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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만들기
최 인 석
1
‘한주 본관’은 한강 변에 자리 잡고 있다. 지상 23층, 지하 5층, 총면적 1만 8천 평 규모의 ‘한주 본관’은 마포대교 강북 쪽 인근의 거의 모든 대형 건물들이 그렇듯이 지난 86년 가을 무렵, 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고층 건물 건설 경기를 타고 기공되어 88년 봄에 준공되었다.
4대의 고속 승강기가 가동 중이다. 건물 외벽을 ‘매직미러’라고 불리는 장식재로 마감하였기 때문에 멀리에서 보면 그 건물은 땅을 뚫고 우뚝 솟아난 23층 높이의 거대한 거울처럼 때로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때로는 우중충하게 죽어가는 회색의 하늘을 비춰낸다.
건물의 1층에는 은행과 한주 계열 증권회사의 마포 지점, 그리고 한주 계열 자동차회사 ‘한주제브라’의 전시장이 자리 감고 있고, 2층부터가 한주그룹의 몇 개 계열사들이 자리 잡은 사무실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한주 본관’ 의 사장실과 한주그룹의 기획실, 회장실도 있다.
지하 1층에는 ‘한주갤러리’ 라는 이름의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한주그룹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고 소비자들에 대해 친근감을 주기 위한 시설인 셈이다. ‘한주그룹 홍보기획실’이 직접 운영한다. 이따금 국내외의 저명한 화가와 조각가, 서예가 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곳에서는 한 해에 한 번, ‘한주컬렉션’ 이라는 이름의 화집을 발간한다. ‘한주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들 가운데에 인기를 모았던 작품들을 촬영하여 만들어내는 화집이다. 원래는 ‘한주그룹 홍보기획실’에서는 이 화집을 매년 발간할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한주 본관’이 준공된 첫해를 기념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바로 그 첫해, 그러니까 1988년간 『한주컬렉션』 이 그만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는 바람에 그 이래 매년 계획되는 중요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주그룹 홍보단’이 성공을 거둔 드문 사업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이 지하 1층에도 물론, 이와 같은 사무실 전용 건물들의 지하층이 흔히 그러하듯이, 음식점과 술집, 문방구점과 다방, 도자기점과 화방, 양복점과 골프 전문점 등이 개업하고 있는 상가가 있다. 그렇지만 ‘한주갤러리’ 앞의 로비에서는 이 상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상가는 로비 한쪽 구석에 있는 비좁은 통로를 빠져나가야만 비로소 나타난다. 건물의 설계를 일부러 그렇게 하였다. 미술관 같은 문화적인 시설물 바로 앞에 식당이나 술집이 찌개백반이라는 둥, 꼬리곰탕이라는 둥 하는 식의 메뉴를 내걸어서야 한주그룹의 이미지가 온전히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설계자들, 혹은 ‘한주그룹 홍보기획실’은 백반집이나 곰탕집은 한주그룹의 이미지 관리에 지장을 초래하지만 카페테리아는 아무런 지장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주갤러리’ 바로 앞에, 그러니까 로비에 두 개의 카페테리아가 나란히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하 2층에는 건물 전체에 동력과 난방을 공급하는 동력실이 자잡고 있고, 지하 3층에서부터 5층까지는 주차장이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용된 적은 없지만, 건물 옥상에는 헬리포트⁕도 설치되어 있다. 김 회장은 머지않아 서울 시내에서도 헬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헬리포트를 설치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던 것이다.
건물의 내벽은 이탈리아 비츠엔츠아산의 고급 대리석으로 장식했다. 로비의 벽면에는 ㄷ화백의 120호짜리 거대한 그림이 걸려 있고, 몇 개의 조각품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그림은 쉽다. 두 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있는 대로 다 펴고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제하여* 「비상」. 한주그룹의 비상을 뜻하는 것 이리라.
조각 작품들은 좀 어렵다. 아니, 엉뚱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두 개의 커다란 밥주발 같은 것을 엎어놓고 표제를 「사랑」 이라 붙여 놓은 것, 그리고 가슴과 성기 등의 치부를 덜렁 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뼈와 내장까지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세 남녀의 기괴한 모습을 쇠붙이로 만들어놓고 표제를 「문(門)」이라고 써 붙인 것이 그렇다.
그러나 ‘한주 본관’에 근무하는 수천 명의 직원들 가운데 「사랑」이 됐건 「문」이 됐건 그런 회화나 조각 작품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소원들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청소원들이야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사랑」이나 「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하니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한주 본관’이 완공되었을 때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주로 두 가지 시설물 때문이었다. 그 건물의 주 로비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하는 데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소요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단 한 단의 설치 비용이 3억이라더라, 하는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문이다. 다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석재를 골라 쓰고, 설계를 정성들여 하다보니까 다소 많은 비용이 들었던 것뿐이다. 또 하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시설물이 화장실이었다. 건물 전체의 화장실에 사용된 모든 자재가 하다못해 수도꼭지까지 외제라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다만 화장실에 사용된 몇 가지 자재,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몇 가지 시설물들을 외국에서 수입해 들여다 썼을 뿐이다.
여의도에서 마포대교를 건너다 보면 거대한 황금색의 건물이 마치 하늘을 향하여 곤두선 화살표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조립 생산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전투기를 제작하는 방위산업체로부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낵 과자인 ‘초컬릿 팝스’를 만들어내는 제과업체에 이르기까지, 58개의 크고 작은 계열휘사를 거느린 한주그룹의 본부 건물이다.
2
그날, 조경현 차장이 보고 서류를 들고 승강기 앞에 선 시각은 오후 1시였다. 승강기 옆 벽면에는˙
“투쟁! 투쟁! 투쟁!”
“16퍼센트 인상 사수!”
“쟁취! 보너스 600퍼센트!”
“차별 철폐!”
따위의 구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경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구호들을 외면하였다. 지난가을에 조직된 이래 ‘한주 본관’ 용원* 노동조합은 회사 쪽과 끊임없이 크고 작은 마찰을 빚어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흘 전부터는 파업이었다.
그러나 경현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비단 노조나 그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파업 때문은 아니다. 경현은 용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믿는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파업을 벌이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현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조에서 구사하는 전투적인 어휘들이다. 투쟁이라니? 누가 누구와 투쟁을 한단 말인가? 사수라는 건 또 뭔가? 죽음으로써 지킨다는 것은 벌써 협상을 배제하는 언사(言辭)가 아닌가? 도대체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투쟁이니 쟁취니 사수니 하는 말을 어떻게 그처럼 함부로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문이 열렸다. 경현은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는 텅 비어 있었다. 경현은 21층의 단추를 누르고 문을 닫았다. 그 여자가 승강기에 오른 것은 12층에서 였다.
“안녕하세요?”
그 여자는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를 했다. 경현은 그 여자를 본 순간, 곧 깨달았다. 그 여자였다. 며칠 전, 학교 후배에게서 기이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 여자.
“네.”
몸에 꼭 끼는 검은색의 스커트에 역시 검은색의 재킷. 허리와 엉덩이가 지나치다 싶게 강조된 자극적인 디자인이었다. 스커트는 짧았다. 그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늘씬한 두 다리는 충분히 관능적이었다. 경현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거기 가 닿을 만큼.
승강기가 다시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승강기 내의 전등이 한 차례 깜빡, 하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승강기 안은 순간적으로 코앞마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해졌다. 경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등불이 있는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으나, 거기는 이미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경현이
“이놈의 불이 왜 이러지?”
하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덜컹, 하고 위아래로 뒤흔들리면서 승강기는 멎어 버렸다.
마치 그 승강기의 마지막 진동처럼, 경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승강기가 멎었다는 것을 그 남자는 잠시 동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경현은 승강기가 정말 멎은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멎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어내기 위하여 한참 동안이나 숨을 죽이고, 꼼짝도 않고 서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승강기는 틀림없이 멎어 있었다. 언제 움직이고 있었더냐 싶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침착해야 한다, 하고 경현은 다짐 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켰다. 희미하게 승강기 안이 밝아졌다. 경현은 계기판 앞으로 갔다. 거기 비상 인터콤이 있다는 것을 그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 단추 위에 ‘정전 시 이 단추를 누르고 통화하십시오’ 하고 씌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정전 시였다. 그러니까 그 인터콤을 사용할 때였다. 경현은 단추를 누르고 조용히 말을 했다. 애써 침착하게, 마치 침실에서 친구에게 전화라도 하는 것처럼 침착하게,
“여보세요.”
대꾸가 없었다. 경현은 다시 불렀다.
“여보세요.”
이번에도 대꾸는 없었다. 인터콤에서는 그것이 작동 중일 때에 으레 들려오기 마련인, 윙, 하는 기계음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먹통이었다.
“안 돼요?”
여자의 음성은 침착하고 조용했다. 그 조용한 음성이 오히려 경현을 놀라게 했다. 그 조용한 음성이 경현이 의식적으로 억눌러 둔 공포감과 불안감을 오히려 자극했다. 목구멍을 비집고, 곧 고함과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경현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안 되는데요.”
“어쩌죠?”
어쩔 것인가? 그것은 경현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곧 고쳐질 테니까.”
