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發展(발전)하는 내 故鄕(고향)
巨濟市(거제시) 長木面(장목면) 冠浦(관포) !
1592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舊永(구영)뒤를 蘇秦浦
(소진포)라고 표현 하였고, 冠浦里[(관포리,갓개, 저포, 관포] - 本來(본래) 地形(지형)이 갓(這)처럼 생겼으므로, 갓개(這浦-저포)라고, 불렀다고 학글 學會(학회)가 밝혔다. 記錄(기록)에는 巨濟府邑誌(거제부읍지)에는 這浦(저포)라는 이름으로 河淸面(하청면) 坊里(방리)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本來(본래) 杜毛里(두모리)는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는 冠浦里(관포리)로 동네 이름 바꾼 理由(이유)는 杜毛里(두모리) 住民(주민)들이 頭毛里(두모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자 這浦(저포) 住民(주민)들이 冠浦里(관포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理由(이유)는 머리털위에는 갓(冠(관)을 쓴다는 理由(이유)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冠浦(관포) 마을 선조님들의 證言(증언)이다.
1980년11월 23일 거제도 고향 거남사(巨南祀) 처해당(處海堂)준공식 날 촬영. https://www.youtube.co m/watch?v=U-wLqZe5qRg
2017년에 drone 으로 촬영한 거제도 장목면 관포리 마을 전경에 닭섬이 맨 먼저 나온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 마을 위성사진
冠浦里 마을의 歷史
朝鮮朝(조선조)에 巨濟郡(거제군) 河淸面(하청면) 面長(면장)을 歷任(역임)하신 筆者(필자)의 曾祖父(증조부)님을 찾아 오신 郡守(군수)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1895년 제26代(대) 高宗(고종) 37년에 地方官制改正(지방관제개정)에 依(의)하여, 郡(군)이 되어, 長木面(장목면), 外浦面(외포면), 一運面(일운면), 二運面(이운면), 屯德面(둔덕면), 西部面(서부면), 東部面(동부면), 沙等面(사등면), 河淸面(하청면), 延草面(연초면)의10개 面(면)을 管轄(관할) 할때 杜毛里(두모리)는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는 冠浦里(관포리)로 바꾸었다.
거제군수가 杜毛(두모)를 頭毛(두모)로 하는데, 這浦(저포)의 同名(동명)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諮問(자문)을 하시자, 曾祖父(증조부)님께서는 本來(본래) 這浦(포)는 음을 따서 "갓개" 라고 했으니, 갓 冠 字에 개 浦字로 冠浦(관포)로 바꾸었다고 先代(선대)에서 말씀 하신것을 父親(부친)께서 늘 말씀 하셨다.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서울대규장각(奎章閣) 소장(所藏)>에는
1899년 고종(高宗) 36년 광무(光武) 3년 5월 거제읍지(巨濟邑誌)에 기록(記錄) 하기를 장목면(長木面) 11방(坊)중에 장목(長木). 관포(冠浦). 하유(下柳). 저도(猪島). 송진(松眞) 황포(黃浦). 구영(舊永). 농소(農所). 궁농(宮農). 두모(頭毛).로 분류하고 있다.
1914년 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時(폐합시)에 冠浦里(관포리)를 頭毛里(두모리)와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를 1區(구)로 頭毛里(두모리)를 2區(구)로 고쳐서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編入(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巨濟郡(거제군)이 復舊(복구)됨에 따라, 巨濟郡(거제군)에 編入(편입) 되었다가. 인구 증가에 따라 巨濟市(거제시)로 승격되어 거제시 장목면에 속한다. ◉▶冠浦里(관포리) <갓개, 관포, 저포,里(리)> 본래(本來) 거제군(巨濟郡) 장목면(長木面)의 지역(地域)으로, 지형(地形)이 갓 처럼 생겼으므로, 또는 관포(冠浦), 저포(這浦)라하였는데, 1914년 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時(폐합시)에 杜毛里(두모리)를,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를 冠浦里(관포리)로 하여, 頭毛里(두모리)를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라하고, 冠浦(관포)를 1區(1구)로, 頭毛(두모)를 2區(2구)로 하여,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3년 거제군(巨濟郡)이 復舊(복구)되어 거제군(巨濟郡)에 편입(編入)되었다.
