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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0qeGVmqaT6s
여러분이 기도해주셔서 유럽기도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가장 앞부분을 다루겠습니다.
먼저 주기도문과 관련된 간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진주초대교회 이경은 목사님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시집이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본 종교를 믿었습니다. 시이모부는 17년간 산에서 도를 닦던 사람인데, 그분이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믿은 지 1개월 만에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이경은 목사님의 시어머니를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전도를 받은 시어미니는 시이모부에게 능력대결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밤새워 자기가 믿는 종교의 주문을 외었고, 시이모부는 밤새워 주기도문을 외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한쪽에서는 남묘호랑게쿄를 외우고 한 쪽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그런데 새벽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 속에 있던 귀신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귀신이 말했습니다. “사요나라. 나는 간다.” 아마도 그 종교가 일본 종교라 “사요나라”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귀신이 떠났습니다. 주기도는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마음을 실어서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여 응답 되는 것입니다.
어떤 독일인 교수 한 분이 일본을 방문해서 몇몇 대학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강연을 마친 후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기도를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보통 얼마동안 기도를 하십니까?”, “짧게는 10분, 좀 길어질 때에는 30분 정도 합니다.” 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시기에 그렇게 시간이 걸립니까?”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합니다. 어떤 때는 30분도 짧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하나하나를 곰곰이 되새기면서 기도하면 30분도, 1시간도 가능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 행태를 지적하신 후에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여러 번 주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누가는 누가의 시각으로 기록했고 마태는 마태의 시각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주기도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 ‘후토’(οὕτω)는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 즉 마치 주문 외우듯이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정신과 내용 그리고 그 순서상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주기도문의 정신을 가지고 그 내용에 걸맞게 그리고 가능하면 주기도문의 순서를 따라서 기하도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새로 번역된 주기도와 사도신경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몇 주 동안에 주기도와 사도신경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첫 번째 시간입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부분을 다루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기도하라.
우선순위와 관련된 비유적인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오래 전 미국 텍사스의 어느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 동네에 새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저녁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은 타고 온 마차를 다시 타고 한 집사님 댁에 가서 그날 밤을 잤습니다. 이튿날 일찍 일어난 목사님이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목사님,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집사님, 나는 어젯밤에 집사님 댁을 오면서 말이 굉장히 힘들게 넘어간 그 고개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목사님, 교회와 저희 집 사이에는 아무런 고개가 없는데요. 목사님께서 착각하신 것 같아요.”, “집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마차를 몰고 오는 동안에 말은 계속 힘들게 고개를 올라갔고, 나는 거의 넘어갈듯 몸이 뒤로 누워진 채로 말을 몰고 고개를 넘어서 왔는데요.” 그 말을 들은 집사님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살았던 자기 집 주위에는 고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이 마차를 살펴보니 마차 바퀴가 잘못 끼어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은 첫날 저녁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 동안 동네의 장난꾸러기 청년들이 새 목사님을 골탕 먹이려고 목사님이 타고 온 마차의 바퀴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뒤에 있는 큰 바퀴 두개를 앞에 끼어 놓고, 앞에 있는 작은 바퀴 두 개를 뒤에 끼어 놓은 결과, 목사님은 고갯길을 올라간 것처럼 힘들게 온 것입니다.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앞에 있을 것이 뒤로 가고, 뒤에 있어야 할 것이 앞으로 오지는 않았습니까?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세상의 것들을 우선시 하면 여러분은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것들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요약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게 9절과 10절의 내용입니다. 그 후에 사람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11-13절에 보면 사람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구절 두 곳만 보겠습니다. 마 6:33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고전 10:31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역시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부나 직장생활이나 사업이나 목회나 무엇을 하든지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신통해야 인통하고 인통해야 물통하는데, 우선순위가 잘못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니 다른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주기도문의 정신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2. 하나님의 실존에 근거해서 기도하라.
우상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은 실존하지 않는 신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 115:4-8입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8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 말씀의 결론은 8절입니다. 우상은 무능하듯이 우상을 만드는 자와 우상숭배자들도 무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웃긴 것은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만든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우상은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합니다.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섬깁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실존하십니다. 삼위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지만 공식적인 위치가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은 위치적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보좌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여기 하늘은 막연한 곳이 아닌 확실한 장소입니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이 꾸며낸 소설이 아닙니다. 분명히 미국이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역사를 읽는다면, 이 땅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 복음 전도자들, 이들 모두는 그 마음이 천국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천국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은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천국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짧고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계 8:3,4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하늘에서 천사가 제단 곁에 섰습니다. 그 천사는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천사가 향을 받은 것은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계 8:5입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천사가 우리의 기도가 담긴 향로를 땅에 쏟으니 땅에서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우리의 기도응답으로 땅이 진동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헛되지 않습니다. 천사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 올리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땅이 진동합니다. 우리는 막연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근거해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초월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 존재하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상, 논리를 넘어선 초자연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자이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늘은 신적인 권위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과 공로로 인하여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진동하는 것입니다.