그것은 쑥스러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여자는 적어도 말투로 봐서는 조금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이었으므로.
라이터 불이 꺼졌다. 다시 짙고 무거운 어둠이 두 남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라이터 좀 켜둘 수 없어요, 차장님?”
경현은 라이터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경현은 신경질적으로 스위치를 눌러댔다. 몇 번이나, 거듭하여. 그러나 끝내 불꽃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스를 넣은 것이 언제였던가?
“안 돼요. 가스가 다 떨어졌어요.”
3
추락하면…… 추락하게 되면…… 아찔한 현기증이 경현을 엄습했다. 떨어진다, 승강기가 저 밑으로 곤두박질친다, 여기가 17, 8층쯤 될 것이다,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승강기에는 가속이 붙을 것이다, 중력의 작용으로 낙하하는 물체는 매초 9.8미터씩 속도가 증가하니까……고교 시절에 배운 가속도의 공식이 머릿속으로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저 지하층 맨 밑바닥으로, 주차장 맨 밑바닥으로 동댕이쳐질 때쯤에는 그 힘은…… 아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어디 근무하십니까?”
하고 경현이 물은 것은 순전히 머릿속에서 저 옛 동화에 나오는 자크의 콩나무처럼 순간마다, 제멋대로, 그리고 혼란스럽게 가지를 쳐나가는 자신의 방정맞은 상상을 차단시키자는 의도에서였다. 경현은 이미 그 여자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음성이 떨렸다. 경현은 그 떨리는 음성이 못마땅했다. 왜 여자 앞에서, 아래 직원 앞에서 좀 더 의젓하고 침착한 음성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전산실에 근무해요. 민영주예요.”
벌써 지친 것일까. 그 여자의 음성에는 기운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말라 죽은 나뭇잎과도 같이 메마른 음성이었다.
“나는 관리부의 조경현입니다.”
“알고 있어요, 차장님.”
다리가 아팠다. 경현은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 경계심에 찬 영주의 음성이 날아왔다.
“뭐 하세요?”
“앉는 겁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구둣발이 대리석 바닥을 힘차게 내딛는 소리가 다가왔다. 이어서 어, 고장인가, 하는 말소리도 들려왔다. 어둠 속, 승강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쪽이었다. 경현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고장이오! 승강기가 고장이라구요!”
대답이 없었다. 경현은 다시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연락 좀 해줘요!”
그제서야 바깥에서 응답이 왔다.
“고장이라구요?”
남자 음성이었다. 경현은 그 음성의 주인공을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고장이오, 고장! 어서 연락 좀 해요!”
“잠깐만 기다려요.”
그 남자의 음성이 말했다. 이어 구둣발 소리는 멀어져 가버렸다.
“어, 이거 큰일이네. 회장님 오실 시간이 다 됐는데.”
하는 중얼거림을 남기고.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회장님 만 문젠가? 여기 갇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4
김 회장이 올해 초에 새로이 내건 사시(社是)는 ‘창조 인화’다. 작년까지는 ‘인화 단결’ 이었다. 단결이 사라지고 창조가 전면에 부상한 걸 보면 김 회장은 아마도 6공화국 치하에서는 단결보다는 창조적인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총무과 출입구 전면에는 커다란 액자에 휘호가 ㄷ씨의 굵직굵직한 글씨로 ‘創造 人和’라고 쓰인 액자가 붙어 드나드는 직원들을 굽어보고 있다. 그 글씨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액자 또한 거대해서 그것은 장식품이라기보다는, 너 이놈 얼마나 창조하고 얼마나 인화하는지 봐야겠다 하고 호령하면서 그 아래 엎드려 일하는 직원들을 감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승강기가 고장이 났으며, 그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소식을 총무과에서 접한 것은 옆 사무실이 과장을 통해서였다. 그 얘기를 들은 총무과장은 진땀부터 흘리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쳐야지, 어서 고쳐야 해.”
“고칠 사람이 있어야죠.”
박 대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술자들…….”
김 과장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용원들이 파업 중이라는 사실이 그제서야 상기되었던 것이다.
“파업 중이긴 하지만…… 사람이 갇혀 있다는 걸 알면 태도가 달라지겠지.”
전화가 왔다. 김 과장은 전화를 받았다. 총무부장이었다.
“승강기 어떻게 조처했어요?”
“예, 지금 막 조처하려는 참입니다.”
“어서어서 노조 사람들 만나서 설득해봐요. 나한테 곧 연락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김 과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의자를 차고 일어서서 사무실을 나갔다. 노조 사무실은 지하 동력실 옆이다. 김 과장은 승강기로 달려가서 단추를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김 과장은 신경질적으로 단추를 늘러댔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그 남자는 승강기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이 지금 노조 사무실로 내려가려는 것임을 상기해냈으며, 그러니까 그 남자는 지하 2층의 동력실까지 계단을 통하여 걸어 내려가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
동력실 한쪽에 베니어판과 각목으로 막아 3평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책상과 의자, 책꽃이 몇 개를 늘어놓은 것이 노조 사무실이다. 사무실에서 한발만 나서면 붉은 테이프, 파란 테이프를 휘감은 굵직굵직한 파이프들이 바닥부터 천장까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기도 하고, 똑바로 허공을 가로지르기도 하는 그 파이프들 너머로 보일러가 육중한 몸집으로 자리 잡고 있다.
70여 명의 용원들이 비좁은 노조 사무실과 기계실에 들어차 있었다. 성수가 들어와서 김 과장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한주 본관’ 용원 노동조합 위원장 한용철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구호 하나 외칩시다. 16퍼센트 사수하여 생활임금 쟁취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쟁취하자! 쟁취하자! 쟁취하자! 쟁취하자!”
동력실 안팎에 그 사람들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김 과장은 얼굴의 땀을 닦으며 동력실로 들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용원들의 구호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동력실 여기저기, 붉은 스프레이로 쓴 구호들이 김 과장을 흘겨보았다. 이곳은 ‘한주 본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적군에게 점령당한 영토인 것만 같았다. 자신은 포로 교횐을, 어쩌면 휴전협정을 위하여 찾아든 적국의 사절인 것만 같았다.
“600퍼센트 쟁취하여 차별대우 철폐하자!”
“철폐하자! 철폐하자! 철폐하자! 철폐하자!”
노동조합 사무실 문을 밀자 용원들의 함성이 파도처럼 김 과장의 몸에 부딪혀왔다.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제일 끝 쪽에 서 있었고, 김 과장은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머리에 띠를 두른 용원들이 그 비좁은 공간에 발 옮겨 놓을 틈도 없이 빽빽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김 과장은 그 사람들을 헤치고 위원장 앞에까지 나아갈 일이 아득했다. 크러나 어쩌랴? 위원장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할 수는 없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이전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했다. 그곳은 한용철의 영토였고, 한용철의 상대자는 다름 아닌 사장이나 회장이었던 것이다.
김 과장은 손바닥만 한 배에 몸을 싣고 덤벼드는 파도를 억지로 타넘는 기분으¨로 빽빽이 들어찬 용원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돌아보는 용원들에게 끊임없이
“실례합니다.”
를 연발하며. 가까스로 위원장 한용철 앞에 당도한 김 과장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위원장,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합시다.”
보일러공 한용철은 작년까지만 해도 김 과장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혀 이제 출근하십니까, 라거나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허리를 굽히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는다. 한용철이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하쇼.”
하고 말하는 어조는 지극히 퉁명스럽고 사무적이었다. 처음 노조가 생기고 한용철이 위원장이 되었을 때는 김 과장은 그 사람에게 존댓말을 하기가 어색하여 애를 먹었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하게 된 것은 며칠 되지 않는다. 이번 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법이 노동조합위원장에게는 사장에게 만나자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대단한 권리였다. 김 과장 따위로서는 감히 꿈꾸어 본 적도 없는, 아니, 아무리 꿈꾸어봐야 꿈으로 그치고 말 놀라운 권리였다.
“지금 승강기가 고장이 났어요. 동력 이 끊어진 모양이에요. 회장님 오실 시간인데. 더구나 사람이 안에 갇혀 있어요. 어서 고칩시다.”
한용철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노조에서는 지금 파업 중이다. 승강기를 고친다는 것은 파업을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승강기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갇혀 있다는 말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사람이 갇혀 있다……
“몇 명이나요?”
김 과장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한 열댓 명 되는 것 같아요.”
갇힌 사람이 많다고 해야 한용철이 마음을 쉽게 움직일 것 같았던 것이다. 한용철은 잠서 생각해보다가 전공*을 불렀다.
“성수야!”
동력선이 끊어졌다면 전공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수가 다가왔다. 그 남자의 이마에도 ‘600퍼센트 쟁취!’라는 붉은 구호가 쓰인 머리띠가 동여매어져 있는 것을 김 과장은 보았다.
“가서 승강기 동력선 봐주고 와.”
성수가 공구 상자를 찾아 들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우렁찬 고함 소리가 동력실 안을 쩌렁 울렸다.
“안 돼! 우린 지금 파업 중이야. 뭘 고쳐, 고치긴?”
