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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
첫째로 손 군은 우리 학교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 간역전경주의 선수여서
마라톤 경주의 고(苦)와 쾌(快)를 체득한 자요,
손군이 작년 11월 3일 동경 메이지 신궁 코스에서 2시간 26분 41초로써
세계 최고 기록을 작성할 때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
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하면서도
이 때에 생도는 교사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어 버렸다.
육향교 절반 지점부터 종점까지 차창에 얼굴을 제시하고
응원하는 교사의 양 뺨에는 제지할 줄 모르는 열루(熱淚)가 시야를 흐리게 하니 이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눈물이었다.
김교신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을 기뻐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1936년이니 일제치하의 한 중간,
나라 잃은 백성이라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그 가슴에 품은 마음이야 어찌 자유 잃은 종의 마음이었을까!
올림픽 우승 후 손기정 선수가 우승의 비법이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더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김교신은 제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
동경 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박물을 전공하고
양정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의 제자가 손기정이다.
체격이 좋고 만능운동가였던 김교신은
스스로도 마라톤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다.
비록 체육교사는 아니었지만 본인의 경험과
사제 간의 신의로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의 훈련을 도왔다.
스승과 사제 간의 간절함과 서로간의 믿음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늘 함께 해주신 선생님에게 ‘한 발 앞서 얼굴을 보여 달라’ 그리 청했을까.
김교신도 자문하듯이,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싶을 일이다.
선생은 자동차로 앞서 갈 뿐인데 상식적으로
그것이 제자의 뜀박질에 물리적 힘을 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날 스승과 제자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를 느꼈다 한다.
스승의 얼굴을 보며 뛰는 제자의 다리만 힘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필사의 힘으로 뛰고 있는 제자를 보며 자동차 안에 있는 스승 역시
함께 뛰는 양, 뺨이 상기되고
뜨거운 눈물과 함께 제자의 가쁜 숨을 함께 느꼈다.
줄탁동시!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이 사자성어가 생각났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쯤 되면
안에서 밖을 향하여 껍질을 쪼면서 ‘어디가 얇나,
어디로 뚫고 나가나’ 부리질을 한다고 한다.
그게 ‘줄’이다. 한편 이제나 저제나 아기병아리를 기다리면서 달걀을 살피는 어미 닭이 ‘아하, 요 녀석이 여기를 쪼고 있구나!’ 발견하고 바깥에서 함께 같은 곳을 쪼아주는 것이 ‘탁’이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날 때 생명은 탄생하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넉넉한 살림도 아니요 떳떳한 참가도 아닌,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발달이 남다른 서양인들 사이에 끼어서
인간에게 극한의 한계를 경험하며 마라톤을 뛴다는 것.
선생도 제자도 그 물리적 고통을 알고, 이 소망 없는 상황을 아는데,
그래도 기어이 뛰겠다는 제자의 간절한 ‘줄’에 ‘탁’으로 응답하는 스승은 어느덧 서로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는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날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6분 41초의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같이 뛰어 가능했을 일이다.
두 사람의 진심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으니 가능했을 일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그 기억으로 손기정 선수는
다음 해 베를린에서도 자신의 스승과 함께 뛰었을 것이다.
비록 몸은 함께이지 못했으나 고국에서
스승 김교신도 마음을 모아 제자와 함께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특한 제자가 ‘승패는 작전과 체력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정신의 겸허함에 있더라’ 고백하는 것을 접하며 감사하고 감격했을 일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의 경쟁력이 국제적이라는 소리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손기정 선수 때부터 알아보았을 일이고
김연아, 박태환, 손연재는 장한 배달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도 아니다.
‘줄탁동시’의 사제 관계가 상실된 오늘의 교육 현장 한복판을 지내면서
이 글을 읽자하니 내 심장에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아련한 슬픔마저 휘감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 소신을 가지고 교단에 섰던
김교신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은 15년으로 교사 생활을 접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산 신앙과 민족혼을 오롯이 담아 교단에서 전했던 지식은 또렷또렷한 정신과 몸을 가진 젊은 생명들을 탄생시켰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스승 김교신을 회고하며 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자리에서 올곧고 바른 정신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아, 한 사람의 힘, 아니 ‘줄탁동시’를 끌어내는 한 스승의 힘이 이렇게나 컸던가!
