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사도 성 베드로와 바울로 축일
에제 2:1-7 / 2디모 4:6-18 / 요한 21:15-22
칼과 열쇠
저는 매일 아침 한옥성당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문을 닫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해서, 문을 닫는 것으로 마감합니다. 특히 아침에 성당 문을 열고 아침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성당 안을 비출 때, 잠시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 밖에서 들려오는 재잘재잘 새소리와 성당 안 침묵의 소리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성당 지성소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상과 양 옆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있고, 회중석 앞면에는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와 칼을 든 바우로 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바우로가 목이 잘리게 되던 그 순간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겉옷을 벗기운 채 로마병정들에게 끌려온 바우로는 그 마지막 순간에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의 마음에 남았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의 회심, 곤경, 바르나바와 베드로와 벌였던 언쟁들, 실망과 고독의 순간, 사막에서의 14년, 공동체에서 거절당했던 슬픔? 아니면 열정적인 활동, 인상적인 편지들, 기뻤던 삶의 순간을 떠올렸을까? 사람은 죽음 앞에서 가장 진실하고 과장이나 숨김이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그는 어떤 것을 가장 참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등등. 일련의 질문들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들은 제2독서 디모데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바울의 고난’은 사도행전 끝부분이라고 할 21장부터 28장까지, 즉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기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비해서 아주 장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그리스도의 공생활에 대하여 간략하게 다루다가 수난 때에 와서는 사건의 순간순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을 얼마큼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들은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간에 오고 간 대화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 전의 상황을 잠시 언급하자면,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후,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낙향하고 이전에 했던 일터로 돌아갔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갈릴리 호수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어떤 사람이 호숫가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말대로 했더니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제자들은 3년 전 그날, 자신들을 제자로 불렀던 그 때와 똑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저 분은 주님이다 (요한21:7)”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뻤고 육지에 도착해서 잡은 물고기로 예수님과 함께 아침식사를 합니다. 식사 후 오늘 들은 복음에 나오는 대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번 물어보시고, 이에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대화를 묵상하며 목회(牧會)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간의 사랑은 더웠다가 식을 때도 있고, 조직에 대한 충성도 때때로 배신을 당해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러한 조변석개(朝變夕改)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희망으로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나와 우리를 이 세상의 ‘칼’로 당한 상처를 치유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열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 베드로와 바우로는 우리 강화성당의 수호성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문장인 깃발 중앙에는 베드로를 상징하는 열쇠와 바우로를 상징하는 칼이 그려져 있고, 양 옆에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赐你天国之钥)”와 “성신의 검을 받아라(执圣神之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후, 주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구절(마태 16:19 참조)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구절(에페 6:7 참조)에서 따온 것입니다. 강화도에 첫 발을 디딘 영국 선교사들은 이 언덕에 한옥성당을 지은 다음, 이곳을 사도 베드로의 이름처럼 천국으로 가는 굳건한 반석과 같은 곳이 되길 바람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내고 이 말씀의 칼로 강화도와 황해도를 비롯한 이 일대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길 희망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우리 성당은 강화읍 언덕에 구원의 방주가 되어 사람들을 이 배에 태우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늘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 외에 저는 또 다른 측면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성당 오른쪽에 있는 베드로 상 발에 있는 닭입니다. 고난주간 때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잡히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스승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의 굳건한 반석이자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보인 이와 같은 연약함을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이지만 동시에 베드로처럼 주님을 외면하고 모른다고 하는 비겁한 죄인들이기도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완벽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베드로처럼 약함으로 쓰러지고, 그렇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 사랑과 믿음을 갱신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자매가 베드로처럼 약함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볼 때, 또는 바울로처럼 편협한 생각과 주장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줄 때, 단죄하고 몰아내기 보다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 주님의 빛으로 깨달아서 새롭게 변한 바울로로 돌아올 때까지 관대하고 인내롭게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되어 주님의 자녀들을 잃지 않고, 천국을 향해 가는 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강화성당의 관할사제 자격으로 마지막 예배를 집전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날을 우리 교회의 수호성인이신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축일로 드릴 수 있게 돼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제 세례명이 베드로이고, 그래서 성전 안에 있는 교회 깃발과 베드로 상을 볼 때마다 저는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의 명에 순명하여 제가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이 강화성당에서 사목한 시간을 제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의 자랑이자 우리 한국 기독교의 자랑인 성 베드로와 성 바우로 성전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령의 검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감화시키고, 천국의 열쇠가 되어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구원의 방주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