보일러공 권영태였다. 그 남자가 그 우람한 몸을 일으키자 비좁은 노조 사무실이 꽉 차버리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김 과장을 찍어 누를 듯 내려다보았다. 김 과장은 그만 그 눈빛만으로도 주눅이 들었으나 용기를 내어 외쳤다.
“지금 사람이 승강기 안에 갇혀 있단 말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우린 한 달 20만 원 돈으로 먹고사느라고 뼛골이 빠지게 고생했소. 그때 당신들이 우리 사정 들어준 적이나 있소? 이제 당신들 아쉬운 일 생기니까 찾아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나가쇼! 승강기는 못 고쳐요. 동지들, 내 말이 옳소, 틀리요?”
용원들이 손뼉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옳소! 옳소!”
김 과장은 아연하여 영태를 쳐다보았다.
“총무과장 자폭하라!”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김 과장은 깜짝 놀랐다. 자폭하라니? 용원들은 일시에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것 자체가 순식간에 하나의 새로운 구호가 되었다.
“총무과장 자폭하라! 자폭하라! 자폭하라!”
김 과장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라 용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커멓고 기름때가 얼룩진 얼굴로 김 과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쥐고 일어나 김 과장에게 덤벼들 것만 같았다. 당장 자폭하지 않으면 피폭이라도 시키겠다는 듯 그 사람들의 구호는 위협적이었다. 김 과장은 기가 질려 얼른 동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곧 김 회장이 들이닥칠 것이요, 그때까지 승강기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김 회장은 그 자신의 소유물인 이 건물에서, 그 자신의 소유물인 승강기도 이용하지 못한 채로, 꼭대기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까지 그 자신의 소유물인 비상계단을 하나하나 걸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아아, 이를 어쩐단 말인가? 김 과장은 부지런히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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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도 없었다. 어둠, 어둠만이 그 두 남녀를 짓눌렀다. 경현은 조급증이 이제라도 터져 나올 듯 목구멍 바로 밑에서 으르릉거리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아, 꼼짝도 않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롭고 갑갑한 일이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으므로, 그 남자는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 하세요?”
여자는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불이 나간 그 순간부터 여자는 경현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무엇을 하느냐고 묻곤 했다. 눈이 하지 못하는 일을 귀와 입으로라도 대신해야겠다는 듯.
“넥타이 풉니다, 넥타이.”
“처음보다는 사정이 나아진 셈이에요. 적어도 승강기가 고장이 났다는 걸 바깥에서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건 사실이었다. 곧 회장이 오실 시간이 되었다고 아까 그 남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회사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곧 승강기를 복구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머지않아, 적어도 회장이 도착하기 전에는 이 암흑의 상자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곧 경현의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예요. 노조가 파업 중이니까요.”
제기랄, 제기랄. 숨이 턱 막혔다. 한증탕에 갑자기 밀려들어간 것처럼. 어둠 속에서 길다란 손이 뻗어 나와 목덜미를 콱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경현의 인내심의 한계였다. 그 남자의 내부에 짓눌려 있던 조급증이, 그 남자가 지금껏 간신히 억눌러 두었던 분노가 폭발하였다. 경현은 벌떡 일어나 승강기의 문을 걷어차며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문 열어, 문! 사람 죽일 작정이냐, 이놈들아!”
7
사장실은 21층이다. 22평의 넓이에 사장실, 비서실, 응접실, 그리고 바에 주방까지 갖춰져 있다. 창밖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직선으로 뻗어나간 도로와 직사각형의 건물들, 아파트, 국회의사당과 순복음교회 등이 널찍널찍하게 자리 잡은 여의도가 건너다보인다.
물론 ‘創造, 人和’ 액자는 사장실에도 걸려 있다. 그러나 사장실에는 그 밖의 다른 액자들도 많다. 모두가 서양화들이다. 대부분은 자그마한 소품들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200호 가량 되는 대작이다. 일종의 입체 구성이다. 시계, 컴퓨터, 전철, 음료수 자동판매기, 비행기와 자동차 등이 화면 이 구석 저 구석에 왜곡된 형태로 감춰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을 그린 작가는 문명 비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인 모양이다.
사실은 그것들은 모두 다름 아닌 강 사장의 아내인 ㄷ대학 정 교수의 작품이지만.
듣기로는 강 사장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한주 본관’의 사장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정 교수가 막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가이자 대학의 강사였던 정 교수는 강철규가 아직 대리급이던 시절부터 제법 알려진 작가의 그림은 물론이요, 자신의 작품까지를 싸 들고서 회사 간부들의 집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강 사장을 헐뜯는 사람들은 뒤에서 ‘핑퐁외교, 액자외교’라는 말로 강 사장을 곧잘 비아냥거리곤 한다.
신 부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강 사장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그 사람들 이성을 잃고 있군그래. 사람이 안에 갇혀 있는데도 고치질 않겠다니. 파업을 풀라는 것도 아니고, 승강기를 고쳐달라는 것뿐인데.”
“대다수 용원들은 고치는 데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격분자 몇 사람이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요, 그게?”
“대표적인 인물이…… 보일러공 권영탭니다.”
권영태라면 강 사장도 알고 있었다. 기술은 보일러공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설치 못하는 보일러가 없고, 수리 못하는 보일러가 없다던가? 더구나 권영태의 친동생이 남부 지검의 현직 검사라는 사실 때문에 강 사장은 그 남자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강 사장은 일어나 창가로 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초조했지만, 강 사장의 살지고 두터운 얼굴에는 초조감은 별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언제건 별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아니, 어쩌면 그 살진 얼굴 때문에 표정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에는 강 사장은 이다지 비대하지는 않았다. 또한, 얼굴도 오늘날처럼 두텁지 않았다. 비록 풍부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남자의 얼굴에도 남들의 그것만 한 표정은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지위가 높아지고 살이 붙으면서 차츰 강 사장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그 남자의 성격 혹은 처세술 같은 것으로 화하고 말았다.
강 사장은 어떤 일 앞에서도 음성을 높이지 않는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부하 직원이 실수를 해도, 손해를 입혀도 그 남자의 얼굴은 덤덤하기만 할 뿐, 화를 내지를 않는다. 어떠한 잘못을 저지른 부하직원 앞에서도 강 사장의 음성은 나직하고 조용하다. 그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부드럽고 침착한 음성으로 강 사장은 그 부하 직원을 모욕하고 야유한다. 예를 들면, 다른 간부들은 물론 바로 당사자가 책임자인 부서의 부하 직원까지 앉혀놓은 자리에 해외 상담에 실패하고 돌아온 사람을 불러다놓고는 조용조용히
“박 부장, 그런 재주 있는 거 미처 몰랐습니다. 아주 바쁘게 놀고 다녔다면서요? 더구나 놀아도 아주 값비싼 놀이를 했다구요? 기왕이면 그런 놀이는 자기 돈으로 해보지 그래요? 보고서는 봤습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놀러 다닌 건지 상담을 하러 다닌 건지 잘 구별이 안 되더군요. 이 사람 한두 번 접촉해보고는 술 한잔 같이 먹고, 떠나고, 또 다른 사람 한두 번 접촉해보고는 점심 한 번 같이 먹고, 떠나고…… 그게 뜨내기 심심풀이하는 거지 어디 상담입니까?”
하는 식이다.
강 사장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회장님이 몇 시에 도착하신다고 했죠?”
“네 십니다.”
강 사장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1시 50분이었다. 2시간 10분이 남아있었다. 그 전에 사태를 처리해야만 했다. 강 사장은 사무실 안을 오락가락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등허리께에 뒷짐을 진 그 남자의 두 손이 잠시도 쉬지 않고 꼬물거리는 것을 신 부장은 보았다.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강 사장의 살집으로 뒤덮인 얼굴은 오직 무덤덤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그 남자는 소파에 그 거대한 엉덩이를 내려 놓았다.
“승강기 회사에 연락해서 아프터서비스를 신청해요. 지금 즉시 와달라고.”
“알겠습니다.”
신 부장은 지금껏 왜 그 생각을 못 했던가, 한스러웠다. 강 사장이 다시 물었다.
“승강기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고 했지요?”
“네.”
“누구요?”
“누군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비상 통화선도 고장이 나서요.”
강 사장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갇힌 직원이 누군지도 아직 모른단 말이오? 각 사무실로 연락을 해요. 자리 비운 직원들의 이름과 행선지를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그러면 저절로 누가 갇혀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노조하고 얘기해보고. 신 부장이 직접 나서요. 알았지요?”
“예. 하지만, 그 사람들이 자꾸만 사장님을 뵙자고 합니다. 전결권*이 있는 분과 만나야겠다는 겁니다.”
“그런 일에 꼭 나까지 나서야 되겠습니까? 신 부장 선에서 처리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 부장은 사장실을 나섰다. 다시 계단을 수도 없이 걸어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8
정기석은 몸뚱이를 내던지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노조 이 사람들 너무하는 거 아냐? 에휴, 1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왔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네 이거.”
“승강기 아직 안 고쳤어? 큰일이네. 회장님 오실 때가 돼가는데.”
“외국에 나가서 계약 성사시키고 열흘 만에 돌아오는 회장이 기분 참 좋겠다, 회사 꼴이 이 모양인 걸 보면.”
