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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1-12동방박사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떡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은 야곱이 그의 아내 라헬을 장사지냈던 곳이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은 유대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내 세울것도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여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도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들레헴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이곳을 방문하고, 또 가보고 싶어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뉴욕보다 더 큰 마을입니다. 런던보다, 파리보다 더 큰 마을이고, 예루살렘보다 더 큰 마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온 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돈이 많고, 지식도 풍성하고, 거기에다가 권력마저 지닌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너무도 왜소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아니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서 이 IMF시대에 그래도 이웃집 아저씨는 직장에 잘 다니고 있는데 내 남편은 실직을 당해서, 또 사업이 부도의 위기에 몰려서, 출근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는 모습을 볼 때 “내 인생은 왜 이리 지지리도 못났나?”하면서 한숨 쉴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남편을 만나지 못해 이 고생하는가?”하고 신세타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돈이 많고, 지식이 뛰어나고, 사업이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그 인생이 성공한 인생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외적인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할찌라도 예수가 그 인생 안에 없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비록 돈도 남들만큼 없고, 지식도 남들만큼 갖추지 못하고, 사업은 언제나 어려워서 허덕여도 예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권력도 있지만 예수없이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예수를 모신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각각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먼저 헤롯왕입니다.
그는 본래 에돔사람이 었습니다, 즉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시이저에 의해 주전 47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주전 40년에는 분봉왕으로 임명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이 당시 헤롯은 비록 로마에 의해 분봉왕으로 임명된 왕이었지만 그 권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성전을 지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이용하여 방해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그 예로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장모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장남과 다른 두 아들도 죽였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그의 권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입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헤롯은 훗날 자신이 죽을 때,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유언인즉 “예루살렘 시민중에 가장 존경받는 사람을 한 사람 선택해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를 같이 죽이라”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죽음에 아무도 눈물을 흘리고 애곡할 사람이 없을테니까 자기가 죽는 순간에 그 사람을 죽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헤롯은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을 지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어느 누구도 이 헤롯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는 예수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없어야 자신의 왕위가 굳건해지리라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를 찾거든 자신도 경배할 수 있게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했지만 실상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없이 단지 부와 권력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훌륭한 것 같고,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는지 몰라도 그들은 결코 큰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예를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내 가족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과연 나는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삶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예수는 잠시 뒤로 하더라도 가정의 경제가 우선 안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도 여러분! 예수없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예수없이 안정된 사업을 추구하는 것으로 평안한 삶이 보장될까요? 예수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외치는 사람을 보면서 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치는 사람을 보면서 모두들 부러워합니다. 심지어 세상은 그 사람들을 보고 ‘거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가 없는 사람은 결코 큰 사람일 수 없습니다,
어느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물질 중심적인 성향을 비판하면서 만든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제목은 ‘라면신경’입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구수하사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는 라면이시여 라면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의 자매품 쇠고기 라면을 믿사오니 이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인들의 손을 거쳐 식순이의 손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사 끓는 물에 죽으시고 끓은지 3분만에 상에 오르사 유능하신 젓가락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자리로서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시니라. 라면이 입속에 들어가는 것과 입속에서 소화되는 것과 항문을 통해서 거름되는 것을 영원히 믿사옵나이다. 라면
이 시대의 물질 숭배사상을 잘 반영한 글이라고 저도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아도, 권력을 소유해도 예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헤롯은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예수가 그에게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보면 별로 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많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역시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척척 잘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혼자서 예수를 믿는 분들의 고민이 이런 것입니다, 남편에게 교회 가자고 말하면 “교회에 안가도 성경에 대해 당신보다 더 잘안다.”고 말한답니다.
