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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묵상글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마음을 먹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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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을 먹는 우리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는 예수 성심, 오늘은 성모 성심 축일 지냅니다.
아들 가는 데 어머니 가시니 우리의 전례도
아드님의 마음에 이어 어머니의 마음도 같이 기리는 거지요.
그리고 그 마음들을 기리며 우리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니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마음을 먹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마음을 먹기로 마음을 먹고,
성모님과 똑같은 마음을 먹기로 마음을 먹는 날입니다.
여기서 저는 왜 마음을 먹는다고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음식을 먹듯이 마음도 먹는 것인가요?
왜 마음을 먹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먹는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겁을 먹고,
나이를 먹고,
뇌물을 먹고.
내뱉지 않고 속으로 집어넣거나 삼킨다는 뜻입니다.
밖으로 내치지 않고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말과 있었던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말도 안 소리라고 바로 내치지 않으시고,
일단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이쪽 귀로 듣고는 저쪽 귀로 내보냅니까?
그런데 성모님은 아들의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성모님의 마음속이 잉태의 장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심으로써 아드님을 잉태하셨잖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정배가 되는 길입니다.
다른 잡것들은 마음먹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 간직하기로 마음먹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하고, 성령의 정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들을 ‘Sponsa Christi’,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보통 부르는데
프란치스코는 특이하게도 클라라 수녀들에게 성령의 정배가 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정배가 되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동정녀였다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것도 좋지만
성령의 정배로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도 좋습니다.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고, 간직하고, 출산하는 어머니들이.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마음에 새길만 합니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무튼, 겁이나 나이나 뇌물을 먹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마음을 먹는,
그것도 주님과 성모님의 마음을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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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피앗’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 또한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 어머니시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 또한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오늘 제 형제들을 당신 성심의 가슴에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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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마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를 가득 채워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성모마리아는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 주십니다. 성모마리아는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경청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면 매우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장19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장 52절에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뜻 앞에서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이, 겸손하게 서 있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께서 당신을 완전히 차지하시고 당신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끔 자신을 성령의 손에 내어 드리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경청, 의탁의 자세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 서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게끔 내맡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성모님께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속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92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것의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계셨고, 이제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주검을 품에 안으셔야 했던 어머니,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전념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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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한 어린아이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해 주세요. 착한 누나는 스마트 폰 너무 보지 않고 책을 가까이 하게 해 주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떨어지지 않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저는 한 번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연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가 있습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입니다. 가사의 내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힌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힌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어제는 ‘예수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은 ‘순종’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희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종, 연민, 겸손, 희생’의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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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되십시오!”
-성화의 여정-
“성화되십시오!”
제가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 아침 식사전 최초로 들은 최고의 참 좋은 인사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문도미니코 수사님이 전기스토브에 구워진 식빵을 건네 주며 했던 이 인사말이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고 즉시 참 좋은 인사말이라 감사했습니다. 정말 형제자매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인사말입니다.
예전에 “성인이 되십시오!”, “성녀가 되십시오!” 간혹 말씀드린 적은 있어도 위 인사말은 처음입니다. 언젠가 사찰에서 불자들이 “성불하십시오!”서로 합장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을 본 적에 감동한 적이 있는데 저는 “성화되십시오!” 인사말에 감동했습니다.
예수성심성월 6월중 어제 16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고, 오늘 17일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대축일’입니다. 아드님과 어머님의 축일 배치가 등급에는 차이가 있지만 참 보기 좋습니다.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했지만 저는 오늘을 포함해 하루하루 모든 날이 신자들의 ‘성화의 날’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성화의 여정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성화은총이 우리의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마침 어제 16일은 교황님께서 6.7일에 입원하셨다가 쾌차되셔서 퇴원한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 퇴원후 바티칸에 돌아 오자 즉시 관례대로 성모경당에 들려 성모님 이콘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참 거룩하고 아름다워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뿐 아니라 역대 모든 교황님들의 성모신심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고백의 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에 제가 주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제 늦게서야 우리의 성화를 바라시는 성모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는 고백기도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은 예수아기를 안 듯 당신을 찾는 우리 하나하나를 안으며 다음같이 되뇌일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선물을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안 듯
당신을 안는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어제 오후도 며느리와 손주를 둔 자매님들이 면담성사차 방문했기에 사죄경과 강복후 이 고백시의 마음으로 안아드리고 위 고백시를 출력하여 나눠드리며 당부했습니다.
“제가 이 고백시의 모범을 보여드렸습니다. 이 고백시를 잘보이는 곳에 붙여 놓으시고 이런 마음으로 남편을, 자녀를, 며느리를, 손주를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도 자매님도 성화될것입니다. 우선 남편한테 이런 마음으로 안아달라 하세요.”
