑을 흘려대는
순하고 미련한 곰이었는데
불붙은 링을 뛰어넘을 때마다
허물어져가는 갈비 아래 피 묻은 돌멩이를 괴는
재주넘는 곰이었는데
흩어지는 환호성을 모을 수만 있다면
우린 천막 밖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 거야
모든 흩어지는 것들은 구름의 습성을 닮았어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너처럼
착지를 배우지 못한 빗방울처럼
죽은 체를 하는 네 곁에
늠름한 가죽 소파처럼 누워있어
다음에 만날 땐 꼭 죽은 체를 해
길들여진 곰은 죽은 것만 먹으니까
창백한 입술이 스프를 스읖, 핥을 때
나는 나머지 한 발로
물구나무를 선다
곰이라서 다행이야, 스프를 끓일 발이 네 개나 있잖아
새들의 궤적은 버찌씨를 벗어나지 못해
벚나무 아래 앉은 당신을
내가 벗어나지 못하듯
어떤 좌표들은 부리에 닿기도 전에
내리막을 굴러 발치에 쏟아진다
내달리는 차에 함부로 뛰어든 휠체어 바퀴처럼
내가 닿기도 전에 제길,
그러니까 나는 곰이었는데
참으로 알뜰하게 발라 먹힌
맛있는 곰이었는데
뭉게뭉게 솜으로 속을 채운
예쁜 박제 곰이었는데
죽은 무희가 가장 아끼던 짐승,
가장 먹고 싶어하던 먹잇감이었는데
그래서 더는 얌전할 일도 없이
철창 밖을 질주하다
사살 당한 나였는데
어쩌다 나는 곰이었는데
사과궤짝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어
우리는 밀밭 빛깔 트럭을 타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지
아직 앳된 운전병이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어
뜨거운 액체가 바지를 적시고
발밑에 작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그는
사과궤짝에 남은 썩은 사과처럼
검붉은 과즙을 흘리고 있었지
고요한 저녁이 오고 있어
작은 고랑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무른 사과는 입을 조금 벌린 채로 편안해 보였지
한밤,
더러운 야전침대에 누워
불러야하는 이름들이 있어
영문도 모르고 죽은 어린 영혼들
머리맡에 앉아서
정답게 속삭이는 것들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나무 위에 고양이
오렌지주스 병을 핥던 때처럼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지.
이 도시의 가로등 불빛은
녹슨 피조차 오렌지 주스야.
언젠가 꽃모가지를 리본으로 묶은 걸 보았어.
그녀도 그렇게
툭툭 팔을 분지르며 곤두박질 쳤지.
네가 모가지에 칭칭 감아준
질긴 전화선
난 이 도시의 색소가 좋아.
이 흥건한 오렌지 빛 핥을 수도 없어
먹통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
무서운 길을 네가 지나갔지.
그녀를 탬버린처럼 흔들던
가쁜 숨소리가 사라진 은행나무 아래는
둥근 마침표처럼 부드러운 흙이야.
뾰족한 화살은 노란 중심으로 날아가 박혀. 그러니까
그 눈빛은 네 거야.
잃어버린 물건, 네 가슴팍에 놓고 갈게.
하얀 장갑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수소풍선처럼 날아가버린
털을 곤두서게 하는 오렌지빛 비명도.
축하해. 야옹
밭을 사이로 총!
