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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잇빨중사홈피 ★ 잇빨기행여단 원문보기 글쓴이: 해의장
어제 우연히 YouTube를 보다가 2차 세계대전 일본군 전쟁영웅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아니고 텍스트로 줄줄 올라오는 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차세계 대전 일본군 영웅을 소개한 책이나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YouTube로 본 일본군 영웅 이야기는 나름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어제 유튜브로 본 영상은 '사이보그'니 '람보'니 신격화한 단어를 쓰고 있어서
긴가민가하고 오늘 검색해 보았습니다.
아래는 일본사이트 검색한 글을 번역기 팡팡 돌리고 대충 두드려 맞추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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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舩坂弘 후나사가 히로시、1920년 10월 30일 - 2006년 2월 11일)
약력
후나사가 히로시는 일본 육군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군조(軍曹). 안가울 전투에서 활약했다. 전후 大盛堂 서점을 열고 대표 이사 회장을 지냈다.
전일본 총검도 연맹 참여, 남태평양 위령 협회 이사, 大盛堂 도장 館主. 텍사스 명예 시민장 수여.
그는 백병전에서 뛰어난 전과로 개인으로는 유일하게 '전사 총서 "에 이름이 실려있다.
특별 총검술 휘장, 특별 사격 휘장, 검도 教士 육단, 거합도 錬士. 총검도 錬士 등 무도와 사격에 발군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1 생애
1.1 육군에 입대하기 전
1.2 육군에 입대
1.3 팔라우 · 안가울 섬에서의 전투
1.4 포로 수용소 페리 류섬 ~ 미국 본토
1.5 귀국
1.6 大盛堂 서점을 개업
1.7 검도로
1.8 위령비 건립
육군에 입대하기 전
토치기현 上都賀 서쪽 마을 (현재 도치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 났지만 어려서부터 인근 골목 대장이었다.
소학교와 심상고등소학교를 마치고 공민 학교를 졸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와세다중학교 강의록으로 독학했다.
그 노력으로 전문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인 1939 년에는 만주와 몽고학교 전문부에 입학하여 3 년간 학습을 계속했다.
육군에 입대
1941 년 3 월 우츠노미야 제 36 부대에 현역 입대한다.
그 직후 만주로 건너가 치치하얼 제 219 부대에 배속된다. 치치 얼 제 219 부대는 우츠노미야 보병 제 59 연대를 주축으로 한 부대이며, 가상적인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해 부대는 노몬 부근, 샹, 논쟌, 하이라얼 일대의 국경 경비대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히로시는 남자 4 남매 중 셋째 아들이며, 전원이 종군하고 있었지만,이 때 이미 아래 동생이 전사했다
(척탄통)
(擲弾筒 척탄통)
히로시는 제 59 연대 제 1 대대 1 중대 (통칭 이시하라 중대) 척탄통 분대에 배속되어,
뒤에 나올 안가울 전투에서는 15명을 인솔하는 척탄통 분대장으로 지휘하게 된다.
검도와 총검술은 당시부터 유단자였으며, 특히 총검술에 뛰어났던 히로시는 치치하얼의 연병장에서 훈련 중에 육군 도야마 학교 출신의 준위로 "네 총검술은 허리만 움직여도 3 단에 필적한다 "고 보장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또한 히로시는 척탄통 분대장으로 있었지만, 중대 최고의 소총병이기도했다.
입대 이후 이미 사격은 30 여 차례의 상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치치하얼 제 219 부대에서는 "사격 휘장과 총검술 휘장 두 가지를 동시에 받은 사람은 유일무이하게 히로시 뿐이라고 이름세를 날리며 유명했다.
전황의 악화로 인해 1944년 3월 1일 제 59 연대도 남방작전 동원령이 내려진다.
안가울(Angaur) 섬에 도착한 것은 같은 해 4 월 28 일이었다.
남방 동원령이 내려 졌을 때 히로시는 제대를 눈앞에두고 있었지만, 급박한 전황은 제대가 용납될 리가 없고,
대대 주력과 함께 안가울 섬에 상륙하게된다. 당시 히로시는 23 세였다.
히로시는 남자 4 남매 중 셋째 아들이며, 형제 모두가 종군하고 있었지만 이 때 이미 아래 동생이 전사했다
중대에서 가장 모범적인 병사로 일찌감치 점찍혀 부하들에게 얻는 덕망도 큰 편이었다.
팔라우, 안가울 섬에서의 전투
안가울 전투(Battle of Angaur, 1944년 9월 17일 – 10월 22일)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의 마지막 전투이다. 비행장 건설을 의도한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를 끝내고 상륙한 이틀 뒤인 9월 17일에 상륙전을 시작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9월 30일에 섬을 전면 점령했다. 이 전투는 1944년 6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진행된 ‘태평양 전역 작전’과 ‘막다른 궁지 II 작전’에서 약탈자 작전으로 알려진 더 큰 공격 작전의 일부였다.