그때 사내낵 방송망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하여 여자 아나운서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각 실 정(正)·부(副) 책임자 여러분들께 알려드립니다. 각 실의 정·부 책임자 여러분들께 알려드립니다. 현재 공석 중인 인원을 조사하셔서 행선지가 확인되지 않는 인원을 지금 즉시 전화로 사장님 비서실에 보고해주시고, 그로부터 30분 후에는 서면으로 재차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각 실 정·부 책임자 여러분들께서는…….”
정기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갑자기 점호는 웬 점호야? 계단 오르내리기 싫어서 다방 같은 데나 가 앉아 있다가 승강기 고쳐진 다음에 돌아올까, 했었는데, 그만두길 잘했군.”
“승강기에 사람이 갇혔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른다는 거야.”
“남자 여자 한 쌍씩이 갇혀 있는 거 아냐? 승강기 한 대마다 한 쌍씩.”
“그렇게 한번 갇혀 봤음 좋겠다.”
“좋아. 당신 여자랑 승강기 타고 있을 때 내가 한번 전기를 끊어주지.”
직원들은 흐으흐으 웃어댔다. 미스 안이 인원 구성표를 가지고 다니며 인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관리부에서는 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조 차장과 김 차장, 그리고 심 과장이었다.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보고해요?”
하고 미스 안이 묻자, 정기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큰일 벌어지는 걸 보려고 그대로 보골 해?”
“왜요?”
“아 그 양반들 어디 가서 사우나를 하고 있는지 안마를 받고 있는지 알 게 뭐야?”
그건 사실 옳은 말이기도 했다. 조 차장으로 말하면 이따금 근무시간 중에 사우나탕에 다녀오는 버릇이 있었고, 김 차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안마 시술소에 드나들었다. 또한, 심 과장은 심심하면 눈치를 봐가며 이발소에 가서 두어 시간씩 낮잠을 즐겼다.
“맞아, 맞아. 설마 그 양반들이 승강기에 갇혔겠어?”
“공석 중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보고해요. 그게 제일 나아.”
“알았어요.”
미스 안은 부장실로 향했다. 손 부장 앞에 서자 그 여자는 또렷하고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보고했다.
“결원은 없습니다.”
9
강 사장은 각 사무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건물 전체를 통틀어 행선지가 확인되지 않은 결원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강 사장이 받은 보고의 내용이었다.
강 사장은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보고서였다. 서로서로 봐주고, 적당히 눈감아 주는 식으로 작성된 보고서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각 실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장이 직원들을 통제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또, 강 사장이 무리를 무릅쓰고 확인에 나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짓이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일단 거짓 보고서를 올린 이상, 직원들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행선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공석 중인 직원들의 행선지를 조작해낼 것이 뻔했으므로. 그것을 다시 확인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한심한 일이 될 것인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한심한 통솔자로 보일 것인가.
강 사장은 자신이 헛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의미한 지시, 하나 마나 한 지시, 아니, 하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지시였던 것이다. 만일 그 자신이 저 말단 부서의 직원이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보고서를 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사장은 그 보고서들을 내려다보는 순간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어쩌면 이처럼 약속이나 한 듯이 무단 공석 중인 직원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보고를 태연히 올릴 수 있는 것일까? 수십 개의 부서가, 수십 개의 사무실이 단 하나도 빠짐이 없이 이런 일치된 보고서를 올렸다는 것이 뭔가 징그럽고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한주 본관’의 사장 강철규는 다시 한 번 눈앞에 놓인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휘하의 모든 직원들이 자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 건물 전체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분고분 엎드려 있다고 믿어온 이 건물 전체가 돌연 반기를 들어 뻣뻣이 무릎을 세우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강철규는 창가로 걸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의 풍경은 늘 직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차가운 구도다. 네모반듯한 건물들, 직선으로 뻗은 도로, 각이 진 스카이라인. 한강마저도 개발이 끝난 뒤에는 직선이 되어버렸다. 그 직선의 강을 직선의 교량이 가차 없이 가로지르며 분할한다. 회색, 콘크리트 색의 도시. 국회의사당 언저리 일부를 제외하고는 초록빛은 거의 없다. 회색, 오직 회색뿐이다. 더구나 공기마저 탁해서 사장실의 창밖은 언제나 안개가 낀 듯이 희뿌옇다.
언젠가 몇몇 간부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런 농담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5공화국 시절에는 한강도 직선으로 흘러야만 했지요.”
그때가 좋았던 것 일까? 보일러나 만지고 전선줄이나 잇던 자들이 승강기를 고치라는 회사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5공화국의 직선을 따라 달리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사태였다. 더구나 한주그룹은 다른 많은 그룹사들과 마찬가지로, 5공화국 시절의 그 직선을 통하여 사세(社勢)*를 대폭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용원들은 파업을 벌이고 있고,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거짓 보고를 올리고 있다…… 소름이 끼쳤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음흉하게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섬뜩한 느낌이 강 사장을 사로잡았다. 건물 전체가 강철규의 등 뒤에서 은밀한 적의를 품고 그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함정을 파놓고 그 남자가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강 사장은 자신이 이 건물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평소의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이건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그 남자는 다짐했다.
강철규가 건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건물 전체가 그 남자를 감금하고 있었다. 강 사장은 포위되어 있었다. 용원들이, 직원들이, 과장과 부장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의 손에 맡겨진 서로 다른 업무들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서로 다른 밀도로, 서로 다른 적의와 음흉함과 간교함으로 그 남자를 포위하고 있었다.
10
지쳐서 더 이상 벽을 걷어찰 수도 없었다. 경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경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헉, 자신의 숨소리가 승강기의 어둠 속을 흔들고 있었다. 어둠 저편의 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경현이 계속해서 벽을 걷어차고 고함을 지르는 동안 여자가 아무 기척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거기 여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이 감금 상태와 어둠을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앉아 있는 것일까, 서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을까, 뜨고 있을까. 경현은 어둠 속에 대고 물었다.
“시력이 얼맙니까?”
“1.2예요. 양쪽 다.”
어둠 속에서 대답이 날아왔다. 멀리, 아주 멀리에서 들려오듯 여자의 음성은 아득했다.
“1.2 아니라 120이라 해도 여기선 아무 소용이 없군요.”
경현은 무슨 말이든 여자가 계속해주기를 바랐다. 어떤 화제로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어둠 속에 혼자 내던져져 있다는 느낌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이 지금 어둠이 아니라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얘기를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얘기는 끊겼다. 어둠 속을 통하여 오간 길지 않은 몇 마디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졌던 가느다란 통로가 폐쇄되었다. 다시 어둠이 벽처럼 경현의 앞뒤를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경현은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켜보았으나 라이터는 불똥만 튈 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경현은 라이터를 손바닥 위에 몇 번이나 힘껏 탁탁 내리쳤다가 다시 켜보았다. 불꽃이 일었다. 경현은 재빨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 아래 저편 구석에서 여자의 모습이 환상처럼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라이터 불이 곧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경현이 잠깐 본 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기보다는 어둠과 빛이 잠깐 맞부딪친 흔적,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 남자는 연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가 뱉어내며 물었다.
“몇 살이지요? 난 서른아홉인 데.”
“스물여섯이에요.”
또 얘기는 끊겼다. 경현은 갑갑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 갑갑증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 남자는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그 이야기를 물어볼까? 사실 경현은 아까부터 그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후배에게서 들은 그 믿어지지 않는 얘기가 사실인지를 여자에게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자가 얼마나 당황하고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자는 얼마나 화가 나고 모욕당한 기분일 것인가.
“이런 얘기 알아요?”
누구에게서 들은 얘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전 세계로 식민지를 확장시켜나가던 초기 제국주의 무렵이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이곳저곳을 야금야금 식민지로 파먹어 들어갔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의 벌거숭이 모습이나 이교도적인 풍습은 너무도 끔찍스럽고 야만적이었다. 한 유럽인이 꾀를 냈다. 그 사람은 젊고 영리하고 건강한 원주민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제안했다.
“빈방에서 24시간 동안만 지내라. 그러면 많은 돈을 주겠다. 물론 방안에는 편안한 침대도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하다. 원한다면 술도 주마. 조건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그 방 안에는 심심풀이할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린 화첩뿐이라는 것. 방 안에는 먹을 것은 물론 얼마든지 있고, 편안한 침대와 담배도 있다.”
유럽인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야만인을 조금이나마 의복과 기독교에 적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유럽인이 성경이 아니라 화첩을 준비한 것은 아프리카 청년이 문맹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그 유럽인이 보기에는 그랬다. 청년은 문명어, 그러니까 유럽 여러 나라의 문자에 대한 해독 능력을 전혀 구비하고 있지 못했으니까.
원주민 청년은 좋다고 말했다. 청년은 빈방으로 들어가고 유럽인은 방문에 자물쇠를 걸었다. 24시간 후에 유럽 인이 와서 청년을 꺼내주기로 했다.
24시간 후에 유럽인이 그 방에 갔을 때에 원주민 청년은 방바닥에 쓰러져 숨져 있었다.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의사는 질식사라고 진단했다. 질식이라니? 넥타이는 원주민 청년의 목을 조이고 있지도 않았고, 거기 대롱거리고 있었을 뿐인데.
