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성탄...
우리는 지금 대림절이라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셨음을 기억하고
다시 오마 하신 약속인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교회는 성탄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 오심에 대한 깔끔한 준비하게 하고
예수님 오시는 길을 잘 마련하도록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불과 장식으로 성탄을 꾸밉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날로 그 날을 여기는 세상의 떠들썩함과
더불어 우리의 성탄도 그렇게 점점 다가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
곧 첫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려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연히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주님은 당연히라는 표현을 쓰시지만 우리에겐 길 잃은 괘씸한 한 마리 양보다는
아직 내 품에 있는 아흔아홉마리 양이 더 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는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깝지만 그 정신 없는 짐승 하나 따위에 내 모든 제산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약한 것 처럼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한마리를 다른 방법으로 빨리 채우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일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실 날에 대한 기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심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대게 그 심판에 대해 우리는 공정하시고 엄하신 하느님 만을 기립니다.
그래서 더 고해성사를 강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예수님은 오신 이유가 당신 우리 안에 있는 대다수의 양이 아닌
길을 잃은 한 마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당연한 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같이 그 정신 없는 양 한 마리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에게 양은 우리의 소유물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없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께 그 양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유물인 그 양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중 우리가 실망하고 단죄하고 나쁘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사람 하나 때문에
사람이 되신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 하신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그 길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있는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분을 알던 이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목자의 모습은 당연한 우리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 그 날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주님의 첫성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고자 찾아오신 하느님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주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가, 곧 그만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가임을 나타내줍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과 무서운 심판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랑으로 준비하는 성탄은 주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겠지만
심판만을 생각하는 이는 심판 앞에서 하느님과 한 없이 멀리 떨어지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을 떠난 목자, 그 목자가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성탄을 준비합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말입니다.
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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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다수와 소수
다수결의 원칙은 다수인의 집합체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에 따라 행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근대 영국의 철학자 벤담이 정리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근간으로 확고히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적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다 보니 항상 소수는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이 두 개인 물고기가 정상인데 눈이 하나밖에 없는 물고기들 속에 있으면 그 물고기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정상인데 모두가 경쟁을 바란다면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유다 지방에서는 양을 목초 지대에 방목하기 때문에 양이 길을 잃는 경우가 가끔씩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경우 다수의 양을 보호하기 위해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한 마리 양에 대한 포기를
반대하시는 것은 이런 선택이 결국 경쟁과 의심,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 ‘남들도 다 하는데.’라는 말로 위안을 삼습니다. 하지만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죄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이 옳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희생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어쩌면 주님은 소외되고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소수가 되어버린 듯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수가 세상을 편들더라도 주님이 옳습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내가 그 한 마리의 양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 내 의견을 따르지 않고
내 판단을 비난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오시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랬을 때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서울대교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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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베드로 신부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나서는
오늘 복음은 한마리의 길잃은 어린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 목자의 모습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입니다.
인간이 모두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하느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벌주고 벌하시는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길잃은 어린양하나까지 찾아 나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이복음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유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인간들에대한 관심을 보면서
우리자신들이 얼마나 희망을 가져야할지를 알게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모습,
길잃은 어린양에대한 관심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큰복음이됩니다.
그러기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하는 진정한회개의 삶이 필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와함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굳게 믿을 필요성을 가집니다.
이세상에서 무슨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한 짓이 이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그리스도교는 죄의 종교가 아니라 사랑의 종교입니다.
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위한 것이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로써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죄에서 벗어나려면 적극적이고 완전하게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각자는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근본정신은 그 잘못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지만
진정한 뉘우침이 됩니다. 통회는 다만 죄를 짓지 않겠다는 죄 생활의 정지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회개이전의 죄상태를 뉘우치고 그 죄상태를 다시는 계속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회개는 단순이 순간적인 마음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됩니다.
새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은 물론 죄의 생활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과거에 나빠던 죄의 상태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죄에대한 미움이 없는한 참생활에대한 열의도 있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시기이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위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길을 잃고 헤메는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찾아나서는 자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평소에 버리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길잃은 어린양을 찾고 계시는 참목자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행위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회개의 삶이 참으로필요합니다.
우리모두가 이러한 회개의 삶을 바탕으로 이 대림시기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김태형 베드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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