미군 측은 제81보병사단 321, 322연대 10,000명,
일본군은 은 제14보병사단 제29보병 연대 1400명으로 전투가 벌어지지만
이 전투에서 미군 전사 260명, 부상 1,354명 이 발생하지만
일본군은 전사 1,350명으로 거의 괴멸하고 겨우 포로 50명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
이 전투에서 히로시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된다.
척탄통과 박격포로 미군 200 여명을 살상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군들의 상륙작전으로 중대가 괴멸한 가운데 히로시는 척탕통이 벌겋게 될 때까지 척탄통을 계속해서 쏘면서
후퇴하게 된다. 후퇴 후 대대 잔존 병력들과 섬의 북서쪽의 동굴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3일 째 되는 날, 히로시도 미군의 공세 앞에 왼쪽 대퇴부에 열상을 입고
미군의 집중 사격으로 꼼짝하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마침내 온 군의관은 상처를 힐끗 보고는 자결 용 수류탄을 건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한다.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히로시는 열상을 입은 다리에 붕대 대신 일장기로 지혈하고
밤새 포복하여 굴 진지로 돌아온다.
그 다음 날은 왼발을 질질 끌면서 걸을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그 후에도 거의 죽을 정도로 부상을 몇 차례 더 겪고
몇 번이나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음날은 어느 정도는 움질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히로시는 "타고난 체질이 상처가 낫기 쉬운 체질이었음이 도움 된 것 같다"고 나름대로 그 사유를 밝혔다.
히로시는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도 권총 3연사로 3 명의 미군을 쓰러 뜨리거나
미군에게서 노획한 기관단총으로 3 명을 한꺼번에 사살하고
왼발과 양팔의 부상 상태에서 총검으로 1 명을 찌르고,
들고있던 기관단총을 미군의 턱 부분에 던져 찔러 죽이는 등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전을 계속했다.
실제로 히로시의 모습을 본 부대원들로부터 '불사신의 분대장', '악마의 분대장'이라 칭해 질 정도였다
그러나 식량도 물도 없는 전장에서의 전투는 일본군은 서서히 사그라져 간다.
동굴 안 은신처에서는 자결용 수류탄을 요구하는 중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생지옥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히로시 자신도 복부에 盲貫총상(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체내에 그대로 있는 총상)의 중상을 입고
겨우 포복으로 움질일 수 정도 였다.
총상의 상처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것을 보고
이러다가는 결국에는 구더기에 히로시 자신이 잡아 먹혀 죽을 정도라는 생각에
자결용 수류탄의 핀을 뽑지만 수류탄은 불발이었다.
결국 상처의 구더기는 권총 탄의 화약을 성처에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인다.
하지만, 이때 심한 통증으로 의식을 잃고 반나절 정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히로시는 자결 미수로 망연자실하면서 왜 죽을 수 없는가,
죽기 전에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깊은 절망감을 맛 보았다
전우도 속속 쓰러지고 부대도 괴멸하기에 이르자,
히로시는 죽기 전에 미군 사령부에 단신으로 침투하여 미군 사령관을 사살하고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수류탄 6 발과 권총 1정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포복으로 미군 전초 진지를 돌파하며
4 일째에는 미군 지휘소 텐트 들이 밀집된 곳 20 미터 지점까지 침투했다.
미군 지휘소 텐트 20미터 지점까지 침투할 때의 히로시 몸상태는
부상은 전투 첫날부터 세어 크고 작은 부상 24여 군데에 였으며,
이 가운데 중상은 왼쪽 대퇴부 열상, 왼쪽 상박부 관통 총상 2 개, 머리 타박상,
왼쪽 복부 盲貫 총상 5 개, 또한 오른쪽 어깨 염좌, 오른쪽 발목 탈구를 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포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팔꿈치와 다리는 옷이 마모되어 너덜너덜한 상태였으며,
연일 전투에 의한 화상과 전신 20 개소에 파고든 포탄 파편에 의해 마치 유령 같았다 한다.
히로시는 미군 지휘관들이 지휘소 텐트에 집합 할 때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군 지휘소 주변에는 보병 6 개 대대, 전차 1 개 대대, 포병 6개 중대와 고사 기관포 대대 등
총 1 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히로시는 이러한 지휘관들이 지휘소 텐트에 모일 때를 노려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히로시는 지프가 속속 사령부에 도착하는 것을보고 오른손에 수류탄의 안전 핀을 뽑아 쥐고,
왼손에는 권총을 가지고 마지막 남아있는 힘을 짜내어 갑자기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괴상한 차림새의 일본군을 발견한 미군도 잠시 멍해져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한다.
