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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불로 가는 극락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달빛나그네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 스님 | ||||
“편리함 추구하면 수행정진 안돼” | ||||
‘부드러움’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상대가 누구이던, 그에게 ‘부드러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수행자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탁마에 수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고, 남들이 알기힘든 무수한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부드러움이 나오기 때문이다. 2002년 2월25일 봉녕사 향하당에서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을 만나는 순간 다가온 느낌은 ‘역경을 극복한 부드러움’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묘엄스님은 1945년 음력 5월5일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조계종 전 종정 성철큰스님을 계사로, 월혜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 ‘인순’에서 ‘묘엄’으로 거듭 태어났다. 당시 성철스님은 “내는 법상(法床)에 안 올라가는 사람인데, 순호(청담)스님 딸이니까 내 딱 한번만 사미니계를 설하는 기라”며 묘할 묘(妙)자 장엄할 엄(嚴)자를 법명으로 내려주었다. 이후 묘엄스님의 하루하루는 출가자가 알아야 될 모든 것을 익히는 과정이자,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잿물내리는 법, 광목 물들이는 법은 물론이며 〈사미니율의〉 학습 등에 이르기까지, 청담·성철·자운·홍경스님 등 큰스님들에게 배웠다. 어찌보면 묘엄스님의 수행생활은 ‘특혜’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봉암사에서 “니가 첫 번째 식차마나니계 수계자다. 그라니 너 중 노릇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자운스님의 말을 들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식차마나니계를 받은 일이 그렇고, 청담·성철·자운스님 등이 1947년부터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며 봉암사에서 시작한 결사에, 비구니 스님으로는 드물게 동참한 일도 그렇다. 결사 당시 하루는 성철스님이 묘엄스님을 불러 놓고 화두를 내려주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였다. 화두를 내리자마자 성철스님은 느닷없이 묘엄스님의 멱살을 틀어쥐는 것 아닌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어서 대답을 해라.” 엉겹결에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고 대답했다. 성철스님은 묘엄스님의 멱살을 틀어쥔 채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등짝을 세 번이나 세차게 때렸다. “니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그랬나.” “예, 스님.” “마 안되겄다. 묘엄이 니는 다른 화두를 해야겠다. 그래, 이걸 화두로 삼아라.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걸 화두로 삼으라. ‘비심비불비중생 시심마(非心非佛非衆生 是甚摩),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참구하란 말이다. 알아들었나.” 당시엔 황망중에 등짝을 맞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다 ‘조도법문(助道法門)’ 즉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법문”이었다. 제자들에게 선기(禪機)를 싹트게 하고, 선근(禪根)을 심어주기 위한 기상천외한 방편이었다.
53년 8월 동학사에서 부산 금수사로 옮긴 운허스님을 따라 묘엄스님은 다시 금수사로 이동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운허스님은 다시 통도사로 가게됐고, 묘엄스님도 통도사에서 〈능엄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54년 3월13일 운허스님은 또 진주 연화사로 갔다. 묘엄스님도 따라 연화사로 옮겨 〈기신론〉에 천착했다. 55년 11월 운허스님이 다시 해인사로 옮기자, 해인사에서 〈금강경〉 〈원각경〉을 배웠다. 해인사에 있던 운허스님을 떠나, 동학사 경봉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운 묘엄스님은 경봉스님으로부터 마침내 56년 4월5일 전강(傳講)받는다. “참으로 감개 무량했습니다. 45년 3월 스무닷새 날. 철없는 나이 열네살에 삭발 득도한 이후 11년만에 비구니 강원 강사가 됐으니,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어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성철스님의 이야기만 믿고 무작정 삭발출가했던 묘엄스님은, 청담·성철스님의 바람과 ‘훌륭한 법사중(法師僧)이 되겠다’는 본인의 원력대로 드디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후학들을 지도할 정식 강사가 됐다. 이것도 잠깐. 묘엄스님은 〈화엄경〉을 챙겨들고 통도사 운허스님 회상에 다시 들어갔다. 운허스님 문하에서 다시 한번 〈화엄경〉을 배우자, 막힘없는 상태가 됐다. 운허스님이 “아이구, 정말로 인제 되었다. 그만하면 묘엄이 니가 강사로서 가르칠 만하다. 니도 인자 강사야!”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스님. 그렇게 과찬의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 “허허 내가 강사라면 강사인 게야! 내가 니한테 전강을 하는 거야. 묘엄이 너는 이제 강사다!” 그 때가 57년 12월이었다. 묘엄스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자신있게 남을 이끌고 가르칠 수 있는가.”자문자답한 묘엄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한층 더 자신을 갈무리했다. 묘엄스님은 마침내 1966년 3월15일 운문사에 비구니 강원을 열고, 학인들을 제접하기 시작했다. 문득 “참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운문사 강사직을 내놓고, 죽림사·약사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결국 1971년 4월9일 경기도 수원시 광교산 기슭에 위치한, 약사전 한 채·칠성각 한 채·요사채 한 채 뿐인 봉녕사에 도착했다. 당시 봉녕사는 누추한 사찰이었다. ‘열악한 상황’에 굴복할 묘엄스님이 아니었다. 사격(寺格)을 새롭게 하는 한편, 봉녕사에 다시 강원을 열었다. “부처님 가르침과 인생관이 내 인생관이 되도록, 깊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편리함과 수월함만 추구해서는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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