◉ 장목면지(長木面誌)를 쓴 작가는 우수개 소리라고 일축(一蹴) 하였는데, 타지(他地) 사람이 어떻게 우리 거제(巨濟) 고향(故鄕) 문화(文化)를 잘 아느냐? 거제(巨濟)가 고향(故鄕)인 사람의 말이 맞는지 따져볼 일이다.
◉▶1849년 己酉(기유=憲宗(헌종15)년에 발행(發行)한 戶籍(호적)에 頭毛里(두모리)의 地名(지명)이 나타나고 있는데 父親(부친)께서 말씀 하시기를 口傳(구전)에 의하면 인접 마을 杜毛(두모)를 頭毛里(두모리)라 表記(표기)하니, 증조부(曾祖父)님께서 동네 어른들과 의논하기를 “這浦里(저포리)를 ” 머리위에 “갓”을 쓴다는 것을 착상하여 “갓”은 머리를 눌린다는데서, 갓 冠(관) 개포(浦)자를 사용하여 갓개 즉, 冠浦(관포)라는 同名(동명)이 오늘날까지 傳來(전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포리"는 1區(1구)로, “두모리”는 2區(2구)로, 面의(면) 行政上 (행정상) 地名(지명)으로 通用(통용) 되어왔다.증조부(曾祖父)님께서는 거제부(巨濟府) 하청면(河淸面) 마지막 면장(面長)을 奉職(봉직)하시다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일제(日帝)의 攝政(섭정)을 排斥(배척)하고, 公職(공직)을 버리시고, 나라의 장래를 항상(恒常) 걱정하시면서 書藝(서예)와 通鑑(통감)을 읽으시면서 消日(소일)하시다가 1941년 辛巳年(신사년) 陰(음) 1월 7일에, 관포리(冠浦里) 4번지에서 세상(世上)을 떠나셨다고 조부(祖父)님께서 말씀하셨고 부친(父親)께서도 늘 말씀하셨다.
하청면장(河淸面長) 재임시(在任時)에는 거제(巨濟) 7개(個)면(面) 대표(代表)로, 高宗(고종) 皇帝(황제)을 두번이나 謁見(알현)하시면서 從前(종전)의 土地稅(토지세)를 번거로운 穀物(곡물), 代身(대신) 稅錢(세전)으로 내는 法(법)을 바꾸는등 巨濟郡(거제군) 政事(정사)에 中樞的(중추적)인 一翼(일익)을 擔當(담당)하셔서 世人(세인)들은 평소에 梁 直講(양 직강:정5품의 벼슬)을 追尊(추존:추앙하고 존경)하였으며 巨濟(거제) 郡守(군수)들이 赴任(부임)시에는 꼭 찾아와서 정사를 의논했다고 전한다.
필자(筆者)의 증조부님께서는 일제(日帝)의 내정간섭(內政干涉)에 회의(懷疑)를 품고 공직(公職)에서 사임(辭任)하시고, 通鑑(통감) 읽으시고, 시(詩)를 쓰시면서, 말년(末年)을 보내셨다고 하셨다. 증조부님께서 보시던 通鑑(통감)과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언문(諺文)으로 된 옥편(玉篇)은 필자(筆者)가 물려 받아 보관 하고 있다. 이 옥편(玉篇)은 국어(國語) 국문학자(國文學者)들이 보고 연구(硏究) 해야 할 귀중(貴重)한 유산(遺産)인데, 한양(漢陽)을 두 번이나 가셔서 고종(高宗) 황제(皇帝)를 알현(謁見)하시고, 오실 때 서점(書店)에서 구입(購入)하신 것으로 옥편(玉篇)을 발행(發行)한 곳은 대구(大丘)로 기록 되어있다.당시(當時) 증조부님께서는 下人(하인)한사람을 帶同(대동)하시고 熊川(웅천:지금의 진해)까지 나룻배를 타시고, 웅천(熊川)에서 말을 타시고 한양(漢陽)까지, 석달를 걸어서 두번이나 왕래 하시면서 받으신 勅命(칙명)과, 敎旨(교지)등, 친필(親筆)등이 많았는데, 鳳九(봉구)조부님께서 관리 부주의로 때로는, 손자(孫子)들이 자기차는 놀이로 없애 버렸다,고 양기생(梁己生) 부친(父親) 양두한(梁斗漢)아저씨께서 나에게 말씀 하셨다. 그러시면서 기념으로 증조부님의 사진 한 장을 주셨다.
