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충의사는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정기룡 장군은 조선 중기 무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웠다.
현재 이곳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지난 1974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됐다.
총 1만3천209㎡ 부지에 사당과 전시관, 내외삼문, 기념비, 관리사무소 등이 있고 전시관에는 교서 2점, 교지, 신패, 옥대 각 1점 등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김정목 기자 tigerjm@idaegu.com
선조19년 (1586) 10월. 날로 어려워만 가는 나라 안팎의 사정에 잠자리를 뒤척이던 임금은 선잠 속에 꿈을 꾸었다.
거대한 용이 종루의 기둥을 칭칭 감으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부릅뜬 눈에는 푸른빛이 형형하고, 황금빛 비늘은 눈이 부셨다.
놀란 임금이 소리를 지르자, 용은 여덟 개의 발을 휘저으며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었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임금은 무감을 불러 종루를 살펴보라 일렀다.
무감은 검은 얼굴에 팔척장신의 건장한 젊은이를 데리고 왔다.
차림은 초라했으나 꿈에서 본 용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의 일이었다.
-무슨 연고로 종루에서 자게 되었는고?
-소인은 경상도 하동에서 태어나 지금은 경상도 상주에서 살고 있는 정무수라 하옵니다.
무과에 응시하였사온데 방이 붙기를 기다리던 중 노자가 떨어져 종루에서 자고 있었나이다.
젊은이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훌륭한 장군감이로다.
앞으로는 이름을 기룡이라 부르도록 하라.
후일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을 통해 60전 60승, 무패의 신화를 일군 장군이 무수에서 기룡(起龍)으로, 용처럼 일어서서 역사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장군의 나이 25세였다.
◆정기룡 장군 얼과 정신 오늘에 남아
충의사 전시관에는 정기룡 장군이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 옥대 등 보물과 각종 문화재 가 전시돼 있다.
정기룡 장군 영정
정기룡 장군의 옥대(위)와 칼
절도사 임명교지
임란 당시 광해군이 정기룡 장군에게 보낸 교서
보물 제 669-2호로 지정된 신패
목함지뢰 폭발로 두 명의 아군 병사가 다리를 잃는 참상을 당하고, 대북 확성기가 침묵에서 깨어나 심리전을 전개하고, 포탄을 주고받고, 준전시사태를 선포하고,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워치콘을 한 단계 높이고, 전폭기가 뜨고, 잠수함이 기지를 떠나 오리무중이 되고…. 휴전선 일대에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날 충의사를 찾았다.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옷깃 여미고 눈 감으니 조선 중기의 무장 정기룡(1562~1622) 장군의 뜨거운 함성이 400년 세월을 가로질러 상기도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총부리를 겨눈 남북의 오늘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듯, 이래서는 안 된다는 듯,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는 듯 장군의 형형한 눈빛이 못난 후손들의 딱한 처지를 혀를 차며 걱정하고 있었다.
충의사는 기룡무즉영남무, 영남무즉아국무(起龍無則嶺南無, 嶺南無則我國無), 기룡이 없으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조선실록이 기록할 정도로 임진왜란에 맹위를 떨친 장군의 얼과 혼을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약 16㎡ 규모의 작은 사당이었으나 지난 1978년 호국선현유적지 정화사업으로 총 1만3,209㎡ 의 부지에 사당, 전시관, 내외삼문, 기념비, 관리사무소 등을 세워 확장 정비했다.
전시관에는 교서 2점, 교지, 신패, 옥대 각 1점 등 보물 제669호 5점과 교지 19점, 매헌실기 판목 58판 등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충의사는 신도비, 묘소와 함께 1974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가 모셔져 있는 전각.
송시열이 글을 쓰고 이세재가 글씨를 쓰고, 김수용이 글씨를 칼로 깎아 세운, 높이 370㎝, 폭 130㎝, 두께 42㎝, 귀부와 이수를 갖춘 신도비에는 장군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혁혁한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기록을 풀어서 덧보태면 이렇다.
장군은 1562년(명종 17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한다.
탄생할 때 하늘에는 무지개가 뜨고 집안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기상이 드높아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태어난 것이라 믿었다.
거창과 금산, 상주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그 전공으로 상주목사가 된 장군은 정유재란 때 고령ㆍ성주ㆍ합천ㆍ초계ㆍ의령 ㆍ경주ㆍ울산 등을 탈환한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한다.
향년 61세였다.
장군의 전투사를 되돌아보면 그는 신출귀몰한 지장이었고, 왜군의 생간을 씹어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용장이었고, 민초들의 마음을 모아 함께 싸울 수 있었던 덕장이었다.