비교할 수 없이 모자란 스승이지만, 어느덧 강단에 선지 10년. ‘탁’ ‘탁’ 몸짓을 해도 ‘줄’ ‘줄’ 마음과 행동을 맞춰주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한탄을 하다가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본다. 비인격적 개별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몬 이 시스템 때문이야, 사제 관계가 사라지고 학습소비자-정보제공자의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이 문제야, 그렇게 속상해하다가, 다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김교신의 시절에 비할 바이던가, 모국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조차 허용치 않던 그 험한 시절에도 ‘줄탁동시’로 젊은 생명들을 알에서 깨우고 팔팔하게 세상에 내어놓은 참 스승이었는데… 부끄러움과 함께 또한 힘을 얻는다.
마라톤에도 무엇보다 인내력이 제일이다. …
때에 공중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심사에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강한 자를 꺾으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속성, 태초 이래로 계속 ‘탁’ ‘탁’ 하시면서 피조물 간의 화해와 평등의 공동체를 만들 제자들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답이로구나. 그 인내를 기억하며, 그 얼굴을 바라보며, 숨이 깔딱거리지만, 지금이라도 멈추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만, 그래도 결국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스승과 임마누엘하면서 화학적 변화로 살아내야 하는 거구나!
하나님께는 ‘줄’,
내게 온 예쁜 아이들에게는 ‘탁’하면서 그리 하루씩 살아내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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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은 함흥 영생여자고보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해 서울 양정고보,
경기중학교에서 15년간 교사를 지냈다.
성서를 연구하는 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여 제 158호까지 냈다.
교회의 목회자도 아니었고 교육계의 거창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던 그가,
한국의 크리스토교 사상사의 주요한 인물로 손꼽히기도 하고 참교육자의 모델로 거론되는 까닭은 뭘까.
평생을 식민지 암흑기를 살다 간 44년의 짧은 삶이 75년이 지난 지금에도 묵직한 의미로 새겨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다석 류영모와 비록 다른 신앙의 길을 걸었지만,
돈독한 사제(師弟)의 긴밀을 유지했던 김교신을 이해하는 것은
류영모의 삶과 사유를 더욱 깊이 읽는 일이기도 하다.
김교신은 1901년 4월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염희(金念熙)는 김교신에 세 살 때인 1904년 21세로 병사(폐질환)했다.
어머니 양신(楊愼)은 김교신과 당시 뱃속에 있었던 여동생 김교량을 혼자 힘으로 키웠다. 김교신이 9세 되던 해 나라를 잃었다.
어릴 때부터 논어를 비롯한 한학을 공부했고 10세 때부터 일기를 꾸준히 썼다
. 12세 때 네 살 많은 한매(韓梅)와 결혼을 했다. 2남6녀를 낳았다.
3.1운동 때 학생주모자로 체포
18세 되던 해 3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김교신은 3.1운동을 만난다.
그는 3월3일 함흥 장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태극기를 만들어 예배당과 학교에 보냈다.
이후 학생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그가 민족에 대해 제대로 눈뜨는 계기가 된 때였다.
이후 그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연락선을 탄 김교신은 갑판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아무리 해도 너는 조선인이로구나, 하면서 연락선 갑판을 구른 자는 둔한 자였다.
배움의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충동에는 사해가 흉중의 것이었다.
이상의 실현에 이르러서는 앞길이 다만 널리 펼쳐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해도 너는 조선인이다!"
1920년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유학적 교양을 되새기며
인간의 본심인 선(善)을 수양으로 되찾고 완성해가는 공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 무렵 크리스토교의 도덕률을 접하게 된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라."
성서의 이 말은 공자의 윤리인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네가 원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를 뒤집은 말이 아닌가.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또 이 말은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는 공자의 말과 흡사하지 않은가.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을 내주라"는
예수의 말은, "이직보원 이덕보덕(以直報怨以德報德, 원수에게는 바름으로 갚고 덕있는 자에게 덕으로 갚으라)"의 공자정신과 닮아 있었다.
성직자 이권 다툼 보며 교회를 떠나다
그는 크리스토교 도덕률이 행위 결과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까지도 중요시하는 것을 발견한다.