구부러진 못처럼 앓아누운 밤이면
나를 향해있던 녹슨 쇠붙이들이 밤새 흔들렸다
그건 당신의 호명
울타리에 매달린 깡통이며 냄비뚜껑 따위가 살갑게 인사하는 그 밭,
노랗게 밑이 든 고구마를 달게 먹었던 것인데
당신이 여름내 가꾸던 그 밭에 무성한 기척을 남겼던 것인데
내가 아는 것은
약통을 메고 한뎃잠을 자는 벌레들을 쓸어내던 당신
울울한 덫을 심고 벌거숭이 두더지들을 몰아내던 당신
깡패의 불온한 맹세처럼 그 구역, 그 끄나풀을 지켜내던 당신
그래서 난
우리가 그 밭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줄 알았는데
자루 빠진 낫이며 호미를 주렁주렁 매달던 그 어깨가
오직 내 것이었던 그 팔뚝이
내게 총구를 겨눌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가 키운 올망졸망한 숨통들을 겨눌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나는 그 밭이 감쪽같이 우리들의 것이라
우리가 밭을 사이로 꼼짝없이 사랑하는 거라
명명백백 생각했었는데
시든 그늘을 걷어내던 그 손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염통을
꼬물대는 새끼들을 꺼내며
당신이 싱그럽게 웃는다
이 지긋지긋한 돼지새끼들,
저수지식당
흠뻑 젖은 사내가 냉장고 앞에 서 있다
냉장고엔 무른 자두와 한쪽 뺨이 상한 사과
그가 서성이는 건
물바가지를 들고 나오는 늙고 마른 손 때문
물배라도 채우고 가렴
먼 길을 짚어온 사내에게
식은 두부 한 모
내올 새도 없이
강바닥 같은 밤이 밀려든다.
흩어지는 것들의 식사가 그러하듯
사내가 마지막으로 들이킨 국숫발이
구름의 뒤태를 완성한다.
돌덩이 같은 음식을 삼키고
지상에 남고 싶은 사람
그가 냉장고 문짝을 붙들고 버틴다.
왈칵,
서러운 빗물이 쏟아져 내린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____
붉은 다라 외 4편
통에 던져 넣은 붕어들이 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게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향해 부풀던 부레와
밤으로만 흘러가던 수로들이
수챗구멍에 버려질 때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 대신 잡아먹히는 게
내가 키우던 무른 저수지가
당신을 놓치고 만 게
밤 고양이들이
협심증을 앓는 당신의 심장 대신
내 심장을 물고 가는 게
나를 빌어 하루를 연명하는 게
나를 버려 당신을 연명하는 게
얼마나 다행한 불행인가
가위
처음 가위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두 개의 칼날을 잇대
한 폭의 어둠을 가르게 한 사람
치근대는 이승과 지분대는 저승을 잘라내고 싶던 사람
그토록 아끼던 반달돌칼이 두 동강이 나서 돌아왔을 때
세상 모든 거미줄을 거둬 이어붙이고 싶던 사람
하지만 차마 못했던 사람
이승에서 어림없다면
저승에서도 글러먹었다면
복수하듯 암날 숫날로 만나
희희덕대는 지천들 싹뚝, 잘라내자고
잘린 다리가 몸통을 향해 꿈틀대듯
죽은 꽃가지가 산가지를 향해 묵념하듯
잠잠히 끌어안을 때마다
잘려나가는 은빛 지느러미들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에 놀아나던
간지러운 은어새끼들
지상에서는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당신들을 위해
그와
그녀가
가위를 만들었다
사카린
심심산골, 사카린 같은 눈이 반짝이는 거기
아궁이 앞에 나란한 도둑고양이나 될까?
그는 푹푹 콩을 삶고
김이 펄펄 솟는 게으른 아궁이를 삶고
그가 만든 흙벽돌 같은 메주들이 들보 아래서
캄캄한 옹기를 꿈꿀 때
그럼 난, 누름돌이나 될까?
미운 가시내 뒤통수를 후려치듯
호두를 까는 사내
허리까지 넘실대던 새카만 머리채처럼 곰살 맞은 밤이면
씨알 굵은 깍때기 만이 화로를 되살린다네
눈곱을 떼는 당신의 발치에서 야옹,
멸치 대가리 한 줌과
닭벼슬 맛 사료
싸락눈 몇 점이면
난 천장에 매달린 곶감처럼 방글댈 수 있어요.
당신에겐 나와 곶감과 로켓건전지를 매단 얌전한 고물라디오 뿐
우리는 정답게 소멸 중인거죠?
양파망 그득한 병세들처럼
봄이 오기는 하나?