筆者(필자)도 본 사실이지만 斗八(두팔) 伯父(백부)님 댁에 갔더니, 증조부(曾祖父)님께서 생전(生前)에 소중히 여기시던, 所藏品(소장품)을 벽지(壁紙)로, 문(門) 종이로 사용했었다. 특히나 아까운것은 교지(敎旨), 호적(戶籍),등을 문종이로 사용했던것을 필자(筆者)도 보았는데, 부친(父親)께서 못내 哀惜(애석)해 하시면서 항상 말씀 하셨다. 내가 어렸을때는 종이가 참으로 귀해서 일본(日本)잡지나 신문(新聞)을 쓰다 남은것으로 벽을 발랐고 1950년 이전에는 일본(日本) 잡지로 이후에는 영어(英語)로된 잡지며 신문(新聞)으로 벽지로 사용했었다.
내가 어릴때는 방에 누워 있으면 천장(天障) 온통 일본(日本) 글씨였고 6,25이후에는 영어(英語) 글씨였다. 그래도 우리집은 煙草荷置場(연초하치장:담배 배급소)을 했던 관계로 담배 종이로 많이 활용하였다.
때는, 1905년 乙巳年(을사년) 5월 13일 저녁때 해적(海賊:왜구를 말함) 무리가 배 7척을 이끌고 가까운 포구(浦口)에 정박(碇泊)하여 마을 사람들의 재물(財物)을 약탈(掠奪)하고 칼을 빼어 죽인다고 위협(威脅)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지고, 막을 길이 없었다.
때마침 이 마을의 양 한종씨의 부친(父親) 양 재현씨는 본래 마을을 이끌어온 사람으로 나이도 많고 마을의 모든일을 每番(매번) 이 어른의 뜻을 따랐고, 마을 사람들도 평소에 그 어른을 존경하고 복종 했던터라, 그날 저녁도 이 소식을 듣고 혼자 집을 나와서 그 왜구(倭寇)들을 만나서 좋은 말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즈음에 갑짜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곧 바로 찌를려고 덤비니, 이 危機(위기)를 피할길이 없던차에 옆에 같이 있던 효자(孝子) 한종이 칼을 막고 호위하여 아버지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칼날에 목을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적과 용감히 싸워서 물리치고 殉節(순절)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왜적들이 바다로 도망하자 갑짜기 폭풍이 일어나 배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때 아버지는 화(禍)를 면하고 아들은 그대로 죽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양공(梁公)은 진실로 효도(孝道)하고 절의(節義)를 굳게 지킨 사람이다. 아! 적도 왜놈들은 이 凶變(흉변)을 꾸며서 두렵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도주(逃走)하여 바다에 이르렀다가 갑짜기 폭풍을 만나 엎어졌으니 그 일이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한 마을의 백성(百姓)을 대신해서 목슴을 잃으니 공의 나이 31세였고, 홀로된 부인(夫人) 윤씨(尹氏)의 뱃속에 9개월이 되는 아이가 있었으니 泳福(영복)이다.
과부(寡婦)가 된 윤씨(尹氏)는 위로 시아버님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보호하고 한편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바라는 의리를 지키고 남편을 대신하여, 10살된 아들, 영복이를 잘 키우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받들고, 효자를 잃고 효손을 두게된 경위와 과부가 된 윤씨가 시아버지를 극진히 공경하고 모신 경위를 쌍효록 자세히 기록하고, 세상에 본보기가 됨을 기념하는 쌍효비를 세우고 1920년 庚申年(경신년) 9월에 雙孝小識(쌍효소식)을 梁 柱肅(양 주숙)이 글을 책머리에 쓰고, 墓碣銘(묘갈명)이며, 道內士林稟目(도내사림품목), 雙孝記實碑銘(쌍효기실비명) 發文(발문) 雙孝文落成韻(쌍효문낙성운)등 律詩(율시) 170수(首)등을 모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남 통영군 원 거제 동부면 저구리 명사동 양씨문중 쌍효록 이야기 아래 크릭
http://blog.daum.net/bangyang/1901
251.梁萬弼(양만필) 증조부님의 律詩(율시)
一木猶能大厦支(일목유능대하지) : 한 나무라도 오히려 큰집을 지탱할수있고,
幹村今世異凡姿(간촌금세이범자) : 간촌에 지금 세상에 보기드문 자질이 나왔으니,
不嫌賊刃(불협적인) : 도적의 칼날을 협의하지 않았다.