거기에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죄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1920년 6월 도쿄 야라이초(矢來井) 성결교회에서 시미즈 준조(淸水俊藏)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신한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교회가 이권 싸움으로 목사를 추방하는 사태가 생겼고
김교신은 5개월만인 11월 교회를 떠난다.
1921년 1월 그는 우치무라 간조를 만난다.
우치무라는 1891년 1월9일 도쿄제일고등학교(도쿄대학교양학부의 전신)의
촉탁교원이었는데,
이때 학교에서 천황을 기리는 종교의식인 교육칙어 중에 깊은 경례를 하지 않고
강단을 내려왔다.
우치무라는 크리스토교인인 그가 하나님께 외에는 결코 봉배(奉拜)를 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우치무라 불경(不敬)사건으로 일본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다.
우치무라는 이후 국적(國賊)으로 낙인찍혔고 일본 크리스토계에서도 배척을 받았다.
이후 그는 무교회주의를 자임하고, 철저한 비전(非戰)론으로 고독한 소신을 길을 걸었다.
20세의 김교신은 60세가 된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했고 '구안록(求安錄)'과 '종교와 문학'과 같은 우치무라의 책을 탐독했다. 그의 역작인 로마서 강의 때 김교신은 언제나 맨 앞좌석에 앉아 경청했다. 우치무라는 당시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우치무라 "나를 잘 이해해줄 이는 조선인에서 나올 것"
<오테마치(大手町)에서 로마서 강연을 끝내고 감사를 보내온 사람이 오늘까지 (전체 700명 중에서) 넷이다.
그 중 조선인 모군의 그것이 제일 강하게 나의 마음을 울렸다.
왈, '우치무라 선생님, 60여 회에 달한 로마서 강의를 아무런 권태 없이 기쁨에서
기쁨 중에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합니다.
저는 작년 1월을 기해 한번도 쉬지 않고 참석을 허락받았습니다만,
이제 오늘 대관(大觀)으로 천하의 대서(大書) 강의를 마치심에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의 기쁨에 자기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눈밑을 씻음을 깨닫고 홀로 부끄러워 했습니다.
선생님, 온 국민들의 박해와 참기 어려운 국적(國賊)의 비방 속에서도 극동의 일각에 버티고 서서 십자가의 성스런 깃발을 하늘 높이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이를 조선인으로부터 받고 나도 저절로 감격의 눈물이 눈밑을 씻음을 깨닫는다. 앞날에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자는 혹은 조선인 속에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교신은 이후 귀국할 때까지 7년간 가시와키(柏木)청년회에 가입하여 성서를 배웠다. 1925년부터는 함석헌, 송두용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연과학자의 정신에 입각한 성서 연구와 국적(國賊)으로 모든 국민의 비방 속에 매장된지 반생여일에 오히려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있게 나를 견인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의 생각을 그에게 온전히 바쳤다."
1927년 성서조선 창간
1922년 4월 그는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과를 옮겼다.
1927년 이 학교 이과(理科) 제3부를 졸업한 뒤 4월에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보 교사로 취임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 함석헌,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과 함께
6인이 모여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해(解,의미)'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를 세우며 그 피를 만들고자 한다.
같은 크리스토교로서도 어떤 자는 기도생활의 법열의 경지를 주창하며
어떤 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자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성서조선은 15호까지는 동인지로 발간되었지만 이후 동인들의 지속적인 참여가 어려워지자 제16호(1930년 5월호)부터 김교신이 주필로서 성서조선의 발행에 모든 책임을 진다.
그 일이 어땠는지는 1934년과 1936년의 일기가 증언한다.
주필 겸 발행자 겸 배달부 겸
"영하 18도 7분으로 기온이 점차 내려감. 등교 수업을 마친 뒤에 2월호가 나와 방송하는 일을 봤음. 겉봉 쓰는 일, 부치는 일, 우편국 및 경영역에 반출하는 일은 물론이요, 시내 서점에 배달하여 수금하는 일까지 단독으로 하다. 서점에서는 '선생님이 이처럼 친히 다니시냐'고 하나 도대체 위로의 말인지 조롱의 말인지 모르겠다. 주필 겸, 발행자 겸, 사무원 겸, 배달부 겸, 수금인 겸, 교정계 겸, 기자 겸."(1934.2.1)
"오전 중에 성조(성서조선)지 61호 나옴. 수업만 끝내고 일찍 귀가하여 발송함. 오후 5시에 서대문 우체국에서 발송, 지난호까지 합게 292부와 20부 우송하다. 우체국 직원에게 괄시를 당하다. 나 자신 위인이 못생긴 것을 절감하다. 더욱 겸손히 죽는 자 되어야 하겠다."