사람이 갑갑증으로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죠.”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든지 대꾸를 하고, 그래서 얘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면 경현은 불쑥, 그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페에 나간다는 소문이 있던 데, 사실이오?”
“네.”
하는 대답이,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비록 조금 지친 듯하기는 했지만, 여자의 어조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카페에는 어떻게 해서 나가게 됐어요?”
“돈이 필요해서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봉급이 얼마지요?”
여자에게서는 경현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이 나왔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여자가 혼자 살아가기에 크게 부족할 것 같지도 않은데.”
“전 넉넉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싶어요.”
경현은 아까 본 여자의 옷차림을 생각했다. 맵시 있고 세련된 차림이었다. 그 차림만으로도 회사에서 받는 여자의 봉급은 오히려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옷이 뭐란 말인가? 옷을 위하여 카페에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해가 안 되는군.”
“간단해요. 전 차도 갖고 싶고, 집도 갖고 싶어요. 작지만 아담한 컴퓨터 가게를 하나 마련하고 싶어요. 회사에선 나이 든 여직원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전 돈이 필요해요. 필요하면 벌어야죠. 차장님도 필요하면 버시잖아요?”
경현은 이 철딱서니 없는 아이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런 짓은 천한 짓이다, 아무리 돈을 벌고 싶다 한들, 아무리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하지만, 난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술집에 나가지는 않아.”
“전 나가요.”
하는 대답이 곧장 경현을 향하여 날아왔다. 당당한 어조였다. 마치 동네에서 저희들끼리 모여앉아 서로 제가 잘났다고 말싸움을 벌일 때의 어린아이들의 말투 같은. 경현은 돌팔매질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 남자는 당황하여 할 말을 잊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갔다. 경현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 피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불씨를 꺼뜨리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차장님은 이렇게 갇히시는 게 처음인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릴까? 경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대답을 유보하는 것은 경현이 대학 시절부터 터득한 대화법이었다. 그런 대화법은 크게 현명한 것은 못 될지언정 적어도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그 남자의 체험으로 입증되었다.
“전 아니에요. 어릴 때 전기세를 못 내서 전기가 끊어지고, 초 살 돈도 없어서 초도 못 켜고, 그래서 어둠 속에서 일찌감치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자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고3 때도 그랬어요. 전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갈 수 없었죠. 전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갇혀 있다는 걸. 세상은 참 넓지만, 저는 그 세상과는 격리된 다른 세상, 일종의 감방 같은 곳에 갇혀서 살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가난은 경현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 가난하던 시절에 대해서 얘기해보라고 한다면 경현은 지금 여자가 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여전히 여자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 갇혀서 사는 데 익숙해요. 감옥 같은 데에 갇힌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소일거리를 만든대요. 머리카락으로 인형 같은 걸 만든다거나, 잇솔* 토막으로 아주 정교하게 여자의 몸을 조각한다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죠? 하지만 갇힌 사람들에게는 그건 아주 당연한 생활 방법이에요. 어쩌면 유일한 생활 방법인지도 모르구요. 제가 카페에 나가 컴퓨터 가게를 마련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전 머리카락으로 인형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 완성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다른 할 일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경현은 공부를 하는 것만이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경현의 공부는 그 시절의 유일한 생활 방법이었던 것일까?
“다른 할 일이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얘긴데요? 지금 미스 민은 오퍼레이터*로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걸로는 인형을 만들 수 없었어요. 그건·…… 뭐랄까요, 닭장 속의 닭들에게 주인이 던져 주는 모이 같은 것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미스 민 애인은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남편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요? 부담이 되는 과거는 될 수 있는 한 가지지 않는 게 좋아요. 나이 들면 알게 되겠지만, 사람의 과거란 필요에 따라 벗어던짙 수 있는 옷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사람은 시간을 통하여 형성되어가는 거니까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사람이란 그 과거의 집적*이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총체이다.’”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아무런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자의 그 침묵마저도 당당한 것 같았다. 경현이 막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날아왔다.
“내일의 암탉보다 오늘의 달걀.”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 여자가 불쑥 내민 구호와도 같았다. 승강기 옆에 용원 노조에서 써 붙인 “16퍼센트 인상 사수!” “쟁취! 보너스 600퍼센트!” “차별 철폐!” 따위와 같은.
경현은 한동안 그 여자가 내민 구호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나무랄 데 없는, 현실적이고 현명하기까지 한 구호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암탉과 달걀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자 어이가 없어졌다.
“그것 참.”
하고 경현은 한탄했다.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한두 가진가요?”
경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회사가 그걸 알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든지 카페를 그만두든지 하라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할지도 몰라요. 그럼 어쩌겠어요, 미스 민?”
이번에는 대답은 즉각적이고 명쾌했다.
“카페에서 생기는 돈이 더 많아요.”
그때 승강기가 덜컹, 흔들렸다. 윽, 하고 경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경현은 어둠 속에서 승강기가 움직이는지,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감지하기 위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긴장감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승강기는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워요.”
조금도 무섭지 않은 음성이었다. 경현에게는 여자가 무서워요, 하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 무서워요, 하고 읽었던 것만 같이 여겨졌다. 여자는 여전히 읽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그 얘기도 무서웠어요. 아프리카 원주민 얘기 같은 거요. 그런 얘긴 하지 말아요, 우리.”
우리. ‘우리’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렇다. 승강기 안에는 그 두 사람뿐이었다.
11
소회의실은 3층이다. 벽에는 역시 ‘創造 人和’라는 액자와 김 회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그곳은 적어도 용원들이 차지한 영토는 아니다. 김 회장의 영토다.
그러나 그것은 신 부장의 생각일 뿐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에 신 부장은 벽면에 붙은 커다란 구호를 발견했다. 커다란 모조지에 붉은 스프레이로 뿌려서 꼬불꼬불, 서투르게 쓰인 구호는 맞은편의 김 회장 얼굴을 도발적으로 흘겨보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상여금 600퍼센트 쟁취!”
징그러운 느낌이었다. 그 구호 글씨가 서투르다는 것 때문에 징그러운 느낌은 더욱 심했다. 그러나 김 회장의 사진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근엄한 얼굴로 그 징그러운 구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붉은 구호의 표정은 생생했다. 김 회장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근엄하기만 했다. 마치 지금껏 노조의 어떠한 움직임에도 김 회장이 전혀 미동하지 않았듯이.
김 회장의 그 근엄한 얼굴은 하나의 가면과도 같았다. 가면이 하나의 양식, 스타일이듯, 김 회장의 그 근엄한 얼굴 역시 하나의 양식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겨 쓰인 서투른 구호 글씨 역시 하나의 양식이었다. 그러니까 그 구호 글씨를 징그럽다고 하는 것은 모르지만, 서투르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하나의 구호 글씨일 따름이었다. 그것을 서투르다고 하는 것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고 서투르다고 탓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제 시작될 회의 혹은 싸움은 그 두 양식 사이의 회의 혹은 싸움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나와 앉은 양쪽 진영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두 양식의 대표자 혹은 하수인들이었다.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승강기를 수리하는 문제를 논의합시다.”
“그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문제요. 임금협상이 끝나면 우선적으로 승강기부터 수리할 테니까, 걱정마십쇼.”
“협상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때까지 사람을 저렇게 가둬둬서야 되겠습니까? 우선 사람은 구해놓고 봐야지요.”
“그래요. 지금이라도 가서 승강기부터 손을 보도록 합시다. 우린 협상을 계속하고 말입니다.”
“사람을 구하고 싶거든 협상에 성의를 가지고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장님은 왜 안 내려오시는 겁니까? 우린 집행권이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습니다.”
“사장님께서 전권을 저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위임장있습니까?”
신 부장에게는 위임장 같은 것은 없다. 강 사장이 신 부장에게 전권을 위임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우선은 그 길만이 회장이 도착하기 전에 승강기를 수리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위원장, 지금 사람이 승강기 안에 몇 시간째 갇혀 있단 말입니다. 우선 사람을 구하자는 겁니다.”
“부장님.”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영태가 일어섰다. 그 남자는 바윗덩이만한 두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 큰 목청으로 떠들어댔다.
“우린 지금 파업 중입니다. 회사에서 협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된 파업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파업을 중단하면 본격적인 협상에 응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파업을 중단하라는 게 아니라, 우선 승강기에 갇힌 사람을 구하자는 겁니다.”
“내가 한마디 물어봅시다. 전에 우리 어머님 이……”
그것은 영태가 지난번 노사 협상 때에도 들고 나왔던 얘기였다. 김 과장이 그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긴 권영태 씨 자당*님 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영태는 들은 체도 않고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김 과장의 얘기를 깔아뭉개며 얘기를 계속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내가 회사에다 가불 신청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회사에서 뭐라고 했지요? 가불이 안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다음엔 융자 신청을 했지요. 그것도 안 된다고 했지요? 용원이라는 이유 때문에요. 그때 우리 어머님이 어떤 형편이었는지 알아요? 돌아가시느냐 안 돌아가시느냐 하는 판이었단 말요. 승강기에 갇힌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죽네 사네 하는 판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외면만 하던 회사에서 왜 우리한텐 사람이 죽어가네, 어쩌네 하면서 일방적으로 지시에 따르라는 거요? 어디, 그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영태의 왼손에는 손가락이 둘뿐이다. 소년 시절에 보일러 일을 배우기 위하여 조수로 따라다니다가 파이프 절단기에 손가락 세 개를 잃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불구가 된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금도 영태는 바로 그 손을 들어 김 과장에게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건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하고 신 부장이 말을 꺼냈다. 그러나 곧 다시 영태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 유감스럽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오, 부장님? 내가 무식해서 그런 유식한 말은 잘 알아듣질 못하니까, 알아듣게 좀 얘기해주시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면 융자를 해주겠다는 거요? 말하자면, 사무직원과의 차별을 없애겠다는 거요?”