이 심심산골
고양이네 부엌에
당신이 도망친 쿵짝쿵짝
나라는 꿈속에
로드 뷰
나무가 꾹 짜낸 뾰루지
은행알 흥건한 도로변에는
점프하는 그 애가
어째서 신호등은 우리 앞에서만 느려지지
동시에 나타나는 갈색꼬리들도 있어
제방 위에도
간밤에 내다버린 솜이불 밑에도
폭주하던 갈색스틱들이 끼익,
꼬리의 습성은 막다른 골목이니까
생물오징어처럼 젖은 아저씨
물고기들은 지느러미가 발이 되는 순간을 기억 할까요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을?
우리가 녹슨 배관을 타고 흘러갈 동안
빨판이 모여 입술이 되고
다리가 모여 진흙탕이 되는 발악을
스티로폼이라도 깔고 주무세요
얼음으로 치장한 생선들처럼
계란찜 같은 들판을 등지고 누군가 숟가락처럼 걸어오네
로드 킬 전의 할머니
방바닥이 길바닥인줄 몰랐죠
혓바닥부터 길바닥인줄은 몰랐다
그토록 살벌한 입국심사라니,
금세 합류할 거예요
해변에 떠밀려온 조개껍데기의 명단에
조약돌의 부드러운 윤곽에
물고기였던 당신이
조심스레 지느러미를 내려놓는 그 해안
아가미를 닮은 귓바퀴로
모든 떠밀려가는 것을 그리워할 어린 포유류에게
먼 미래에게
해파리였던 적
게 껍질 통과해 봤어?
근육다발을 건너, 말랑한 눈동자로 솟구치다
따끔한 촉수에 속까지 파먹혀 봤어?
잠들기 좋은 별모양 매트
가장 서늘한 밑바닥에 누워 잠잠히 죽어 봤어?
난 아주 작은 유생이었는데
오래 묵을 바위를 찾아 꼬리를 흔드는
멍청한 멍게 유생이었는데,
어쩌다 해파리가 되었는지 몰라
당신은 여전히 돛대에 묶인 채로
꽃다발 같은 빨판이 되었다가
언젠가 나를 파먹던 예쁜 꽃게
우리는 한때
물고기였던 적도, 아주 잠깐 꽃게였던 적도,
그 꽃게를 녹여먹던 해파리였던 적도 있지
이렇게 한 몸이었던 적도 있지
나란히 갇힌 투명감옥이었던 적도 있지
우리는 한때 애인이었던 적도 있지
죽기 직전까지 사랑해 사랑해 악을 쓰던
철천지원수였던 적도 있지
∥임현정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_
젖니의 행방
목요일마다 활어 트럭이 집 앞에 온다. 싱싱하고 저렴해서 제철 생선은 금세 동난다. 줄 끝에 서서 회 치는 사내의 현란한 칼질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차례다. 분명 내 차롄데 누군가 새치기를 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낯짝 두꺼운 아주머니가 수선을 떤다. 회 치는 사내는 별반 대꾸도 없이 광어 두 마리를 수조에서 꺼내 동시에 목을 딴다. 두 마리를 동시에 잡자니, 시간이 두 배로 드는 건 당연지사, 사내에게는 일타이피 일지 몰라도 시간에 인색한 나로서는 부아가 난다.
빛이 지는 어스름 속에서 광어대가리는 몇 번 더 입을 뻐끔대다 양동이에 버려진다. 조금은 나쁘고, 조금은 적막한 이 때에 시가 찾아온다. 놓친 연처럼 날아가기 전에 써야한다. 줄 끝을 벗어나 미친 듯이 시를 쓰는 나를 새치기전문 여편네가 힐끔대거나 말거나.
강에게 시가 있다면, 강도 시를 쓸 수 있다면, 늘 품고 다니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늘 흘려보내는 서러운 물살 때문이 아니라, 어느 날 떠밀려온 신발 한 짝 때문일 거다. 어디서 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신발 한 짝 때문에 끙끙 앓다, 기어이 시 한 편을 기슭에 부려놓을 거다. 그러므로 어느 기슭에나 강이 쓴 시가 찰랑대는 것이다.
