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이있는시 - 김남조 / 사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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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6.22. 23:24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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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수가 있었습니다.
상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날 병든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내 영혼의 철사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 만번 이상하여라
다른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내 한평생 골수에 전화오는
그대 음성
죽기전에 단 한번 물어 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 지를......
연가...
잠든 솔숲에 머문 달빛처럼이나
슬픔이 가라앉아 평화로운 미소되게 하소서
깍아 세운 돌기둥에
비스듬히 기운 연지빛 노을의
그와 같은 그리움일지라도
오히려 말 없는 당신과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본시 슬픔과 가난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짙푸른 수심일수록
더욱 연연히 붉은 산호의 마음을
꽃밭처럼 가꾸게 하소서
눈물과 말을 가져
내 마음을 당신께 알리려던 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덜했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저
돌과 같은 침묵만이
나의 전부이오니
잊음과 단잠 속에 홀로 감미로운
묘지의 큰 나무를 닮아
앞으론 묵도와 축원에 넘쳐
깊이 속으로만 넘쳐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여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이도 없었다. 이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이가 없었다. 내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설일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출처] 김남조 / 사랑 외|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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