“그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서 논의할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노조에서는 어떤 협상안을 가지고 나왔습니까?”
“본격적인 협상이 바로 그 얘기요, 과장님. 차별 철폐도 우리 요구 가운데 하나니까요. 어떻게 할 겁니까? 차별 철폐할 겁니까?”
김 과장은 영태의 말을 묵살해버리고 한용철 위원장에게 물었다.
“위원장이 대답해주십시오. 어떤 협상안을 가지고 나왔습니까?”
“회사 측의 협상안을 먼저 제시해주십시오.”
김 과장은 입을 다물고 신 부장을 쳐다보았다. 신 부장이 입을 열었다.
“임금 인상률은 9퍼센트 선에서 고려해보겠습니다. 상여금은 우선 600퍼센트 정도를 내년부터 지급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해보겠습니다.”
지난번 안과 다른 점은 전혀 없었다. 고려해보겠다는 것은 회사 쪽의 예정 혹은 속임수일 뿐이었다. 회사 쪽의 고려를 믿고 기다리기만 했다가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용원들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차별 철폐에 관한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인사규정도 개정되어야 하고, 계열 내 다른 회사들과의 형평 관계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노조와 회사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고 토의한 다음에야 비로소 결정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노조와 더불어…….”
영태가 그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는 거 아뇨? 그렇지요?”
“이거 보세요, 위원장. 사람부터 꺼내놓고 협상을 계속하자구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몇 시간 고생이지만, 우린 평생 고생이오, 김 과장.”
영태가 고함지르듯 말했다. 김 과장은 그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을 영 태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맞받았다.
“위원장, 제발 우리 승강기부터 고치고 봅시다. 회장님이 오실 시간이 돼가고 있단 말입니다. 승강기가 우연히 고장이 났기에 망정이지……”
그때 신 부장 옆에 않아 있던 김 과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승강기가 고장이 난 게 우연인지 아니었는지 알 게 뭡니까?”
“뭐요? 지금 뭐라고 했소, 김 과장?”
하고 벌떡 일어선 것은 영태였다. 한용철이 그 사람을 붙잡아 앉혔다. 신 부장은 김 과장의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실 승강기하고 협상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 아뇨?
회장님 심기 건드려서 협상에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시 영태가 외쳤다.
“이제 협박하는 거요, 협박? 맘대로 해보쇼, 맘대로 해봐.”
한용철은 사장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장 따위와는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고려해보겠다, 노력하겠다 따위가 들을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왜냐하면, 신 부장은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절충안을 내놓겠습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승강기 안에 가둬두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사장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사장님이 우리와 만나주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승강기 수리에 협조하겠습니다.”
신 부장은 생각해보았다. 회장이 도착하기까지 승강기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가장 크게 얼굴이 깎일 사람은 다룸 아닌 강 사장이다. 그러니까, 만나주기만 하면 승강기를 고치겠다는 노조의 요구를 강 사장은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승강기를 수리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일이 오직 노조 간부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뿐이라면 그것마저 거부할 이유란 없지 않은가.
“좋습니다. 내가 사장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12
신 부장은 얘기를 끝냈다. 강 사장은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 사람들 얘기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신 부장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그 남자가 책임질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인가? 노조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도 추궁당하지 않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것인가? 신 부장은 여차하는 경우 자신에게 떨어질 강 사장의 모욕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회피하고 싶었다. 그런 모욕보다는 차라리 화롯불에 얼굴을 쑤셔 넣는 것이 나았다.
“노조에서는 전부터 사장님 뵙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약속을 지킬 것 같다는 뜻입니까?”
네, 하는 대답이 나오려는 것을 신 부장은 꿀꺽 삼켜버렸다. 그것이 무모한 대답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강 사장은 소파로 와서 앉았다. 석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강 사장은 석간신문을 집어 함부로 뒤적이다가 탁자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한용철의 얘기는 사장님이 협상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승강기는 무조건 고치겠다는 겁니다.”
강 사장은 벌떡 일어서서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회장은 오늘, 잠시 후면 돌아온다. 그러니까 만일 강 사장이 노조 대의원들을 만난다면, 잠시 후에 그 자신이 회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승강기가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과 노조 대의원들을 만났다는 것, 어느 쪽의 보고가 더 강 사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것인가? 어느 쪽이 강 사장의 경영자로서의 평가에 더 큰 오점을 남길 것인가? 회장은 말했다. 사장이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직원들을 장악하는 일이다. 경영의 첫걸음은 자원 관리, 그 가운데에서도 인적 자원의 관리다. 인적 자원의 관리에 실패하는 자는 경영자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강 사장은 신 부장을 등지고 선 채로 입을 열었다.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신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 사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 저의는 뻔합니다. 날 협상에 끌어들임으로써 최소한 노조를 공식화시키자는 거지요. 그것은 회장님의 의사에 반하는 일입니다. 회장님은 노조를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 부장은 듣고만 있었다. 지금 판단을 내릴 사람은 그 남자가 아니라, 강 사장이었다. 신 부장은 지시를 받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강 사장은 돌아서서 신 부장을 내려다보았다.
“설득해보라니까 오히려 설득당해서 돌아왔군요, 신 부장. 다시 내려가서 설득해봐요. 이젠 일도 없이 21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짓 좀 고만하고.”
13
경현이 그 얘기를 들은 것은 겨우 며칠 전의 일이었다. 퇴근길에 사옥 로비에서 스쳐 지나간 여자를 두고 학교 후배이기도 한 최 과장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저 아이 전산실 오퍼레이터거든요. 그런데 밤에는 카페에 나가고 있더군요.”
“카페라니?”
“그렇다니까요. 제 눈으로 봤어요. 논현동에 있는 ‘인형’이라는 카페에서요. 하지만 회사 높은 사람들한테 이런 말씀은 마십시오, 선배님. 괜히 불쌍한 애 회사에서 떨려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경현에게는 그 얘기가 충격적 이었다. 낮에는 오퍼레이터요, 밤에는 카페의 호스티스라. 그것은 경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기묘한 이중생활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차장님 카페 같은데 자주 가세요?”
“고객 대접할 일이 가끔 있으니까요.”
그 고객이란 대개의 경우 은행의 간부들이거나 전주(錢主)*들이었다. 경현은 그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기생 노릇을,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바람둥이 노릇을, 때로는 뚜쟁이 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집에서는 모른다. 그 남자의 아내도, 보석 같은 아들딸도.
“꼭 그런 때만 가시나요? 친구 분들하고 어울려서 기분 내러 가시는 적은 없어요?”
“있지요, 물론.”
“결혼하셨죠?”
“물론이죠.”
“전 결혼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가게에 얼마 동안 다니다 보니까…… 어떤 남자도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경현은 또다시 돌팔매질을 당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카페나 룸살롱에서 여자아이들에게 지금까지 한 짓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현은 얼굴을 붉혔다.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어요, 미스 민, 한국 남자들처럼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잖아요? 삼사십 대 남성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통계도 있고. 업무량은 많지, 높은 사람들 눈치 봐야지, 직원들 눈치, 요샌 정말 직원들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까, 그 엄청난 스트레스…… 풀 데가 어디 있어요, 한국 남자가?”
경현은 얘기를 하면서도 참으로 구차스럽고 터무니없는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언제 한번 ‘인형’으로 놀러 가리다” 하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곳에 가서 한바탕 노는 것으로 푸는 거죠. 남자들이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밖에서 어떤 꼴들을 당하는지 여자들은 정말 몰라요. 그런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풀지 못했다가는…… 죽지. 끝이지, 뭐.”
얼마 전에 홍보기획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획실장은 박 차장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 차장, 대낮부터 왜 이래?”
하면서 기획실장이 어깨를 잡아 흔들자, 박 차장은 의자 밑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미 숨이 끊겨 있었던 것이다. 뇌일혈*이었다.
“왜 스트레스를 꼭 그런 방법으로만 풀어야 할까요?”
글쎄, 왜 그럴까? 왜 술집에서 개가 되어, 짐승이 되어, 인사불성이 되어 한바탕 놀고 나면 몸이 풀리는 것일까? 왜 그런 식으로밖에는 놀 수가 없는 것일까? 골프나 그 밖의 운동으로는 몸을 풀 수가 없는 것일까? 골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현은 안다. 골프 치는 사람들도 술집에서는 역시 개가 되고 마는 것을 경현이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사장님께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올라가서 호통이나 안 들을까, 걱정하던 참이지요.”
