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아버지의 수구초심 & 할머니들의 민화투
20, 30년 후에는 나도 아버지처럼 ‘한 말’ 또 하며 고향을 그리워할까? 하기야 나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게, 이곳이 내 탯자리이기 때문이다. “야달(여덟) 살 때까지 살다가…”를 이제 열 번만 들으면 백 번을 들은 것같다. '야달' 소리가 듣기도 싫다.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에서 여덟 살 때까지 사시다 외가인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로 이사를 해, 오늘날까지 건재해 계신다. 문제는 틈만 나면 그 마을에 가보자는 것이다(치매도 아니면서). 당신의 탯자리를 한번 보고 오는 것일뿐,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다행히(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동네 이장을 수십 년 지낸, 아버지의 열 살 연하 어르신이, 당신의 할머니로부터 ‘그 옛날(1930년대초) 아버지가족’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며 반색을 했다. 일단 ‘말벗’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긴 하다.
오늘도 그랬다. 아버지와 세 번을 모셨으니, 이 어른도 대접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둘째 사위가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니 더 잘 됐다. 만나도 서로 딱히 할 말이 없으니 ‘한 말’ 또하고 한번 또 더 할 뿐이다. 그분의 할머니 택호宅號가 ‘방곡땍’인데 초계 최가였다니 종씨이다. 2007년에 아버지 팔순과 부모 회혼을 기념해 펴낸 문집 이름 <대숲 바람소리>는, 어릴 적 들었던 뒤안 대밭의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팔순이 된 지금도 들리는 것같다고 해 따온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서른 살에, 참척을 당한 환갑해의 할아버지는 그날로 곡기를 끊고 5개월만에 세상을 떴으나, 어릴 적 고샅고샅을 누비며 놀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것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하는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저 두 분이 옛날 이야기를 하든말든, 모처럼 만난 우리는 동창들 소식 묻기에 바빴다. 친구도 일흔이면 처가동네로 귀촌을 하겠다는 각오다. 좋은 일이라고 응원을 해주며, 우리는 또 한번의 효도를 한 셈이다. 흐흐.
마을회관 할머니들이 겨울동안 점심을 함께한다. 코로나시국에는 꿈도 못꾸었고, 문이 잠겨져 있었다. 점심 후 10원짜리 심심풀이 민화투를 치신다. 처음으로 옆에 앉아 30여분간 구경을 했다. 아항, 10원짜리가 여기에서 요긴하게 쓰이는구나. 뭐가 뭔지 몇 번 보니까 짐작이 간다. 네 사람(5장의 패를 가진다)이 치면 기본이 60점이란다. 초약, 풍약, 비약은 20점, 홍단, 구사, 청단은 30점인 줄만 알면 된다. 쉽다. 너무 심플하여 아무 재미도 없을 것같다. 이 놀이는 고스톱과 달리 실력이 낄 새가 없는 100% 운運이다. 고스톱은 최소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어머니를 기리는 장문의 서사시敍事詩를 낭송해 드리니 “맞아” “맞아”를 연발하신다. 어머니도 말년에 민화투를 치셨다. 화투조차 잘 하셔 당시 10원짜리를 싹쓰리했다며 할머니들이 웃는다. 저녁에 얼마 따가지고 왔나? 아버지와같이 세기도 했다니. 돌아가시고 보니 실겅에 놓인 종이컵에 10원짜리가 그득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농촌할머니들이 ‘시간을 죽이시고’ 계신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하도 젊은 애들이 벗고나와 설쳐대니 재미도 없다하신다. 무슨 취미가, 무슨 재미가, 무슨 낙이 있을 것인가? 그저 총생들(자녀들)이 무탈하고 건강하고 화목하기만을 바라는 것말고는. 젊어 팔팔하게 일할 때가 제일 재미졌다고 고백한다. 비교적 젊은 할머니가 핸드폰이 고장난 것같은데 봐달라고 한다. 나부터 맨날 아들과 아내에게 들이미는데 무엇을 알겠는가. 아예 십리길 면사무소 가게로 안내하니, 미안해 어쩔 줄 모르신다. 오늘도 '착한 일' 하나 한 셈이다.
아버지가 옛날 서랍을 뒤적뒤적 뒤지더니, 꺼내놓은 게 어머니의 팔목시계와 목걸리, 싸구려반지 3개 그리고 염주이다. 어머니 봉분에 묻으면 좋겠다해 묻어드렸다. 마침, 내일모레 어머니의 생신이니, 선물로 생각하시면 좋겠다. 동네 할머니들에게 낭송한 장시長詩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끝부분을 인용한다(2007년 2월 28일).
“우리는 시방(지금) 주거도(죽어도) 원(소원, 바람) 항개도(하나도, 1도) 업응개(없으니까)/너그(너희)들이나 펜히(편하게) 살다 오너라”
그 어머니, 올 겨울 아버지께 당신 앞으로(명의로)/논 한 다랭이(1필지, 3마지기) 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등기권리증 손에 쥐고 어찌 눈물이 안나왔으랴/
평생 우리집 머슴살이를 한 우리 어머니 ‘욕심’에/
아버지는 “마땅하고 또 마땅한 요구”라며 군소리 없이 해드렸다고 한다./
십리길 오수장 버스를 타거나 빈 손으로 가본 적 없다./
이제 동네 어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겠다며 각오가 단단하다./
“이사 갔다고, 새 집 샀다고, 오라고 허지 마라./나는 그냥 이 집에서 너그 아부지와 살다가 죽을란다.”/
평생 화장 한번 안하고/손발은 짐승의 그것이 다 되었어도/
어머니는 “후회없다. 할 일이 있어 행복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수양산이었다./산그늘이 강동 삼천리라 하였다./
어머니는 대지였다./우리의 뼈와 살을 채워주고 일용할 양식을 평생 주시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머니는/
우리의 위대한 사랑이었다./
어머니, 빌고 또 빌건대, 만수무강하소서.
그 어머니, 당신의 말씀대로 아무데도 안가고, 고향을 지키다, 시나브로 5, 6년간 아프시며(아버지의 극진한 간호에 말년호강을 하셨다), 마지막엔 스스로 모든 약과 곡기를 12일간 끊고는 고향집 안방에서 자식 품에 안기어, 살며시 영원히 눈을 감은지 그새 4년이 흘렀다. 보고 싶다! 참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