知倫重(지윤중) : 인륜의 중함을 알고,
反捐身(반연신) : 도리어 몸을 버리니,
金値禍奇(금치화기) : 기이한 화를 당했다.
餘愛人間(여애인간) :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懸白日(현 백일) : 하늘에 매달고,
遺痕江上似當時(유흔강상사당시) : 강위에 끼친 흔적은 그 당시와 같다.
千秋源行蒼笞字(천추원행창태자) : 천추(오래고 긴세월)의 근본되는 행실은 글자에 푸른 이끼가, 끼도록 오래 전하고,
又是寒山可語碑(우시한산가어비) : 또 이 한산에 말 할만한 비가 생겼다.
長木面 冠浦 梁 萬弼 國享(장목면 관포 양 만필 국향).
號(호)가 國享(국향)이라고 기록 했고, 이때의 春秋(춘추) 육십(60) 이셨다.
尋章摘句(심장적구) - 옛 사람의 글귀를 뽑아서 詩文(시문)을 짓는다는 뜻
옥편(玉篇) 권지상(券之上)
癸丑至十三日?(계축지십삼일?) - 癸丑年(계축년:1913년) 55세때 동짓달(음력11월) 13일.
先數其点後尋其字(선수기점후심기자) - 먼저 점수(획수)를 세고 후에 글자를 찾아라.
옥편(玉篇) 권지하(券之下)
옥편(玉篇) 권지상(券之上)
取妻送恨無良挾(취처송한무량협) - 아내를 취하여 한을 보내니 진실로 가질것이 없고,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 글 가운데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구슬 같다.
옥편(玉篇) 권지(券之) 상하(上下)
不志乃知有疑乃覺(불지내지유의내각) - 뜻하지 못한것을 알게되고, 의심나는 것을 알게된다.
위 사진(寫眞)은 內從叔(내종숙- 梁斗漢(양두한) 內外分(내외분)이 좌측에 나란히 앉아 계시는 모습.
양만필(梁萬弼) 증조부(曾祖父)님 생전(生前)에 지어 사셨다는 관포리(冠浦里) 4번지 梁斗漢(양두한) 內從叔父(내종숙부)님이 現在(현재) 사시는 집으로 日帝(일제) 戶籍(호적)의 記錄(기록)은 前(전) 戶主(호주) 梁再寬(양재관) 高祖父(고조부)님의 戶籍欄(호적란)에는 慶南(경남)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이 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으로 改稱(개칭)할때에 5번지로 번지가 바뀌었고, 본래 27번지에서 83번지로 바뀌면서 5번지로 다시 바뀐 글이 나타난다.
현재(現在) 집은 1937년 7월 26일 金牙只(김아지) 戶主(호주) 相續申告(상속신고)에 의한 번지는 관포리 4번지로 記錄(기록)이 되어있다,
이집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때 공직(公職)에서 물려나신후 손수 초가삼간(草家三間)을 지으시고 막내 아들이신 鳳石(봉석:1891년 신묘년 5월 9일- 1937년 정축년 6월 10일)에게 물려준 집으로 박정희 정부에 의해 1969년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시행되어,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어, 1973년 경 새마을 운동(運動)으로 지붕을 개량한 것으로 막내 아들은 한동안 수산업(水産業)에 성공(成功)하여 집앞 바닷가에 크나큰 창고(倉庫)를 지었으나, 사업(事業) 실패후 관포(冠浦) 마을에서 구입(購入)하여 동사(洞舍)로 사용할때 1957년경에는 필자(筆者)도 이곳에서 秋夕(추석)때 연극(演劇) 공연(公演)도 하였다. 지금은 그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길이 없다.
참고: 5촌 아저씨는 직계촌수로 따지자면 從叔父(종숙부)라고 하며, 內從間(내종간) 촌수로는 內從叔(내종숙)이라고도 한다.