경현은 아까 자신이 여자에게 한 말이 부끄러워졌다. 뭐가 잘났다고 그따위 충고를 한 것일까? 당신 애인이나 남편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둥 부담이 되는 과거는 갖지 말라는 둥. 돌이켜보니, 자신에게는 그런 충고를 할 자격이 없었다. 그 남자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 여자의 고객이 될 자격뿐이었다.
“남자들만 스트레스 쌓이는 거 아니에요. 여자들도 스트레스 쌓여요.”
여자가 말했다. 경현은 받았다.
“그래서, 요즘 여자들을 위한 호스트 바가 많이 생기는 모양이지?”
경현은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웃자고 한 말이었으므로. 그러나 저편 어둠 속에서는 여자의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14
먼저 그 얘기를 꺼낸 것은 전공 성수였다. 그 남자는 머리띠를 풀고 땀을 닦아내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승강기 고쳐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도 입을 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영태와 한용철의 얼굴을 흘끔거릴 뿐이었다.
“우선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지요. 이 노릇도 다 사람이 살자고 하는 노릇인 데.”
성수가 다시 중얼거렸다. 청소원 장 씨가 받았다.
“그럽시다. 승강기는 우선 고치고, 파업은 계속하면 되는 거지, 뭐.”
“이 양반들이 무슨 소리야?”
영태가 불만에 차서 투덜거렸으나, 여기저기에서 조합원들이 그럽시다, 고쳐춥시다 하고 거들고 나섰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합원 여러분?”
한용철이 묻자, 영태가 또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 남자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떠들어 댔다.
“왜들 이렇게 마음들이 약해져요? 저놈들 지금 하는 소리 못 들었소? 상여금 100퍼센트 올리는 문제를 고려해보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내놓은 것이 없단 말이오. 그런데도 다시 손에 연장 잡자는 거요? 그럴 거면 뭐 하러 파업은 시작했소? 승강기 고장 나면 승강기 고쳐주고, 쓰레기통 넘치면 쓰레기통 비워주고, 화장실 냄새나면 화장실 청소해주고, 그게 파업이오? 나 참 별 희한한 사람들 다 보겠네.”
영태는 얘기하면서 점점 더 흥분하여 얘기를 마칠 때쯤에는 싸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그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합원들은 영태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 남자가 하는 말도 옳은 것 같기는 했다. 파업이란 일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장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합원들은 뭔가 찜찜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만 같은 예감이 그 사람들의 뒷덜미를 묵직하게 잡아당겼다.
“사장님이 협상에 참석하는지 어떤지를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한용철이 말했다. 노동자들은 다시 동력실로, 그 앞 계단으로 흩어졌다.
15
동력실 앞에 김 과장과 직원들 네 명, 그리고 웬 낯선 남자들 네 명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직후, 3시 30분경이었다. 조합원들은 그 낯선 남자들이 들고 있는 공구함을 보고는 즉각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온 것 인지를 알아차렸다.
“이 사람들은 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김 과장이 말했으나, 낯선 사람들 중 키가 작은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승강기 정비공이오.”
그리고 이어 비쩍 마른 다른 한 남자가 말했다.
“우린 동지들이 파업 중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 사람은 ‘동지’라고 말했다. 동지. 그 말에 김 과장이 화들짝 놀라 정비공들을 돌아보았다. 조합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다시 덧붙였다.
“파업 중인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조합원들이 동지 만세, 하고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김 과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동지라니. 온 세상에 저것들의 동지뿐이란 말인가? 그러나 김 과장에게는 동지가 없었다. 오직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부하 직원과 위에서 내리누르는 상사, 그리고 어깨와 허리와 다리에 매달린 마누라와 자식들이 있을 뿐이었다. 김 과장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조합원들의 박수와 환호가 그치자 아까 승강기 정비공이라고 말했던 키가 작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합원이 아닙니다.”
조합원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키 작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합원이 아니라니? 왜 아니란 말인가? 어째서 조합에 들지 않는 것인가? 이처럼 좋은 것을, 이처럼 대번에 용원들을 관리자들과 대등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조합에 왜 들지 않는 것인가? 비쩍 마른 사람이 그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분은 우리 수리조의 조장입니다. 비조합원이지요.”
김 과장은 동지를 한 사람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온 세상에 오직 그 사람만이 자신의 동지인 듯 여겨졌다.
영태가 벌떡 일어나 동력실 출입문 앞으로 갔다. 그 남자는 김 과장 일행을 막아선 동료 조합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자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돌아가요! 여긴 못 들어가요. 파업 중이란 말요, 파업.”
“권 형, 사람이 갇혀 있어요, 사람이!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단 말이에요.”
영태는 그 굵은 두 팔로 김 과장 일행을 밀어댔다.
“소용없어요.”
“4시에, 4시에 회장님이 오십니다. 그때까지 못 고쳐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발 이러지 좀 마쇼. 그런다고 회사가 양보할 걸 양보 안 하고, 양보 안 할 걸 하고 그러겠어요? 권 형이나 나나 다 남의 돈에 목매달고 사는 사람들 아뇨? 우리끼리 사정 좀 봐달라구요.”
영태는 화를 버럭 내며 주먹으로 동력실의 철문을 내리쳤다.
“뭐야? 우리끼리? 당신들이 언제 우리하고 우리끼리야? 저리 꺼져! 안 가면 이놈의 문짝을 확 뜯어서 던져버릴 거여!”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작업 할 수 없습니다.”
비쩍 마른 남자가 말하고 계단을 몇 개 올라갔다. 그 남자 뒤를 다른 두 남자가 따랐다. 조합원들이 박수를 치며 동지들 만세, 하고 외쳤다. 그러나 키가 작은 한 남자는 여전히 그 작은 눈을 번득거리며 김 과장 옆에 붙어 서 있었다.
“그러지 말고 좀 들어갑시다.”
하면서 김 과장은 영태를 밀고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 뒤를 직원들과 키 작은 정비공이 따랐다. 그러나 영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김 과장을 떠다밀었다. 김 과장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계단 손잡이에 부딪혔다. 퍽,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 과장은 콘크리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김 과장이 데리고 온 직원들이 황급히 그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영태도 놀라 김 과장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김 과장은 곧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뿌려져 있던 물로 김 과장의 바지와 와이셔츠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직원들은 그제서야
“어어, 사람 친다, 이거!”
하면서 우르르, 영태 앞으로 나섰다. 승강기 수리조 조장은 몇 걸음 물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 과장이 영태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이 더러운 것들이……”
“뭐? 더러워? 더럽다구? 저게 정말…….”
영태는 대뜸 김 과장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김 과장은 오냐 쳐봐라, 쳐봐 하고 대들었다. 용원과 직원들이 덤벼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더러워? 더러워?”
영태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씩씩거렸다. 김 과장은 와이셔츠의 물을 탁탁 털어내며 말했다.
“무지스런 것 같으니. 말이 통해야 말이지, 말이.”
“무지스럽다고?”
그 말을 들은 영태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 과장은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재빨리 직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승강기 수리조 조장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계단 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쩍 마른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잘 싸우십시오. 저흰 갑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정비공 조합원들은 사라졌다.
“더러워? 무지스러워? 어이구, 내 저놈의 자식을 언제 길바닥에서 만나면 그저 숨통을 밟아버려야지.”
영태는 동력실의 문을 거칠게 닫고는 빗장을 질렀다.
“우리끼리? 좋아하네. 너희들하고 우리하고 언제부터 우리끼리였냐?”
숨을 몰아쉬며 돌아선 영태는 성수가 공구함을 들고 배전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발견하자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어디 가는 거야, 너?”
“승강기 동력선 보러요.”
“안 돼, 임마! 너 미쳤어? 만일 니가 저렇게 갇혀 있다면 저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할 줄 아냐? 정신 나간 소리 말고 가서 앉아 있어.”
영태가 고함을 질렀으나, 성수는 그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승강기 떨어지면 사람 죽어요. 당장 고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동력선 때문인지 아닌지는 봐야겠어요.”
“동력선 때문이면?”
“난 고쳤으면 좋겠어요.”
“이런 바보 같은 자식이!”
영태는 힘껏 성수를 떠다밀었다. 성수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공구함 뚜껑이 열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구들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쏟아졌다. 성수는 벌떡 일어나 영태를 마주하고 섰다.
16
어둠 속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가 지금, 몇 층이죠?”
“17층이나 18층쯤 될 겁니다.”
“우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가요?”
허공이었다. 또한, 어둠 속이었다. 경현과 여자는 어둠 속에, 허공 한 가운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사람들의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장실과 회장실, 그리고 헬리포트가 있었다. 그 사람들의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주차장과 동력실, 그리고 노조 사무실이 있었다. 경현과 여자는 그 사이의 어떤 지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릴 겁니다. 이제 곧.”
경현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문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승강기 안에 갇힌 채 밤을 지새우거나, 아니면 승강기와 더불어 저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릴지도 모른다……
“불이라도 있었으면…….”
그렇다. 불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둠이 입과 코를 통하여 몸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폐 속에 끈적끈적한 진흙탕 같은 어둠이 가득 들어찬 것만 같았다. 경현은 라이터를 꺼내 몇 번이나 스위치를 눌러보았다. 그러나 끝내 불꽃은 일어나 주지 않았다.