새치기전문 아주머니가 던져준 소소한 불편함이 일상을 뒤집고, 싱싱한 활어 같은 시 한 편을 덜컥 내놓는 것처럼. 시를 가졌으니 나는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댓 명이 더 새치기를 한들 괜찮을 성싶다. 회 대신 시라면, 얼마라도 좋다.
어릴 때는 시가 오지 않을까 초조했다. 길바닥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뭐라도 발견되기를 갈구했다. 목걸이 대신 메모장을 매달고 다녔고, 먼 길을 돌아서라도 필기구를 챙기곤 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다. 물때가 있다는 걸 몰랐던 시절, 삭막한 갯바위만 훑던 시절, 그러다 뭐라도 그물에 들면 철없이 좋아했다. 이제는 물때에 맞춰 그물을 드리워야 함을 안다. 미리 그물을 손질해둬야 하는 것도.
꾸준히 시를 읽는다. 꾸준히 필사한다. 그것이 내겐 그물 손질. 그러다 물때가 오면 넉넉히 시를 쓴다. 당장 쓸 수 없다면 메모도 괜찮다. 어느 달은 만선이고, 어느 달은 폐업직전, 그럴 땐 건어물처럼 쟁여놓은 메모를 꺼내 쓴다. 그러므로 나는 가난한 어부를 많이 닮았다.
며칠 전부터 이가 흔들리던 아이를 구슬려서 치과에 갔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찰라, 이가 뽑혔다. 어리둥절한 아이가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에게 손을 내민다.
“이 뽑은 거 주세요.”
“이제야 달라면 어쩌니, 벌써 버렸어.”
“원래 제 거였잖아요.”
“미리 말하지 않으면 안 돼.”
본래 자기 거였으니 달라 하는 게 당연한데, 버려서 안 된다 하니 아이가 울상이다. 하긴 버려진 이들이 팝콘처럼 그득한 그곳에서 어찌 네 젖니를 찾을까. 미리 말하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일분도 안됐는데 버리다니, 나도 서운했다. 결국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병원을 나서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게 필요하니?”
“다시 끼워보고 싶어서요.”
헛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이를 넣다 뺐다를 하고 싶었나보다.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버려진 이는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쓰고야 말았다. 조그만 턱에 울타리처럼 박혀있던 오종종한 젖니는 어딜 가고 있을까, 지가 낸 구멍에 솔솔 바람이 드는 줄도 모르고, 핑크빛 혀가 쏙 나왔다가 쏙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어딜 돌아다닐까.
나에게 시는 자주 그렇게 온다. 늘 다니던 골목을 벗어나 옆 동네를 놀러가는 개구쟁이처럼 한 발 더 내딛는 것,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조개껍질을 발견하는 것. 불편함에 기대어 시를 쓰는 것, 그게 나의 체험적 시론인지도 모르겠다.
∥임현정 시인을 주목한다____
다행한 불행의 역할극
전형철
무덥다. 이것은 직방의 언어이다. 무덥다는 말 외에 어떤 표현은 이런 날씨에는 무참히 잠식당하거나 잘려나가고 만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을 즈음은 입추 부근이다. 가을의 초입인 셈인데 무덥다. 양력과 음력의 괘가 맞지 않음이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를 명명하는 그 자체에 관심이 간다. 이렇게 무더운데 가을이 시작된다. 새벽 공기가 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감각과 인식의 불일치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비끌림이자 미끄러짐이다. 더운데 차가움을 운위하는 것은 분명 A를 온전히 A로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잠재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a의 탄생은 그러니까 A의 잔상이든 그림자이든 코어의 찌꺼기이든 연관을 피해갈 수 없다. 거기에 이지라는 아이런이 탄생한다.