구독자 최대 300명이던 성서조선을 외부 경제원조 없이 월간으로 매달 꼬박꼬박 발간하는 일은 이런 것이었다. 그런 온갖 뒤치다꺼리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매달 세상에 보는 글을 쓰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원고를 쓰기 위해 앉았다. 어떨 때는 무슨 말을 써야할지 앞이 캄캄할 때도 있었다. 한 줄도 써지지 않을 때 그는 붓을 던지고 집 부근 정릉계곡으로 갔다. 앞서서 가는 플러리(개의 이름)가 이끄는 대로 가서 터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내 입에서 설교를 끊어버리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 위에 있다면 한 줄의 원고도 못쓰게 하시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거든, 주여 다음달 호의 원고도 쓰게 허락해주옵소서."
성서조선은 일종의 묵시록
그는 대체 왜 이토록 고통을 감내하며 성서조선을 15년이나 냈을까.
1939년 성서조선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성서조선도 일종의 묵시록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세대는 비유나 상징이나 은어가 아니고는 진실한 말을 표현할 수 없는 세대이다.
지혜로운 사람만 지혜를 이해한다."
이 잡지는 크리스토교의 진리를 표명하기 위한 종교지가 아니라,
식민지 현실에 저항하며 미래를 준비해야할 민족에게 예언을 말씀을 전하는
종교적 사회평론지라 할 수 있었다. 김교신의 초인적인 소명감은 거기에서 나왔다.
1942년 '성서조선 폐간'은 1937년의 중일전쟁 무렵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다. 만주사변에 이은 대륙침략 전쟁을 치르는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물적인 지원 기지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 동원이었다.
조선인에게 안심하고 총을 맡길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대두된 이데올로기가 내선(內鮮, 일본과 조선)일체론'이었다.
조선인이 천황의 황민이 되도록 일본 국체(國體)를 아예 내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참배가 강요됐다.
평양 크리스토교 사립학교 교장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총독부는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폐교까지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크리스토교 학교의 선교사들(숭실학교 교장 매큔,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 등)이 쫓겨났다.
1938년부터 교회도 신사참배를 하라고 압력이 내려왔다.
천주교와 감리교가 '천황신을 모시는 것은 국가의례'라며 먼저 동조했고
장로교도 총회를 열어 참배를 가결하였다.
신사참배에 저항한 성서조선
김교신은 이 사태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하나님은 유일신을 표시하는 말로서 구미 각국의 어휘에도 이미 정립된 문자요,
세계에 유례없는 귀중한 말인데 신앙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반세기 신앙역사를 까닭없이 매장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나 일본은 '천황신앙'의 이단을 박멸하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 광기의 시대에 언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성서조선에서 김교신이 외친 목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근래의 신문기사는 한번 조판해놓고 매일 날짜만 박아 발간하는 모양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천편일률이다.
3면기사고 사설이고 기억력이 약한 우리도 모조리 암송할 수 있을 만큼 일색이다.
예전 같으면 같은 도쿄신문이라도 만조보(万朝報), 요미우리, 지지(時事), 아사히신문 등
각자의 오리지낼리티가 있었고 각자의 체취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 데서도 이를 볼 수 없다.
신문 구독을 중단한다고 통고하면 배달부가 간청해서 한 달만 더 봐달라고 한다.
요새 라디오에 들을 것이 있다면 일기예보 쯤인데 그것도 태반은 거짓말방송이다. "
1939년 11월 창씨개명이 강행되었다.
김교신은 "이제 모든 크리스토교인의 정의로운 순교가 요구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하며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
살아서는 끝까지 김교신으로 살겠다고 말하고 교단에서도 조선어 수업을 게속했다.
그러나 오래 갈 순 없었다. 1940년 10년 동안 조선 지리를 가르친 양정고보를 사임하였다.
'컨닝'하는 학생 보며 눈물 흘리는 선생
김교신의 양정고보 제자 중에는 동요작가 윤석중(1911~2003)도 있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스승, 김교신 선생'이란 글을 남겼다.
