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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복음 시작
마가복음 1장 1-4절 /차명권 목사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책입니다. 16장으로 사복음서에서 가장 짧지만, 다른 복음서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복음서의 시작인 마가복음의 첫 시작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강하고 급한 마음을 느낍니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 우리에게 가장 생명이 되는 말씀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포하고 계십니다. 첫 구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처럼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들로 이뤄지는 신약 복음의 세계를 선포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입니다. 우리는 큐티를 할 때에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이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헬라어로 크리스토스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왕족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반복해서 예언되었던 그리스도가 이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젠가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모든 압제와 고통에서 건져 줄 메시아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왕 중의 하나가 아니라 왕 중의 왕이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마가는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것은 당시 대중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개념을 넘어서는 혁명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대담한 선포는 세상이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였고, 신성모독에 가까운 충격적인 선포였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이 특징이 성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성도들을 기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기름 부으셔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족으로 만드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도들을 기름 부으셔서 세상에서 구별해 내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예수님의 신성을 회복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셨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을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8장 19절입니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들은 타락의 결과들 속에서 환경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무너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해 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피조물들이 고대했던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우리들의 소명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구원의 역사에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한 뒤 계속해서 놀라운 장면을 통해 그분의 정체성을 더욱 자세히 드러냅니다. 마가복음 1장 9-11절입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고, 하나님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고백인 동시에, 성령 받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령을 비둘기로 표현하고 있는데,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성경인 탈굼밖에 없었습니다. 훨훨 나는 비둘기를 비유적으로 등장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연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창세기 1장 태초의 창조과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습니다. 창조하실 때의 모습에 성령님도 등장하심으로 천지창조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을 창세기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처럼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새창조의 역사를 행하신 것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세례식 장면에서 삼위를 모두 언급했습니다. 창조도 그렇고, 구원도 그렇고 이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왜 중요한 걸까요?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분이 계신데, 이 세 분은 또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십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확증해주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님은 예수님을 능력과 권세로 덮어 주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고 모습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돌보십니다.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를 존중하고 영화롭게 하시는 속성을 엿봅니다. 삼위의 위격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서로를 비하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십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4-5절입니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도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죠.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런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삼위의 상태를 신학자 코넬리우스 플랜팅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은 서로 교제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품고 있다. 끊임없는 자문과 수용을 통해 각 위격은 서로를 덮으며 에워싼다. 하나님의 내적 삶은 서로에 대한 존중심으로 넘쳐난다.”
삼위일체에는 이러한 서로에 대한 영광과 존중과 에워쌈뿐만 아니라, 춤과 기쁨과 행복의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헬라어로 페리코리시스입니다. 페리코리시스의 뜻은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춤을 춘다는 뜻입니다. 한 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지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할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춤을 추듯 서로를 존중하고 높이고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하나님 세 분의 위격의 관계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을 이 삼위의 관계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춤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춤을 통해 창조하시고 구원하셨던 것처럼, 고민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통해 창조와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춤과 같은 삼위의 속성 속에 우리의 신앙이 잠길 때 우리의 삶에도 창조와 구원이 일어나게 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서로를 은혜로 용납하고 즐거워하면 새창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춤추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받기 위해 방황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이라시며, 삼위의 영원한 관계 속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은 후 광야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2-13절입니다.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의 현실도 광야와 같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신 것처럼,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예수님이 들짐승의 공격 위험에 처해 있으셨던 것처럼, 성도들의 현실에도 위협과 공격과 두려움의 환경들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사탄을 악을 의인화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탄은 상징이 아닙니다. 실재합니다. 선하신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한 초자연적인 사탄의 존재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악한 힘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힘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우리를 삼위 하나님의 춤의 관계에서 끌어내어 홀로 광야에서 사단에게 굴복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유혹을 일삼고 있습니다. 안식과 신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시험을 받고, 그 부족함이 없던 에덴동산에서도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더 안 좋은 환경인 광야에서도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사탄은 예수님과 교회의 발 아래로 패배하여 묶이고 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시면 영원히 가둬질 것입니다. 사탄의 패배로 인해 이제 사탄은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하고 떠나가는 역사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고, 승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안식하는 자는 승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로 몰려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에 잠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고백이 십자가를 감당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이 사랑은 우리의 자격과 우리의 행위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발린 자는 그 어떤 자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붙든다면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떡이라는 현실도 말씀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떡에다가 말씀을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만큼 무지한 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있는 자는 예수께서 다스리실 것이지만, 말씀이 없는 자는 다른 사람이나 사탄에게 운명을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삶을 비추는 빛이며,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걸음의 등불이 되십니다.
낙심한 자를 일으키는 것도 하나님의 지금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영을 깨우고 혼과 육을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텍스트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읽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말씀을 생명처럼 먹고 마시며 읽고 듣고 묵상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 안에 길이 있습니다.
셋째, 성도는 소명에 깨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삶은 금방 끝이 납니다. 눈을 깜박하면 인생은 황혼에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삶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이 빵이 되게 하라고 유혹했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고, 자신에게 절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시험을 받으셨을 때, 그분의 마음속에는 이 땅에 오신 소명이 중심에 있으셨습니다.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죄를 사하고, 사탄과 사망권세를 멸한다는 소명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던져준 이론과 지식과 세계관으로 살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소명으로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만들어서 주입시켜 준 지식과 이론의 노예가 되어서 부지불식간에 사탄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소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과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고유한 은사 앞에서 깊은 영적 사유와 묵상을 하며 안식하고 신뢰하며 두려움 없이 도전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기를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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