임현정 시인의 시는 읽고 곱씹을수록 수로에 빠지게 되는 시편들이다. 그리고 그 수로는 어둠에 익숙한 감정이 배어나며 일정한 한기를 지니고 있다. 처음 그의 시편을 읽으며 마치 익숙한 서정시의 인상을 갖게 되지만(특히 시의 제목을 뽑아내는 전략에서부터), 거듭해 읽을수록 일상을 가로지르는 차가움을 느끼게 된다. 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시편의 근육 섬유소 하나하나에 묵직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마치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아 챌 시점을 재고 있는 백로나 물총새의 바로 그 순간과 풍경처럼 말이다.
쉽게 읽히지만 쉽게 꼬리가 잡히지 않고 어떤 세계와 관계 속으로 찬찬히 느끼지 못하게 이송하고 있는 시가 임현정 시인의 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가 일상으로부터 비롯된 포착에 예민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있었으나, 지금은 있지 않지만 없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체험적 시론에서 적은 대로 “강에게 시가 있다면, 강도 시를 쓸 수 있다면, 늘 품고 다니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늘 흘려보내는 서러운 물살 때문이 아니라, 어느 날 떠밀려온 신발 한 짝 때문일 거다.”라는 인식에 기초할 것이다. 시인은 어린 물고기나 서러운 물살이 아니라 “떠밀려온 신발 한 짝”에 주목한다. 신발에 주목한 이유는 “어디서 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불편한 인식이 작동해 개입되기 때문이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감각 그 자체로는 A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흔과 내력이 촉지되는 것이다. 강이 아니고 강의 것도 아니고 그러나 강에 의해 나에게 떠밀려 온 외로된 신발 한 짝, 그 인식의 구멍을 시인은 발견한 것이다. 사라져버린 아이의 젖니처럼, 끼워 보고 싶으나 이미 어느 강물에 떠가는 신발 한 짝이 되어버린 젖니와 젖니가 있는 구멍 사이에 임현정 시인의 시가 있다.
일상은 정립과 반립이 만나는 소용돌이치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공간이다. 실재 없는 진리와 진리 없는 실재인 소외가 끊임없이 맞물리는 역동적 공간이다. 한 정위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장 속에서 순간순간이 도약하며 잠재태와 가능태가 곁고튼다. 시인의 시에는 이러한 일상의 공간이 넓다. 그의 시의 여백은 여백이 아니라 더 많은 관계와 이야기로 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백 속에, 공간 속에 새로운 전유와 재배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단계까지 가면 시인의 시가 단순히 일상적 모습을 묘사하거나 풍경을 그리는 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통에 던져 넣은 붕어들이 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게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향해 부풀던 부레와
밤으로만 흘러가던 수로들이
수챗구멍에 버려질 때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 대신 잡아먹히는 게
내가 키우던 무른 저수지가
당신을 놓치고 만 게
밤 고양이들이
협심증을 앓는 당신의 심장 대신
내 심장을 물고 가는 게
나를 빌어 하루를 연명하는 게
나를 버려 당신을 연명하는 게
얼마나 다행한 불행인가
- 「붉은 다라」 전문