미군의 동요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히로시는 사령부를 목표로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목을 가격 당해 졸도하고,
전사로 처리된다.
달려온 미군 군의관은 한낱 일본군 전사자로 생각하고 히로시를 야전 병원에 옮겼다.
이 때, 군의관은 수류탄과 권총을 쥔 히로시의 굳은 손가락을 하나 하나 풀면서
구경하고 있던 미군을 향해
"이것이 하라키리다. 일본 사무라이 만이 할 수있는 용감한 죽음의 한 장면이다"라고 말하고있다.
그러나 히로시는 3일 후 미군 야전 병원에서 소생한다.
당초 히로시는 정신을 잃은 것으로 착각하고 주위의 의료기구를 때려 부수고 급하게 달려온 MP의 총구에 자신의 몸을 내 던지면 "쏴라! 죽여라! 빨리 죽여라!"고 외쳐다 한다.
이 이상한 일본 병사의 이야기는 안가울 미군 사이에서 순식간에 화제가되어, 전설화되었다.
히로시의 무모한 계획에는 황당해 하면서도 대부분은 그 용기만큼은 높이 사 '용감한 군인 "이란 이름을 선물했다.
안가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인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 로버트 E 테일러는 전후 히로시와의 서신에서
"당신의 그 때의 용감한 행동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본인 전체의 자랑으로 남을 것입니다 "라고 찬사의 말을 보내고있다.
포로 수용소 페리 류섬 ~ 미국 본토
그 후 며칠간의 포로 신문을 거쳐 히로시는 페리 류 섬의 포로 수용소로 옮겨진다.
이 때 이미 "전설의 페리 류섬 용감한 병사"로 알려져있어
미군들 사이에서는
특히 "후쿠다 (히로시는 포로로 잡혔을 때 후쿠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의 언동에 주의 하라고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강화한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도 히로시의 투지는 줄지 않는다.
페리 류에 포로 수용소에 옮겨진 2 일째에는
미군들에게는 히로시의 상태가 죽을 정도의 중상으로 생각되어져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다.
1000 미터를 은밀히 움직여 일본군의 시체를 뒤져 총알에서 빼낸 소총탄 화약으로 미군 탄약고 폭파에 성공한다.
사실 이 때 히로시의 몸 상태는 죽음 직전으로 극도의 영양 실조와 출혈에 의해 두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미군 탄약고를 폭파 한 후에는 원래 왔던 길을 걸어서 수용소로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 점호에 참여한다.
대대적 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탄약고가 날아간 원인은 밝혀 진 것 없이
미군 기록에는 "원인 불명의 폭발"에 의한 손실로 밖에 적혀 있지 않다
또한 히로시는 2 회에 걸쳐 비행장을 불지를 것을 계획하지만, 이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F.V. 크렌쇼 상병 (F.V.CRENSHAW, 생몰년 미상)의 저지로 실패하게된다.
이후 종전까지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텍사스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46년에 귀국한다.
개인의 전투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전사총서에 실려있다.
전사총서 "육군 작전 역사 2 권」에는
"히로시 군조는 격전 후 중상을 입고도 마지막까지 미군 사령관을 사살하려고 했지만, ─ 중략 ─
사흘 동안 의식 불명과 죽음의 세계를 방황하고 미군에 의해 극진히 간호를 받고 소생하여
쇼와 이십일 년 정월 기적적으로 재향 귀국했다 " 고 적혀있다.
귀국
안가울 섬 수비대가 옥쇄한 것은 1944년 10월 19일이다.
히로시 본가에 전사 통보가 된 것은 그해 12 월 30 일.
따라서 히로시는 1946 년에 귀국 할 때까지 1년 3 개월 동안 호적상으로는 사망으로 되어 있었다.
고향에서는 당연히 히로시는 전사 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며, 히로시가 고향에 돌아 가장 먼저 행한 것은
"마사나가 히로시 무덤 '이라고 적힌 묘비를 뽑는 것이었다 한다.
군복을 입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조상에게 생환보고를 하려고 불단에 합장 한 때,
새로운 위패에는 "용감한 남해의 사무라이 히로시 님"라고 적혀있어 놀랐다고 "순국의 불꽃 " 에 적고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아 얼마 동안 의심의 눈으로 쳐다 보았다고 한다.
大盛堂 서점을 개업
전후 부흥기에 전쟁의 강렬한 경험과
포로생활할 때 히로시 눈으로 본 미국의 모든 선진성을 배우는 것이 일본의 산업, 문화, 교육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서점 경영을 생각한다.