남편이 성경을 가지고 이 말, 저말, 끄집어 내면 제대로 대답도 못한채, 그냥 혼자서 교회에 온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예수를 마음에 모시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예수를 지식적으로 많이 알아도 그 마음에 예수를 모시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그 교회는 여러모로 어렵기만 합니다, 예수가 그 마음중심에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만으로 가득찬 사람들, 혹은 예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만 자랑하는 사람들, 혹은 예수를 믿은 연수만 자랑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는 언제나 시끄럽고, 괴로운 일만 생깁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는 비록 자랑할 것이 없다해도 그 삶의 중심이 언제나 예수로 가득찬 사람들이 중심이 되면 그 교회는 언제나 밝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참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그것이 부러워서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삶보다는 세상적인 지식을 쌓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그 지식 때문에 예수를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세상지식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안달하면서 신앙교육을 등한시 하는 부모는 자녀의 평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입니다. 그렇게 해서 훗날 자식이 많은 지식을 쌓아서 “교수님, 박사님” 소리를 들어도 그 인생은 의미없는 인생입니다.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 큰 사람처럼 보일 것 같지만 실상은 작은 사람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머물렀던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이곳으로 왔습니다. 올때마다 그 제사장앞에서 머리를 숙여서 경의를 표했습니다. 큰도시에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심지어 헤롯왕도 제사장들에게 질문할 정도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이라는 큰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어도 그들의 인생은 허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들 마음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들이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술사라 하기도 합니다, 어쨋든 이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 모두가 이방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들이 예수를 찾아 먼 길을 떠나 마침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동방박사들은 헤롯이나 제사장 혹은 서기관과 견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처럼 권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부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도시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진일이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누구보다도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보다, 제사장이나 서기관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께 나아가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께 경배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계신 곳을 찾기 위해서 우선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가족들과 잠시 떨어지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또 예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를 연상할 때, 언제나 낙타를 타고별을 보면서 길을 가고 있는 낭만적인 동방박사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낙타를 타고 갔다는 기록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험한 산을 넘고, 깊은 물도 건넜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동반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마침내 예수를 찾아나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때때로 이런 순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우리들에게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힘든 여행이 싫어서 편안하게 큰 도시에 머물러 있으려합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부유하게, 권력도 가지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 경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한가지 예수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지식과 부와 명예와 힘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예수를 모시고 있는 사람, 예수님께 경배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 미국정부는 군함을 보내어 그 사람의 유해를 미국으로 가져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유해가 미국에 도착하는 날, 뉴욕 시가지에는 역사상 최고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군악대의 연주소리, 군부대의 예포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의 미국대통령과 국무위원들 뉴욕시장이 모두 나와 그 유해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주인공이 위대한 정치가도 위대한 외교가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훌륭한 사업가도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장군도, 노벨상을 수상한자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한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환영을 받게 된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가 작사했던 한 곡의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오라 하여도 내 쉴곳은 작은 집 내집뿐이리” 홈 스위트 홈을 작사한 존 하워드 페인의 유해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미국인의 가슴에 영원한 거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방박사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경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작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어떤 청년이 무디 선생에게 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무디 선생은 그 청년을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벼랑 끝에 있는 큰 나무를 가르치며 이 나무에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리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저 무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이때 무디 선생은 다시 청년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그 손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이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수십 미터나 되는 벼랑아래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붙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기만 하면 당장에 떨어져서 바위에 몇 번 부딪치고 강물 속으로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은 ‘선생님! 이곳에서 나를 아무도 모르게 죽일 작정이십니까?’ 하며 화를 벌컥 냈습니다. 이때 무디선생은 그 청년을 잘 부축을 하여 안전한 곳으로 내려놓고 하는 말이 “당신이 내게 물은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으면 살고 놓으면 죽을 줄 아는 것 같이 당신이 예수를 믿고 의지하며 붙잡고 있으면 살 수 있고, 예수를 놓으면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황금과도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예>교육자이시며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 33인대표의 한사람인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감옥 생활을 마치시고 죽을 때 제자들에게 유언을 하기를 “내가 죽으면 나를 땅에다 묻지 말고 내 뼈는 오산학교의 박물관에 표본으로 써 달라” 고 부탁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③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나라를 위하여 몸 바쳐 독립운동을 하였고 죽어서는 모교에 자신의 유골을 바치는 이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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