붉은 다라에 붕어가 있다. 붕어는 잡혀왔다. 다라라는 죽음의 예비적 공간 안에 갇혀있다. 그런데 시인은 “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붕어가 자신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 마리 붕어가 된다. 이러한 ‘-되기’를 통해 시인은 “얼마나 다행인가”라며 나의 죽음이 당신의 죽음을 대신한 것에 대해 안도한다. 그러나 이는 후반에 이르러 반전된다. “내가 키우던 무른 저수지가/ 당신을 놓치고 만 게”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붕어이며 동시에 저수지이고, 당신은 그 저수지에 또 다른 붕어였다는 사실이다. 앞의 “당신을 향해 부풀던 부레”와 “내가 키우던 무른 저수지”의 당신은 한쪽으로 완전히 포섭되거나 제어되지 않는 존재와 관계의 고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대위되지만 공격적 분리에 빠지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나 때문에 하루를 더 살게 될 당신과 나를 버려 당신을 살리는 나와 오버랩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는 마지막 연으로 이어진다. “다행한 불행”이 만드는 아이러니는 아이러니 그 자체를 뛰어 넘는다. 왜냐하면 “다행한 불행”은 ‘불행한 다행’으로 바꾸어도 얼마든지 논리의 정합성을 넘어 시적 진리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통해 말하고 있지만 나는 나를 말한 것도 당신을 말한 것만도 아닌 개성적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처음 가위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두 개의 칼날을 잇대
한 폭의 어둠을 가르게 한 사람
치근대는 이승과 지분대는 저승을 잘라내고 싶던 사람
그토록 아끼던 반달돌칼이 두 동강이 나서 돌아왔을 때
세상 모든 거미줄을 거둬 이어붙이고 싶던 사람
하지만 차마 못했던 사람
이승에서 어림없다면
저승에서도 글러먹었다면
복수하듯 암날 숫날로 만나
희희덕대는 지천들 싹뚝, 잘라내자고
잘린 다리가 몸통을 향해 꿈틀대듯
죽은 꽃가지가 산가지를 향해 묵념하듯
(…중략…)
지상에서는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당신들을 위해
그와
그녀가
가위를 만들었다
- 「가위」 부분
이 시는 앞서 인용한 시에 비해 보다 명확하게 의도가 드러난다. 가위는 두 개의 칼날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 생의 전체를 가르기도 한다. 가위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의심은 어둠을 넘어 이승과 저승으로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인은 이승과 저승마저도 치근대고 지분댄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승과 저승의 상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이 생이 불가역에 대한 미련과 고통에 빠져 있다면 저 생도 “글러먹었을” 것이다. 오히려 시인이 주목하고 주문하는 것은 가위로 잘라내는 행위 자체이다. 잘리는 또는 자르는 결단 속에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과 간지러운 은어새끼’들을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자르는 것은 곧 끌어안는 것이며 영영 이루어지지 않은 당신들을 위한 ‘당신들’ 안에 있는 “그와 그녀”의 멋진 향락인 셈이다.
다음의 시에서는 하나의 역장이 느껴진다. 우연의 일치이든 오마주이든 그렇게 읽힌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백석의 그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른다.
심심산골, 사카린 같은 눈이 반짝이는 거기
아궁이 앞에 나란한 도둑고양이나 될까?
그는 푹푹 콩을 삶고
김이 펄펄 솟는 게으른 아궁이를 삶고
그가 만든 흙벽돌 같은 메주들이 들보 아래서
캄캄한 옹기를 꿈꿀 때
그럼 난, 누름돌이나 될까?
미운 가시내 뒤통수를 후려치듯
호두를 까는 사내
허리까지 넘실대던 새카만 머리채처럼 곰살 맞은 밤이면
씨알 굵은 깍때기 만이 화로를 되살린다네
눈곱을 떼는 당신의 발치에서 야옹,
멸치 대가리 한 줌과
닭벼슬 맛 사료
싸락눈 몇 점이면
난 천장에 매달린 곶감처럼 방글댈 수 있어요.
당신에겐 나와 곶감과 로켓건전지를 매단 얌전한 고물라디오 뿐
우리는 정답게 소멸 중인거죠?
양파망 그득한 병세들처럼
봄이 오기는 하나?