시 145:3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여호와는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능력 자체이십니다. 모든 우주의 에너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태양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6천 년 전에는 능력이 대단하셨는데, 요즘에는 기력이 쇠해서 활동이 뜸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즘에 유럽과 북미에서 할 일이 많고 바쁘셔서 한국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을 못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좋으신 분인데, 그분의 성품과 능력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싶어 하시는데, 그런 마음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1만 시간 기도를 작정하고 4번째입니다. 이제 곧 4만 시간이 채워집니다. 우리가 붙잡고 기도하는 말씀 중에 하나는 슥 4:7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스룹바벨이 성전을 세울 때 방해 세력들 때문에 공사가 중단 되었는데, 그때 방해 세력들과 성전을 건축할 수 없는 환경이 큰 산 같았습니다. 하지만 스룹바벨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사역을 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에게도 큰 산이 평지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으로 충만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바네사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레이크우드 교회의 교인인데 관절 요통으로 30세도 안 된 나이에 할머니처럼 꼬부라졌습니다. 차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교회에 들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45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그 병으로 43세에 죽었고, 할머니도 그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아! 나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죽겠구나. 서른도 안 되어 죽겠구나. 의사까지 되었는데 죽는구나.’라며 낙심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관절 요통이 인생의 큰 산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머니도 큰 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에게 믿음의 불이 확 붙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집의 운명, 우리 집안의 병은 이렇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확신하고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근거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집안에 내려오는 저주와 같은 이 병을 걷어가 주세요. 주여! 이것을 걷어가 주세요.” 바네사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한 후 3개월 만에 그의 병이 완치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큰 산이 평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근거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에 근거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됩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해서 기도하라.
성경에서 최고의 불효자식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서 밤중에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울면서 도망갔습니다. 그는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후궁들을 데려다가 욕을 보입니다. 계획적으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한 짓입니다. 어떤 분은 압살롬이 ‘이렇게 해야 아버지가 자살해서 죽을 거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했다고 보더군요. 너무나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압살롬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 걸려서 그가 나무에 매달려서 오도 가도 못했습니다. 요압이 그를 창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압살롬이 천하에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속이 후련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압살롬의 아버지 다윗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반란 초기에 다윗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비록 압살롬이 자기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려는 나쁜 놈이었지만 다윗은 아버지로써 압살롬을 잘 봐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삼하 18:33절에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울면서 차라리 자기가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자기의 신을 ‘아버지’라고 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고, 손으로 만지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중의 호칭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가 성부를 아버지로 호칭합니다. 이것을 위격적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모든 인간의 기원은 모든 만물과 함께 하나님께 있습니다. 넓게 보면 창조된 모든 것들의 아버지이시고, 좁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셋째는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로 삼으시고 특별한 언약을 통해 신정 국가를 형성하셨습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 삼으시는 구속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을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창조적 아버지이시고 양자적 아버지입니다. 이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나쁠 수 있습니다. 세상 아버지는 술주정꾼일 수 있고,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가장의 책임을 못하는 무능하고 가련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좋으신 아버지이며,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줄 수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를 무한 책임지시는 아빠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님이라고 합니다. 제 아들은 저에게 아빠라고 합니다. 아버지, 아버님, 아빠 중에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친근한 사이 같아 보입니까? 아빠죠.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120번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막 14:36에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에수님은 어린 아이가 자기 아빠가 너무 좋아서 격식 없이 부르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롬 8:15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와는 현저하게 다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전과는 달리 부모인 우리들을 의존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아빠의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아버지는 힘과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자녀의 생계가 아버지에게 달렸고 자녀는 아버지를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이런 의존의 감정들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빠라고 기도함으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를 넘어서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지는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음’이라는 뜻이고 의존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존재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를 넘어서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사랑스럽게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보다 더 가까울 수가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빠라는 단어는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성인이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어린 아이가 사랑하는 아빠를 부르듯이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영상을 하나 보시죠? 잠꼬대하는 아기가 아빠를 부르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bTJC8Qo49wg 여기계신 아버지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아빠를 부른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너무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하나님을 부른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빠에게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대충 세 가지 방법으로 요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는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아빠가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녀와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들만한 분위기로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아이의 목표가 분명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레스링을 하듯이 치열한 모습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아빠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며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아빠를 기쁘게 해서 아빠의 마음을 녹이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기도를 합니까?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그럴 수는 없겠으나 사랑하는 아빠가 자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자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사랑스러운 기도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꼭 아빠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뛰어난 기도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입니다. 어느 날 그는 깊은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그런데 그가 반복해서 한 말은 “오 나의 보배로우신 주님! 오 나의 보배로우신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을 쏟아 부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한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다만 ‘오 나의 보배로우신 주님! 오 나의 보배로우신 주님!’ 이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리기만 했다. 나는 하나님의 가슴에 안기는 것뿐이었다. 하나님께로 향한 나의 갈망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 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나 보배로웠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쾌락이 추하게만 보였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조약돌처럼 보여졌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기댈 수 있는 아빠이십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1.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기도하라.
2. 하나님의 실존에 근거해서 기도하라.
3.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근거해서 기도하라.
4.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해서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