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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으라(출 3: 1-12)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제시하고 믿으라고 하지 않고 불확실한 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확실하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인간자신의 신념이나 판단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불확실한 것을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신념이 개입되는 것은 스스로 확인하고 틀림없다고 느껴질 때 믿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는 것을 믿겠다고 나서는 것이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과는 전혀 달라야 하는 특이한 것이 곧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문제에 있어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거는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행동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분을 믿고 있는 증거를 보이는 것으로 통해서 드러내려고 할 때 많은 잘못된 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믿음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행위입니다. 기도를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성경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강조를 하다 보니까 어떤 잘못이 발생하느냐면 남의 믿음을 흉내내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남의 믿음을 흉내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믿음이 좋은 것으로 추앙을 받을 때 자신도 그 사람이 한 대로 행동함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잘못된 유혹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께 자주 말한 것 중에 하나가 믿음 생활을 남의 흉내를 내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깨달아진 대로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는 이 말이 참으로 곤혹스럽게 들리나 봅니다. 뭔가 부지런히 해도 믿음 생활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 하고 싶을 때 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라고 할 때, ‘그럼 아무것도 안해도 천국 가는가?’ 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천국 갑니다.
그런데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신에게 행위가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신자됨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 깨달은 분량만큼, 믿음만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의 행동을 흉내를 내게 되고 이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믿음을 위선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흉내를 냈을 뿐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보여지고 칭찬을 듣게 되었다면 결국 거짓이고 위선이 아닙니까? 이런 믿음은 오히려 자기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그들 부부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시 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을 바쳤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부의 그 요셉을 흉내내어서 자신의 재산을 바치고자 했는데 결국 자기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마다 믿음의 깊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깊이가 다르면 그 행위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약한 믿음을 어떤 행위를 통해서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이 각기 다른 이유는 서로의 보완과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신자 모두가 약한 자이면 누가 그 약한 자들을 끌어가고 가르칠 것입니까? 또한 모두가 강한 자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구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강한 자는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 않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며,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의 신앙을 보면서 가르침 받고 깨달으면서 자연스럽게 자라 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바른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가지고 비판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정도 밖에 안돼’라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깨달음이 있고,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게으름과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산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책망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잡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순간적인 기분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신앙의 욕심을 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이 분위기에 휩쓸리고, 기분에 좌우되고, 욕심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면 신앙 생활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크나큰 부담거리로 다가오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부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생활이 부담이고 짐이 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남 눈치 전혀 보지 마시고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부담이 되어있는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옆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 분명히 계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일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믿으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때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오늘 본문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구원의 방식은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갓난 아이의 처지에서 물에 버려진 모세는 그야말로 남의 손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불쌍히 여겨서 건져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의 손을 통해서 모세를 건지심으로 말미암아 장차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그 근거가 뭐냐는 것을 미리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에 죄의 자리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민족을 도울 때 힘을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쫓아내셔서 40년을 지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세에게 있는 힘과 재주에 대해서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는 80이 되었습니다. 모세 스스로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단지 가정을 이끌면서 양을 치고 사는 것이 자신의 모든 인생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때 모세는 40년간 나타나지 않던 하나님께서 나이 들어 힘이 없는 이때에 나타나셔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것이 크나큰 부담으로 왔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심정은 본문 11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가지 가르치시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명령을 내리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신자인 우리는 그 명령서를 받아 들고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 가면서 명령을 성공시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젊을 때의 모세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하나님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원래 불이라는 것은 태워지는 것이 있어야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힘을 빌어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일하십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인간은 아무 쓸모 없는 하찮은 인간입니다. 떨기나무는 가치 없고 하찮은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하나님이 불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찮은 나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께 쓰여지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의 재주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합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종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종은 신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스스로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의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제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고 살아가야 할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말한 대로 참으로 특이한 세계입니다. 세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열심히 하면 좋아하시고 게을리 하면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싹 무시해 버리고 전도나 헌금이나 봉사 등의 행위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지금 대부분의 신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종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종으로 삽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 묻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은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복을 전하십니다. 복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이 복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다른 것은 염려하지 않고 말씀대로만 움직이려고 애쓰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앙은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기 맡겨진 일속에서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살뿐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신을 벗은 자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바랍니다. 내 부족만 바라보며 걱정하고 염려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신앙 생활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