"시험보는 시간에 컨닝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선생이 계셨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퇴짜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남의 것을 보고 베껴 좋은 끝수를 땄다고 치자. 그런 식으로 학교를 나오고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한심한 노릇이로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그 선생은 그런 때만이 아니었다. 교식에서 툭탁거리고 다투거나 선생을 놀리는 낙서를
칠판에 써놓았을 때도 야단을 치거나 얼굴을 붉히시는 일이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시다가 조용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아무개는 학교 마지막날 깊이 뉘우쳐 졸업장 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는데 그대들은 그 꼴이 무엇인고. 선생 앞에서 주먹질이나 하고 선생을 놀림감으로 다루면서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이담에 큰 소리 칠 작정인가. 가련한 인생이로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또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 선생은 눈물이 흔하셨다. 눈물이 흔하신 그 선생은 마음이 약하거나 생김새가 가냘픈 것이 아니었다.(.......)
잊을 수 없는 스승 김교신 선생은 나의 은사이셨고 이따금 자랑삼아 들추신 졸업장 퇴짜 놓은 학생은 바로 나였으며, 학생을 타이르실 때 나를 인용하신 사실은 해방 뒤에 류달영 동문을 비롯하여 여러 양정 후배들이 들려주어 안 사실이다."
(외솔회 발간 '나라사랑'17호 중에서, 1974년)
손기정 "김교신 선생님의 눈물만 보면 뛰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은 양정고보 출신이며,
김교신은 그의 코치였다.
도쿄에서 올림픽 예선전이 있었는데 트랙에서 자전거를 몰며 응원했던 김교신은
손기정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 눈물을 연신 쏟았다.
예선전을 통과한 뒤 손기정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오직 김교신 선생님의 눈물만 보면서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우승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이런 커다란 진실한 교육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듯 애국을 실천하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그분은 큰 분이십니다."
그날 일을 김교신은 이렇게 적었다. "1935년 11월 3일 메이지신궁 코스에서 2시간 16분 41초로써 세계최고기록을 작성할 때에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전거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을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하면서도 학생은 교사의 심장 속에 함께 녹아 하나가 되어버렸다. 록코바시(六鄕橋) 반환점부터 종료까지 얼굴을 보여주고 응원하는 교사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시야를 흐리게 했다. 사제 합일이 화학변화를 일으켜 생기는 눈물이었다. 그 결과가 세계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베를린 올림픽에는 손기정의 코치로 따라가지 못했다.
1936년 8월9일(일요일 흐림) 일기에는 "오늘밤 11시부터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뛸 양정고보 5학년 손기정을 위해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들다"라고 적었고,
이튿날인 10일(월요일 천둥번개)에는 "오전 6시반부터 베를린에서 오는 전파를 들었다.
마라톤 실황을 듣는 순간 주먹에 땀을 쥐었다.
손기정 1위, 남승룡 3위의 보도에 기쁨의 눈물이 복받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해놓았다. 1
2일 함석헌이 스승 김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 아침 손기정군의 마라톤 1등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나약한 조선을 위해 만장의 기염을 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양정의 그 학교와 그 운동장이 세계1등의 마라톤 선수를 내었다면
우리 조선이 영원의 경주장에서 용사의 관을 쓰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더 두터워갑니다."
김교신은 1919년 열아홉 살 나이에 함흥 장날 만세를 부르다 학생 시위 주모자로 지목돼 피난하듯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길거리에서 전도사의 노상 설교를 듣고 크리스토교인이 된 후,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7년간 성서를 배웠다.
1927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동인 송두용,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그는 1942년에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개구리를 일제탄압을 견뎌내는 조선민족에 비유한 ‘조와(弔蛙)’를 발표해 1년간 복역했고, <성서조선>은 폐간됐다.
1940년 3월에는 12년간 교사로 일하던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수업 중
일본어 사용 문제와 창씨개명 거부로 교직을 그만뒀다.
뒤에는 일본질소비료회사 용흥 공장에 들어가
5000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일했다.
그곳에서 발진티푸스에서 걸린 노동자를 간호하다가 전염돼,
1945년에 4월 광복을 넉 달 앞두고 생을 마감했다.
더뷰스 김교신 리뷰어 이빈섬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