선조 25년 10월, 상주성과 그 일대는 왜병들의 노략질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왜적의 부대가 용화동으로 노략질을 떠났다는 급한 전갈을 받은 장군은 부하들을 계곡에 숨기고 단기필마로 적진을 유린했다.
안장도 없는 말에 훌쩍 올라타더니 왜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간다.
두 발로 말 등을 밟고 훌쩍 섰다가 두 손을 짚고 물구나무를 선다.
말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가 배 밑으로 들어가 숨기도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의 신출귀몰한 묘기에 놀란 왜적들이 우루루 몰려와 얼빠진 눈으로 구경을 할 정도였다.
말솜씨에 홀린 적병들은 장군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갑장산 골짜기로 유인되어 전멸을 당한다.
용화동 전투 이후 왜적들은 장군이 두려워 노략질을 못하고 상주성에만 숨어서 지내게 되었다.
◆혈서적삼, 지아비의 마음으로 통곡
정기룡 장군 묘소. 묘소는 사벌면 금흥리에 위치해 있다.
상주성은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만여명의 왜병이 주둔하면서 북상하는 적에게 군량미를 공급하고 있었다.
적들의 노략질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무고한 백성들을 보는 장군은 가슴이 저려왔다.
활 한번 당겨보지 못한 천명 남짓 병졸들로 1만여 왜병정예부대가 지키는 상주성을 어떻게 탈환할 수 있단 말인가. 지략이 필요했다.
군사들에게는 관솔을 따게 하고, 장군을 도와 싸움에 나선 마을의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도 횃불 10개씩을 준비하도록 했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한 눈속임 작전이었다.
성을 빼앗긴 지 7개월, 가슴에 맺힌 한을 풀 때가 온 것이었다.
어둠을 틈타 요소요소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한밤중 남산에서 피워 올린 횃불을 신호로 성을 에워싼 1천여개의 횃불이 대낮같이 타올랐다.
동시에 각 진마다 북, 꽹과리, 징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켜 적들의 사기를 꺾었다.
수레바퀴를 단 굵은 통나무 공격으로 단번에 성문을 부수고 적장의 목을 한 칼에 베었다.
1592년 11월 23일 상주성은 그렇게 탈환되었다.
상주성 탈환으로 장군은 육지의 이순신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당교전투는 권종경, 정경세, 이흥도, 채유희 등이 앞장서 조직한 의병들과 함께 싸워 이긴 쾌거였다.
장군의 신도비에는 부인 강씨의 피묻은 적삼 이야기도 적혀 있다.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되고 3,400명의 병사와 6만여의 백성이 도륙을 당한다.
장군의 부인 강씨는 성이 함락되자 돌로 손가락을 쳐 적삼에 혈서를 남기고 친정어머니와 함께 남강에 투신한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택한 죽음이었다.
훗날 부인의 혈서적삼을 곤양의 선산에 묻으며 장군은 땅을 치며 통곡한다.
용트림하는 장군의 기상인들 부인의 피 묻은 적삼 앞에서 어찌 지아비의 마음으로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렇듯 혁혁한 장군의 공은 인조반정 때문에 묻히고, 아들까지 시기해서 경계했던 선조의 임금답지 못한 치세에 의해 묻힌다.
장군의 업적이 세상에 제대로 드러나기까지는 물경 150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1773년, 영조49년 충의라는 시호가 주어지고, 그가 묻히고 싶어 했던 상주에 충렬사가 세워지고, 하동 고향에 경충사가 지어진다.
장군 가신지 어언 400년, 지난 5월 상주시 도남동 낙동강 둔치에서는 장군의 위업을 기리는 상주외경 뮤지컬 ‘무인 정기룡’을 무대에 올렸다.
정치에 휘둘려 병영의 문화가 관료화되어가고 있어 걱정인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볼 때 장군의 무인정신은 얼마나 빛나는 것이랴.
남과북의 고위급이 마라톤협상 끝에 극적인 합의점을 찾았다는 뉴스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다리를 잃은 병사들도 웃으며 악수하는 저들의 사진을 병상에 누워 보고 있을 것이다.
전시상태를 풀고, 확성기 스위치를 내리고, 가슴을 맞대고 같은 민족끼리 잘해보자고 한다.
그러나 왜 이렇게 미덥지 않을까? 기룡무즉영남무, 영남무즉아국무(起龍無則嶺南無, 嶺南無則我國無). ‘기룡’의 자리를 대체할 그 무엇도 지금, 여기 우리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장군이 그립다.
강현국
시인ㆍ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