. 巨濟 長木面...고현에서 巨加大敎로 이어지는 58번 국지도를 따라가다가 冠浦교차로에서 巨濟北路로 내려가면 前方에 작은 바위섬을 품고 있는 冠浦 마을이 보인다. 마을 南西쪽에는 神峯山이 있고, 北東쪽에는 松津浦里의 望峯山이 마치 守護神처럼 버티고 있다.
冠浦里의 頭毛 마을은 神峯山의 머리와 머리카락을 상징하여 붙인 이름이고, 冠浦 마을은 冠浦와 頭毛 사이에 宕巾바위가 있어, 머리 위에 宕巾 그 위에 갓이라는 뜻에서 由來한 地名이라고 한다. 冠浦 마을은 防波堤로 連結되어 있고 그 가운에 鷄島가 있다.(어느 作者(작자)가 近似(근사)하게 지어서 올린 글이다.考證(고증)이 必要(필요)한 글이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관포 마을
https://www.youtube.com/watch?v=U-wLqZe5qRg
섬&섬 거제도 관포둘레길
https://www.youtube.com/watch?v=7V4yw0jtAQw
관포마을 해안길, 미역길, 김길 걷기 2
https://www.youtube.com/watch?v=7D09PvvLf6Y
^^♡♡가덕지킴이의 거제도 관포방파제 도다리낚시^^♡♡
^^♡♡ (생활낚시) 득템한날^^♡♡
https://www.youtube.com/watch?v=kWuiB4IaG4w
거제도 방파제 조황 탐사 (2017 . 12 . 10)
https://www.youtube.com/watch?v=PTebbBDIY_o
거제도 관포마을에서 한화리조트
https://www.youtube.com/watch?v=rSVWu2eZtgw
관포 아침 둘레길
https://www.youtube.com/watch?v=h-xKu8Wpqgw
<冠浦(관포)와 鷄島(계도)>
<冠浦(관포) 鷄島(계도) 및 望峯山(망봉산)>
<望峯山(망봉산)과 鷄島(계도=달섬(닭섬)>
望峯山(망봉산)의 地名(지명) 由來(유래)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때는 그해 5월에 日本(일본)이 巨濟島(거제도)를 陷落(함락)하여, 日本(일본)의 巢窟(소굴)이 되었다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끝나고 그 후에 우리 祖上(조상)님들이 倭亂(왜란)을 對備(대비)하여 이곳에서 望(망)을 보다가 倭賊(외적) 즉 日本(일본) 艦隊(함대)가 나타나면 烽火(봉화)불로 危急(위급)함을 알리던 烽火山(봉화산)에서 由來(유래)한 것으로 우리가 어렸을때도 先祖(선조) 때 부터 말씀하신것을 할아버님, 父親(부친)께서 말씀 하셔서 恒常(항상) 불렀다.
<望峯山(망봉사)과 巨加大橋(거가대교)>
달섬과 등밑테
등밑테에서 바라본 望峯山(망봉산)
冠浦(관포) 마을을 지나 잠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農所(농소)몽돌 海邊(해변)이 나온다. 農所(농소)몽돌해변은 海水浴場(헤수욕장)의 길이가 2km 정도로, 巨濟島(거제도)의 3대 몽돌 海水浴場(해수욕장) 중 規模(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海邊(해변)에 작고 고운 黑眞珠(흑진주) 빛깔의 몽돌이 깔려 있어 海水浴(해구욕)과 함께 몽돌찜질로 有名(유명)하다.
<중밭골봉과 한화리조트 및 거가대교>
<농소몽돌해변과 한화리조트 및 어울끝>
농소몽돌해변을 지나 계속해서 58번 국지도를 타고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 전망대에 올라서면 빼어난 경관의 거가대교를 조망할 수 있다. 거가대교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동의 가덕도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를 연결하는 길이 8.2km의 다리를 말한다.
이 다리는 해상의 사장교와 해저의 침매터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덕도에서 대죽도 구간은 해저침매터널이고, 대죽도에서 중죽도와 저도를 거쳐 유호리로 이어지는 구간은 2개의 사장교와 4개의 접속교 및 육상터널로 구성되어 있다.
