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 바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하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 나라가 폭행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율법 해석으로 하느님의 통치에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려 그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태오 23,13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 나라를 거절하였음을
증언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하늘 나라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불순종과, 하늘 나라의 온전한 도래의 방해를 나타냅니다
(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95면 참조).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올바름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영토나 체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아픔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과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다른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가슴에 품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홍승의, 『푸른 물고기』, 40면 참조).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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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구세사를 보면 이 시공간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시기 위해 세상의 점보다도
작은 나라와 고을에 오셨고 한 가정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수많은 나라 중에
약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과 땅, 그리고 후손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 후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만 구원을 펴시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온 세상을 향하십니다.
그리고 세기와 세기의 역사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과 같아지는 모습으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야 예언서 41,13-14)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고통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에는 행여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돌아서시지나 않을까 염려도 하지만
예언자는 변함없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그들에게 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나라에서 더불살이를 하기에 그들은 가난한 처지가 되고
사막과 같은 그곳에서 갈증으로 혀가 탈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당장은 제국들의 세도가 커서 어찌보면 이스라엘은 기도 펴지 못할 처지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고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오아시스와 같은 약속의 땅을 마련하시고
그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야 에언서 41,18)
주님께서는 그곳에 향백나무, 향백나무, 아카시아, 도금양나무, 소나무, 방백나무,
사철가막살 나무, 젓나무를 함께 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예언자의 이 말은 현실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닌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종말적인 예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11,11)
그리고 이어서 약자들이 폭행을 당하고 폭력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하는 현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1,13-1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에 변함없이 충실한데, 이스라엘 백성은 걸핏하면 하느님을 떠나 이방신들에게 넘어가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보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할 때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바빌론 유배까지 가야하는 수모를 겪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벌레같고 구더기 같은 원망스런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위로하며 메시아 시대에 다가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비유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날카로운 타작기로 만드셔서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드실 것이라는 뜻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정치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불전차를 타고 하늘에 올랐던 엘리야가 올라갔던 모습대로 다시 재림하게 되면
그때에는 메시아시대가 되고 그때에는 온 민족이 머리를 수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례자 요한은 눈에 차지도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휘두르는 폭력에 희생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온 엘리야를 몰라보듯,
이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까지 몰라봅니다.
주님을 따라온 군중을 향하여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 비록 세상은 세례자 요한은 몰라보지만
예언서와 율법에 이르는 가르침을 그들이 새겨 들을 수 있으면 세례자 요한이 마지막 예언자이며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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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 11,12)
정말로 좋은 것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 공기, 물, 땅, 산과 들, 비와 햇빛 등
하늘이 주는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오 5,45)
그런데 요즘은 그런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남에게는 안 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니꺼내꺼 따지고 서로 안 빼앗끼고 더 많이 가질려고 전쟁과 폭력도
불사합니다. 결국 힘있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하고 힘없는 자들은 그들이 남기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기도 합니다.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모두가 잘 나누어 쓰라고 주신 선물인데,
그것을 마치 내 것인 양 주장하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폭력을 당하고 있고 무참하게 짓밟힙니다.
폭력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생명경시, 자연파괴, 인권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 땅은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늘 나라였는데, 우리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하늘 나라를 폭행하여 이 모양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하늘 나라의 폭행은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사제들을 겨냥한
예수님의 한서린 고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열쇠를 치워버린 사람들"(루카 11,52 참조)입니다.
출애급 때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축제를 지냈었지요.
대사제인 아론도 일조하였구요.(탈출기 32,1-6 참조)
애초 하느님 산에 오르려 출발한 이들을 산밑둥에 잡아 앉히고
거기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제공하면서
산에 오르면 생길 위험과 해악을 누차 강조합니다.
이에 타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정 가득했던
첫 목적, 첫 마음을 설익은 이상주의라고 치부해 버리고
적당한 안정과 평온에 주저앉습니다.
이제 하느님 향한 열정과 사랑은 빛바랜
옛 추억이 되어 낡은 일기장에 갇혀버리고, 왜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지 묻지도 못하며
그저 우울과 회한의 어두움에 가라앉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공동체 안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아닐까요?
내 안에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음은
그것이 하늘 나라가 서서히 폭행당하고 있음을 증멩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하늘 나라가 끊임없이 공격받는다는 걸 아십니다.
무작정 하늘 나라를 탄압하려는 폭력은 오히려 식별이 쉬워 피하기도 쉽습니다.
더 무서운 건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들어와 절충과 타협으로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다른 하늘 나라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폭력입니다.
벗님이여,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하느님이 주신 무상의 선물들을 잘 누리고 살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원래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잘 쓰고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려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하늘 나라를 강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라 우기니 도둑이고 강도며 사기꾼입니다.
하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마태오 22,21)
일입니다.
오늘 벗님이 하는 일이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일이 아니라 건설하는 일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벗님은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나라는 내려놓음과 나눔으로 확장되는
그런 나라임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바로 성탄절의 숨은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의 한부분을 이렇게 좀 바꾸어서 바쳐봅니다.
"하늘과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 땅에 만들어주신 당신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가 파괴하지 말고
원래 모습대로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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