이 심심산골
고양이네 부엌에
당신이 도망친 쿵짝쿵짝
나라는 꿈속에
- 「사카린」 전문
독특한 상상력에 의한 시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만약 내가 흰 당나귀라면, 또는 흰 당나귀에 시선이라면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시는 그 같은 질문을 구체화해 한 편의 재미있는 시로 구현했다고 하겠다. 예의 작품에 푹푹 내리는 눈을 시인은 위 작품에서 “사카린 같은 눈이” 반짝인다고 적는다. 달고 가루로 된 사카린은 이제 부엌에서 찾기 어렵지만 “심심산골”의 아궁이로 구현된 공간 속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거기”에는 콩을 삶고 메주를 쑤며, 호두를 까는 사내가 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시 전체의 화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술자는 고양이이다.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처럼 시인은 고양이가 되어 고양이의 눈으로 당신이라는 “그”를 바라고 묘파하고 있다. 1연에서 “도둑고양이나 되까”라고 말하지만 이후 어느새 나는 “고양이” 자체가 되어 있다. 설령 그가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곶감과 고물 라디오와 함께 그를 둘러싸고 관계의 정의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시는 “우리는 정답게 소멸 중인거죠?”라는 아름다운 구절에 이르게 된다. 정다운 소멸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이 부딪힘은 심심산골 고양이네 부엌의 사카린만큼이나 달달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나라는 꿈속”에 있기에 봄은 오지도 가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해파리가 되었는지 몰라
당신은 여전히 돛대에 묶인 채로
꽃다발 같은 빨판이 되었다가
언젠가 나를 파먹던 예쁜 꽃게
우리는 한때
물고기였던 적도, 아주 잠깐 꽃게였던 적도,
그 꽃게를 녹여먹던 해파리였던 적도 있지
이렇게 한 몸이었던 적도 있지
나란히 갇힌 투명감옥이었던 적도 있지
우리는 한때 애인이었던 적도 있지
죽기 직전까지 사랑해 사랑해 악을 쓰던
철천지원수였던 적도 있지
- 「해파리였던 적」부분
고양이였던 시인은 해파리로 변신한다. 그리고 “어쩌다 해파리가 되었는지 몰라”라고 말하지만 질문보다는 답이 시적 진실을 드러내 준다. 모든 하나이자 하나인 모든 것처럼 몸은 하나의 우주 전체임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대명사를 아우를 수 있는, 또는 있다고 가정하는 ‘우리’는 물고기였고 그것을 파먹는 꽃게였고 꽃게의 촉수까지 녹여 먹는 해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라는 몸과 투명감옥 속에서 애인이었던 적도 사랑한다고 악을 쓰는 철천지원수였던 적도 있는 것이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이토록 가득한 시편들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되기’와 역할극이나 놀이를 넘어 슬픈 세계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무가 꾹 짜낸 뾰루지
은행알 흥건한 도로변에는
점프하는 그 애가
어째서 신호등은 우리 앞에서만 느려지지
(…중략…)
그토록 살벌한 입국심사라니,
금세 합류할 거예요
해변에 떠밀려온 조개껍데기의 명단에
조약돌의 부드러운 윤곽에
물고기였던 당신이
조심스레 지느러미를 내려놓는 그 해안
아가미를 닮은 귓바퀴로
모든 떠밀려가는 것을 그리워할 어린 포유류에게
먼 미래에게
- 「로드 뷰」 부분
시인은 거리를 응시하고 있다. 뾰루지처럼 짜진 은행알이 흥건한 냄새의 풍경 속에서 아이가 뛰어오르자 시간은 갑자기 느려진다. 그러면서 “순간”이라는 시간의 미분은 풍경의 적분으로 이어진다. 젖은 아저씨와 로드킬 직전의 할머니들, 시인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살벌한 입국심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을 예비하며 동시에 먼 과거의 장면에 주목한다. 지구에서 가장 먼저 육지를 딛었던 물고기들의 순간과 그리고 죽음 쪽이든 그 어디이든 떠밀려갈 진화된 물고기인 포유류의 미래에 대해. 우리에게 남아있는 육화된 기억인 “아가미를 닮은 귓바퀴로” 시인은 거리에서 다시 육지에서 바다로 들어갈, 지느러미가 발이 되는 슬픈 세계사를 조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허전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을 웅변적이거나 교조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긴 언술의 작품마저도 허기롭다. 그러나 임현정 시인의 시 속에는 읽은 사람이 소화해내야 할 숨은 그림이 곳곳에 도사려 있다.
“당신의 호명”(「밭을 사이로 총!」)에 우리는 나를 당신을 또는 우리를 어떤 정체로 드러낼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린 아무것도 할 수”(「사과궤짝」) 없을 것이다.
전형철 /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가 있고 제1회 지훈창작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