전망대를 지나 잠시 내려가면 거가대교를 측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유호리가 나온다. 유호리는 본래 유포로, 버르대, 버들개, 버드래라고도 하였으며, 바다 건너 저도가 파고를 막아주고 있어 마치 호수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유호리는 상유 마을과 하유 마을 및 저도로 구성되어 있고, 유호리와 이수도 사이에 있는 바다는 대구의 산란지역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유 마을의 방파제에 올라서면 부산신항만과 가덕도 및 거가대교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巨加大橋(거가대교)와 猪島(저도) 및 加德島(가덕도)>
<下柳(하유)防波堤(방파제)와 加德島(가덕도)>
<巨濟(거제) 닭섬과 冠浦(관포)
海岸(해안) 防波堤(벙파제)와
冠浦港(관포항)>
<加德島(가덕도)와 猪島(저도) 및 巨加大橋(거가대교)>
<巨加大橋(거가대교)>
<猪島(저도)와 巨加大橋(거가대교) 및 上柳(상유) 마을>
柳湖里(유호리)를 지나면 巨濟島(거제도) 最北端(최북단)에 있는 舊永(구영)海水浴場(해수욕장)과 舊永(구영) 防波堤(방파제)가 나온다. 이곳은 傾斜(경사)가 婉娩(완만)하고 水深(수심)이 얕으며 포플러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海軍(해군) 專用(전용)
海水浴場(해수욕장)으로 使用(사용)되고 있다 한다.
<구영해수욕장과 장복산 및 불모산>
구영해수욕장을 지나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면 황토로 유명한 황포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홍수 때 황토가 흘러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물을 머금을 수가 없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황포라 불렀다 한다.
<黃浦(황포) 마을>
황포 마을을 지나 다시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목면의 면소재지이자 장목면의 마지막 여정지인 장목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임진왜란과 러일전쟁 당시에 해군기지로 이용한 장목항과 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가 있다. 장목진이 있어 장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장목항과 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七川島(칠천도)와 七川橋(칠천교)>
<七川島(칠천도)와 七川橋(칠천교)
m.blog.naver.com/mcl9999/221297913196
거가대교 개통 후 거제시 발전전략은 산업과 관광이 공존하는 5차산업형 도시건설이라는 연구보고서가 나와 눈길을 끈다.
이 보고서는 거가대교 개통 3개월을 앞두고 거제시에 들어온 자료라 시가 이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지 주목된다. 그러나 개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 보고서가 얼마만큼 거제시 발전에 도움이 되고, 또 거가대교 개통의 대비책이 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민들도 적지 않다. 사후약방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한국자치연구원이 지난 9일 거제시에 제출한 이 보고서는 223페이지에 걸쳐 거제시 발전전략 방향, 거가대교 완공에 따른 영향분석, 거가대교 완공에 따른 거제형 관광개발 전략구상, 정책과 제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새거제신문은 지난주 부산발전연구원의 ‘거가대교 개통에 따른 변화와 전망’ 보고서에 이어 거제시가 용역 의뢰한 한국공공자치연구원의 ‘거가대교 완공에 따른 지역개발계획 수립’ 보고서를 소개한다.
사파이어 아일랜드’ 새 브랜드 창조 주문
거제시가 지난 2월 사단법인 한국공공자치연구원에 용역의뢰한 ‘거가대교 완공에 따른 지역개발계획’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고·근·현대의 역사가 공존하는 복합형 관광도시, 체험·생태·휴양이 어우러진 융합형 관광도시, 산업·관광·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한 벨트형 관광도시, 시 전체가 테마파트가 되는 세계 최대 테마파크형 관광도시 등을 4대목표로 산업과 관광이 공존하는 5차산업형 도시 거제건설의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거제형 관광개발 전략으로 거제방문 관광객의 체류시간을 연장시켜 관광수익을 증대할 필요가 있다며, 체류시간 연장을 위해 ‘사파이어 아일랜드’ 브랜드 창조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또 시 전체 테마의 일관성을 부여하고, 자연경관자원과 재미·체험을 결합시키는 ‘1+1전략’ 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
‘사파이어 아일랜드’는 기존 블루시티 브랜드와 일맥상통할 뿐 아니라 청량·시원·편안함을 갖춘 고품격 웰빙휴양도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고, 무형인 ‘블루’보다 유형인 ‘사파이어’가 홍보수단으로도 뛰어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여기에 ‘시티(도시)’의 복잡함 등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 ‘아일랜드(섬)’의 낭만과 환상, 안락, 휴식 등의 이미지가 관광도시 거제시 이미지 제고에 더 보탬이 된다고 설명했다.