그때, 경현은 그것을 생각해냈다. 그렇다. 경현은 벌떡 일어섰다. 어둠 저쪽에서 여자가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경현은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손이 천장에 닿았다. 경현은 천장을 더듬어나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잘도 승강기의 뚜껑을 찾아내어 그 위로 뚫고 나가 탈출과 잠입을 감행하지 않던가. 뚜껑을 열면 험악스러운 콘크리트 벽이 있고, 굵은 강철 와이어가 승강기를 매달고 있지 않던가.
“뚜껑을 찾으면…….”
그러나 경현은 탈출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뚜껑을 열 수만 있다면 빛이 스며들 것 아닌가. 뚜껑 같은 것이 손에 닿기를 바라며 경현은 군데군데 천장을 위쪽으로 밀어보았다. 그러나 밀려 올라가는 곳이 없었다. 철판과 철판의 이음매와 몇 개의 나사 머리들이 감촉될 따름이었다.
“돼요?”
여자가 물었다. 경현은 참으로 오랜만에, 실로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 목 놓아, 큰 소리로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쯤 마음이 달래질 것 같았다. 경현은 뚜껑을 찾기를 포기한 순간, 문을 향하여 돌진했다.
“야 이 자식들아, 문 열어, 문! 사람 죽은 다음에 시체 꺼내 갈 거냐, 이 더러운 자식들아!”
경현은 두 발로 벽을 걷어찼다. 주먹으로 쳤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온몸을 벽에 함부로 부딪혀갔다.
누군가가 경현의 어깨를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경현은 움직임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으로 여자가 말했다.
“고만하세요, 차장님. 승강기가……흔들려서 무서워요.”
여자의 손은 경현의 팔을 더듬어 내려가더니, 그 남자의 손을 발견하자 그것을 꼭 쥐었다.
“손을 좀 잡아줘요.”
어둠 속에서 여자의 입김이 바로 곁에 느껴졌다. 경현은 여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의 손에서도 힘이 전해져 왔다. 여자의 얼굴이 경현의 어깨에 얹혔다. 영주의 뺨과 경현의 뺨이 스쳤다. 그때, 경현은 뭔가 차갑고 축축한 것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경현은 놀라 머뭇머뭇 여자의 뺨을 만져보았다.
눈물이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자의 음성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이대로…… 좀 있게 해줘요.”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승강기가 멎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자의 얼굴이 경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더욱 기묘한 것은 경현 자신의 마음이었다.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경현의 마음은 훨씬 고요하고 침착해지는 것이었다.
“울지 말아요. 이제 곧 나갈 수 있게 돼요.”
“무서워요.”
목덜미 가까운 곳에 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경현은 여자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여자가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것을 경현은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여자의 입술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어둠을 향하여 머뭇머뭇 입술을 가져갔다. 거기 여자의 입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입술이 만났다. 경현의 두 팔이 여자의 허리를 굳게 끌어안았다. 경현은 이번에는 여자의 두 팔이 자신의 목덜미에 감기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경현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자의 입술을 떠난 경현의 입술이 이번에는 여자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17
투표함이 개봉되었다. 참관인은 영태와 성수였다. 위원장 한용철이 투표지를 펴 읽었고, 장 씨가 칠판에 집계를 해나갔다.
“가(可)!”
성수는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태는 투표지가 한 장 펼쳐질 때마다 어김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확인했다.
“가!”
“가!”
한용철은 계속해서 ‘가!’ 하고 외쳐댔다. 칠판에는 ‘가’ 쪽에 17표, ‘불가’ 쪽에 5표가 기록되어 있었다. 영태의 얼굴이 차츰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
“가!”
영태와 성수가 싸움을 벌인 뒤에 벌어진 토론에서 거의 모든 조합원들은 회사 쪽이 요구하는 승강기 수리에 응하자는 쪽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영태는 끝까지 반대했다. 싸움을 끝내기 위하여 한용철은 투표를 제안했다. 영태는 그 제안까지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가!”
“가!”
갑자기 영태가 벌떡 일어서서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이어서 동력실 출입문이 꽈당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용철은 투표지를 펄치다말고 성수에게 말했다.
“가봐. 가서 사과해. 알았어? 조그만 놈이 이유가 뭐건 어른한테 덤벼들어, 왜?”
성수는 책상에서 일어나 동력실을 나갔다. 영태는 동력실 바로 앞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저씨.”
“저놈들이 우릴 사람으로 보는 줄 아냐? 아까 못 들었냐? 더럽다, 무식하다 ……”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파업을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영태는 손가락이 둘밖에 남지 않은 손을 들이밀었다.
“내가 동생 대학 공부 시키느라고 이 손가락까지 잡아먹은 놈이다. 그런데 그놈이 검사 되고, 결혼하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냐? 그놈 마누라가 날보고 더럽다는 거야. 무식하다는 거야. 처음엔 동생 놈은 내 편을 들더니, 얼마 안 지나 그놈까지 노골적으로 날 사람 취급을 않더라. 어머니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영태의 어머니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은 성수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자리 역시 ‘한주 본관’ 용원 노동조합 설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선 돈 빌려줄 수 없다고 하지, 수술은 급하지. 어쩌겠냐? 다신 꼴 안 본다고 결심했었지만, 동생을 찾아갔지. 그런데 그놈 마누라가 내가 대문 들어서자마자 뭐랬는지 아냐? 구두 좀 닦아 신고 다니래. 옷 좀 털어 입고 다니래. 양말 좀 갈아 신고 다니래. 말 한마디 않고 돌아서 나와버렸다.”
영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훌쩍훌쩍, 울 따름이었다. 그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팽, 풀어젖힌 다음에 훨씬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 냈다.
“두고 봐라. 그 승강기에서 니가 구해낸, 바로 그놈이 니 모가지를 날릴 테니까. 저런 놈들, 배운 놈들 행사는 다 마찬가지야. 내가 저런 놈들 한둘 본 줄 아냐?”
동력실 문이 열리고 한용철이 투표지 뭉치를 손에 쥐고 나왔다.
“가서 동력선 손질해. 47 대 19야.”
“미안해요, 아저씨 .”
영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성수는 동력실로 들어가 배전판 앞에 섰다. 고장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퓨즈 하나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성수는 공구함에서 퓨즈를 찾아 연결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18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영주가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 여자는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남기며 사라져가 버렸다. 경현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경현을 돌아봐 주기라도 했더라면 그 남자는 여자의 스커트 자락 끝에 흙먼지가 묻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을 덴데.
경현은 잠깐 망설였으나, 승강기의 문이 닫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았다. 21층의 단추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승강기는 21층에서 어김없이 멎었고, 스르르 문이 열렸다. 경현은 승강기에서 내리자 먼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며 그 남자는 넥타이를 다시 매고, 와이셔츠의 깃을 바로잡았다. 평소에는 오후 늦게, 퇴근할 무렵이 되었을 때쯤에야 생기는 눈 밑의 검은 그늘이 벌써 훨씬 더 짙고 넓게 자리 잡은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이상할 것이라고는 없는 평상시의 얼굴이었다.
경현이 사장실로 들어섰을 때에 강 사장은 어두운 얼굴로 창밖의 한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좀 늦었습니다, 사장님.”
“음, 앉아요. 계단으로 올라왔어요?”
하고 강 사장이 물었다. 경현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대답했다.
“예.”
경현은 서류를 꺼내 놓았다.
“내일 날짜 어음*은 얼마지요?”
“내일은…… 5억 5천 정돕니다. 그 정도는 메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음 주 월요일부텁니다. 5개월짜리로 돌린 어음이 마구 들이닥칠 겁니다. 안산 공장 증축 때 사용한 것들이죠. 이게 날짜별로 예측해본 액수입니다.”
“허어, 이것참……”
강 사장은 전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인터콤이 울렸다.
“회장님이십니다.”
강 사장은 벌떡 일어섰다. 경현도 일어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로 사장실에서 나와 곧장 승강기 앞으로 갔다. 4대의 승강기가 모두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경현이 미처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강 사장은 가장 가까이 있는 승강기의 단추를 눌렀다. 곧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몇 분 전 경현이 빠져나온 바로 그 승강기였다: 강 사장은 승강기에 오르자, 바닥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아니, 승강기 안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이 회사에 있나? 그것 참.”
경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승강기에 올라선 순간,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승강기 바닥에 검게 반짝이는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경현은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뜨렸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하게 발달한, 늘씬한 여자의 누드 인형이었다.
“아니 , 승강기가 언제 수리됐지?”
하고 강 사장이 물은 것은 승강기가 이미 1층을 향하여 곤두박질쳐 내려가기 시작한 지 한동안이 지난 때였다.
『문학사상』 207호(1990. 1); 『인형 만들기』 (한길사 1991)
* 2006년 6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최인석(崔仁碩)
195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1980년 『한국뮨학』 신인상을 받으며 희곡으로 데뷔한 뒤 극작가로 활동하다 1986년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불의와 폭럭이 구조화된 우리 시대의 삶의 조건에 치열하게 맞선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 『내 영혼의 우물』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나를 사랑한 폐인』 『구령 이들의 집』,
장편소설 『새 메』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 『아름다운 나의 귀신』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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