얼마나 좋은 몸과 마음이 하나된 기도인지요! 성화의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지요! 성화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성화되십시오!” 하느님의, 예수님의, 성모님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가능한 저를 찾는 모든 분을 이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안아드리고 위 고백기도문을 출력하여 나눠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 성화되어 성인이 될 수 있겠는지요? 광야인생여정 셋중 하나일거라 드린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자기를 잊고 살다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성화도 은총이자 동시에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첫째, 사랑의 찬미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찬미를 사랑하세요. 저절로 찬미입니다. 찬미의 은총이자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타고난 영적본능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의 맛, 찬미의 기쁨, 찬미의 재미로 살아갔던 성인성녀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가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성모님은 찬미의 어머니였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찬미의 고백은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고백이자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고백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아,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의 성화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 치유와 위로는 물론이요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을 사랑하세요. 저절로 경청입니다. 경청의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겸손, 사랑의 경청입니다.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듣는 이가, 경청(傾聽, 敬聽)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거룩한 ‘성(聖)’자 안에 귀 ‘이(耳)’자가 들어있음이 이의 반증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경청의 달인이자 관상의 대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담아두는 내적공간이 큰지 감탄하게 됩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과 더불어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거룩한 문제아(?)’일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 아드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점입가경입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동문서답, 적반하장입니다. 사과가 아니라 성모님의 몰이해를 추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성모님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경청의 지혜, 인내의 믿음입니다. 불같이 화를 낼법도 한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간직합니다.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는 깨달아 이해할 때 까지 끝까지 담아두기로 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 어머니들은 물론이요 믿는 이들 모두가 배워야 할 성모님의 경청과 관상의 자세입니다.
셋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자발적 순종의 사랑입니다. 이런 자발적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그러니 순종을 사랑하세요. 순종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순종의 달인이자 순종의 대가였음을 이미 수태 예고시 들은 바 그대로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참으로 부모의 삶이 반듯하면 자녀들의 삶도 십중팔구 반듯합니다.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겸손도 순종도 보고 배웁니다. 복음 후반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면 지냈다.’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모중 특히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삶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성화되십시오!”
“성인이되십시오!”
성화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가 성인이 되는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하듯 삶을 사랑하세요. 찬미를 사랑하세요. 경청을 사랑하세요. 순종을 사랑하세요. 저도 수도생활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기에 기쁘고 행복하게 수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사랑하세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두 교황님의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참빛을,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주셨나이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시어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선의 샘이 되셨나이다.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
-(2005.12.25. 예수성탄 대축일 교황 베네딕도 16세)-
다음은 2022.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바친 봉헌기도중 끝부분입니다.
“오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저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지고 감미로운 평화가 저희의 일상에서 약동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임하신 날 “예”하고 응답하신 성모님, 저희에게 하느님의 화합을 주소서. ‘희망의 샘’이신 어머니, 저희의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소서. 당신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엮어내셨으니, 저희를 친교의 장인으로 만드소서. 당신께서는 저희의 길을 걸으셨으니 저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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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모님을 표현하는 말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축일로 지내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순탄치 않았던 삶입니다. 아기를 배속에 품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도 봐야 했습니다.
모든 죽음은 슬픈 일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어미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그 어떤 슬픔보다 깊고, 깊고 또 깊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곳 순교 성지 봉안당에서 봤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간직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과거의 것과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모든 일에 관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마음속에 상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맞으신 채찍의 생채기만큼 성모님의 마음도 수많은 생채기를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성모님을 ‘티 없이 깨끗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상처와 아픔, 그리고 깊은 슬픔까지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잉태할 때의 그 말씀을 끝까지 이루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신 이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외식
아주 어렸을 적 일주일에 한 번 외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 기억을 선명하게 하는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단기기억은 좋은데 장기 기억력은 나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릴적 일주일에 한 번 외식한 것은 기억납니다.
왜 기억할까요? 너무 좋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식 전에 목욕을 꼭 해야 하는 가족 규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목욕한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목욕을 좋아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그저 목욕한 후 외식을 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메뉴는 늘 ‘돼지갈비’였습니다.
어쩌면 제가 다른 누군가보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은 외식 어떨까요? 값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히지 않는 추억의 외식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추억은 앞으로 우리에게 순간순간의 행복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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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랑이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냐면서 화를 내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아들이 잘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것이 뭐 있는데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 화풀이를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 말에 아버지는 너무 서운했고 슬펐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정신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보셨습니까?”
이 형제님께서는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을 압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을까요? 혹시 모른 척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랑이 아닌 당연한 부모의 의무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말과 행위가 드러나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에 대한 복음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깊이 뉘우친 뒤에 아버지께 갑니다. 이를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루카 15,20)라고 루카 복음은 전해줍니다.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돼지 치는 일’을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행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루카 15,18)라는 생각을 행위로 드러냈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기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행위로 사랑이신 아버지를 만나고 사랑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진지한 결단이 담긴 말과 행위가 꼭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부터 시작해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 역시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불평불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루카 2,51 참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에 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신 성모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불평불만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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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란 질 때도 있는 거지, 그걸 극복해야 챔피언이 돼(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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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안에>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계시듯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계시니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품듯이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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