관광산업 재검토 우선순위 핵심사업 선정해야
이어 거제시 브랜드 파워 제고를 위해 거제만의 장점을 살린 독특한 아이템과 참신한 관광시스템을 구축하고 현재 추진 중인 관광산업의 전면 재검토로 우선순위를 분석해 핵심사업을 선정, 집중적으로 육성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밖에도 시 전체를 테마파크화 하는 전략·운영방식으로, 합리적이고 일관된 동선을 제공하고 자유이용권 또는 5개 시설 이용권 등을 도입, 방문객의 체류시간을 연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광·경영지표에 따른 사업우선순위 종합분석 결과에 따르면 1순위는 거가대교 관광지 조성, 장목관광지 조성, 거제해양특구 조성, 조선테마공원 조성, 거제돌핀파크 조성사업 등이며 2순위는 남부해안도로 해안테마공원 조성, 유계 메이페어리조트 조성, 지세포 해양레포츠타운 조성, 포로수용소테마파크 조성, 지세포 마리나 유치, 새공원 조성, 해금강집단시설지구 조성사업 등을 꼽았다.
올레길 등 관광상품 개발 시급
특히 발전권역을 공간구조로 나눠 ‘물의 존’(일운 남부)을 휴양관광권역으로, ‘불의 존’(장승포 마전 능포 아주 장평)을 조선산업권역으로, ‘흙의 존’(동부 거제 둔덕 사등)을 생태관광권역으로, ‘공기의 존’(연초 하청 장목 일운 일부)을 체험관광권역으로, ‘빛의 존’(옥포 고현 상문 수양)을 중심상업권역으로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시도도 보였다.
이와 함께 5대 핵심 선도사업으로 거제테마파크 ‘사파이어 아일랜드’ 조성, 사파이어 블루리조트 조성, 거제형 스튜디오 ‘사파이어우드’ 조성, 자매도시를 위한 ‘국제 스트리트’ 조성, 사파이어 빌리지(거제형 슬로시티) 조성사업 등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전략으로 고현동 및 문예회관 인근의 사파이어 스트리트(빛의 거리) 조성, 장목면 일대의 매직분수 조성, 체험관광을 이한 케이블카, 약초·산나물 투어 관광브랜드화 등 12개 사업을 검토할 것도 주문했다.
보고서는 정책과제로 거제만의 특성 사업 발굴(해안선 자전거 일주도로, 올레길 등 조성),과 첨단형 고급 실버타운을 포함한 건강도시 조성, 특산물을 활용한 소득방안 창출(전국 최대 건우물 판매장 설치 등), 교통문제 해결, 부산과 울산 등 거제를 연계하는 연담도시 관점의 관광계획 수립, 제도 및 규제 완화 방안 연구 등을 제언했다.
시, 용역결과 검토 11월부터 사업 착수 계획
또 보고서는 거제시의 강점으로 다양한 관광자원과 삼성·대우 등 발전된 산업시설, 높은 출산율 및 인구증가, 경제력, 온난한 해양성 기후, 풍부한 생태자원 및 역사자원 등을 강점으로 꼽았다.
반면 조선업에 의존한 경제적 불안감, 교육 문화 유통 의료시설 미흡, 거가대교 개통에 따른 긍정·부정적 영향 동시 상존, 관광마인드 부족에 따른 경쟁력 약화, 토착민과의 동질성 미흡, 거제명품브랜드 미약, 개발과 보존에 대한 이해관계자의 견해 차이 등을 약점으로 분석, 이 부분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거제시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점쳐지고 있다.
거제시는 오는 10월까지 이번 용역결과를 분석·검토해 추진여부 등을 확정, 11월부터 사업시행에 착수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시는 거가대교 개통에 대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관광발전전략 수립을 위해 지난 2월부터 용역비 5490만원을 들여 사단법인 한국공공자치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