히로시는 도쿄 시부야 역 앞에 한 평 정도의 작은 상점을 열고 돌아온 전사자로
여생을 서점 경영으로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일본에서 처음하는 시도된 서점 경영 방식으로 건물 전체를 서점을로 모두 꾸몄다.
"책 백화점 大盛堂 서점"의 창설로 이어진 것이다.
검도
전후 히로시는 검도 教士 육단까지 승단했다.
검도 五段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와 검도를 통해 친분이있어 히로시의 자서전인
「영령의 절규 - 옥쇄 섬 안가울 "의 서문은 미시마 유키오가 썼다.
(앞 줄 왼쪽이 미시마 유키오, 뒷 줄 왼쪽이 히로시)
1970 년 미시마가 자결했을 때
하라끼리에 사용 된 미시마의 칼은 히로시가 선물 한 것이었다.
이 경위를 자신의 저서에 자세히 기록하고있다.
또한 히로시는 당시 80 세의 範士 십단 · 모치다 세이지와 연습 할 기회를 얻어 처음 모치다에 도전했지만,
상대가되지 않았다고한다.
이 경험을 자신의 저서 「쇼와의 검성 · 모치다 세이지」에서
"불가사의였다. 範士 앞에서 죽도를 사이에 두고 아직 약간의 시간 밖에 경과하지 않는데,
내 얼굴에는 땀이 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온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숨이 가파 더 이상 힘들어 시합을 중단했다 ... "라고 말했다.
위령비 건립
히로시는 "영령의 절규"후기에 안가울 섬에 진혼 위령비를 건립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을 건 임무라고 적었다.
이것은 후에 책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성금이 답지하고, 이후 자서전 인세를 들여 페리 류,
가도부스, 코 로르, 괌 등의 섬들도 속속 위령비를 건립했다.
위령비 비문에는
"고귀한 평화의 주춧돌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수비대 장병의 명복을 빕니다. 영원히 그 공적을 전승하고 감사와 敬仰의 마코토 여기에 바칩니다"라고 새겨져있다.
위령비를 건립 후 지금까지의 저작권이나 후에 집필 한 책에서 나온 로열티를
"세계의 사람들에게 도움 주었으면한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사용하지 않고 전액을 국제 적십자사에 기부하고있다.
또한 서점 경영의 분주함 속에서도, 안가울 섬에서 위령제는 매년 빠지지 않고 있다.
그 유족을 모집하고 위령단을 조직해 현지 성묘를 인솔하고, 팔라우 제도 원주민에 대한 원조와 현지와 일본 간의 교류 개발에 진력. 수년간 전몰자의 조사와 유족 연락 등등 왕성한 활동으로 그 인생을 바쳤다.
히로시를 아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영령 '이라고 그를 기리고 있다.
2006 년 2 월 11 일, 신부전으로 85 세를 일기로 사망
저서
"영령의 절규 - 옥쇄 섬 안가울파이터 '(빛 사람 사는 NF 문고)
"영령의 절규 - 옥쇄 섬 안가울 "(문예 춘추 1966 년 12 월) 개제)
"벚꽃 페리 류섬 동굴 전' (마이니치 신문사 1967 년 8 월)
"옥쇄 암호화 電文에서 철자 팔라우 사투」(요미우리 신문 1968 년 8 월)
'이오 지마 - 아! 쿠리바야시 군단」(코단샤 1968 년 8 월)
"순국 불꽃」(潮出版社 1971 년 3 월)
"성경과 칼 - 태평양의 우정」(문예 춘추 1971 년 10 월)
"関노 손자 여섯 -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의 비밀」(코우 분사 카파 · 북스, 1972 년)
쇼와의 검성 · 모치다 세이지」(코단샤, 1975 년)
"비화 팔라우 파이터 '(빛 사람 사는 NF 문고)
("옥쇄 전의 고도에 원인은 없었다 "(빛 사람 사는 1977 년) 개제)
"돌의 훈장"(북양 사, 1978 년 8 월)
"멸망 尽争 속 전사 옥쇄 섬 팔라우 · 안가울"(코단샤 1979 년 5 월)
'피의 바람 이백 세 고원」(叢文社 1980 년 8 월)
"페리 류섬 옥쇄 전"(빛 사람 사는 NF 문고) ( "피 바람 페리 류섬"(叢文社 1981 년 7 월) 개제) 각
첫댓글 인명은 재천인가봅니다. 아주 파란만장하네요.
일본 극우놈들이 좋아하는 사람 같은데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쟁영웅으로 묘사되었는데 그것도 일부분이 소설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