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천강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안개 소리
/ 유정현(본명 유애숙)
그는 자전거를 천변에 세우고 수초 사이로 스멀스멀 괴어오르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기상현상이었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불쑥 머리채를 풀고 나타났다가 슬며시 자취를 감추곤 한다.
W시로 발령받은 지 넉 달이 지났건만 이 도시는 아직 통성명도 안 한 사이처럼 서먹서먹했다. 그 서먹함 속에는 납득할 수 없는 불길함마저 깔려있어서 그를 긴장시켰다. 안개는 미등이 켜질 무렵엔 W시 전체를 자욱하게 덮었다. 도시는 그물에 사로잡힌 한 마리 물고기처럼 비릿한 호흡을 내뿜으며 충혈된 눈을 끔벅거렸다.
*
이사하는 날은 비가 내렸다. 시의 경계를 넘을 때까지 말짱했고, 일기예보에도 없던 느닷없는 소나기에 그는 마음이 언짢았다. 그러잖아도 젖은 속옷을 걸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내내 눅눅하던 그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채 한 달이 안 된 데다, 이사라고 해야 통근 거리를 좁히려 인접 시의 낡은 연립에서 W시의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로 옮기는 것에 불과했고, 그것마저 얼마간의 융자까지 걸머져야했다. 언짢았던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부동산에서 만난 주인 여자에게 전세 잔금을 건넨 뒤에야, 이삿짐이 이미 일주일 전에 아파트를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시댁으로 들어간다기에 도배라도 할 수 있게 딱 하루만 편리를 봐달라고 사정했을 때도, 원칙대로 하자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여자였다. 원칙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인정머리 없는 자들의 변호인으로 둔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아내와 아파트 상가에 있는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상가에 하나뿐인 허름한 식당은 체중을 싣기 불가능할 정도로 의자마다 삐걱거렸고, 물크러진 야채 쓰레기가 함부로 발에 밟혔다. 그는 육개장을 먹었다. 육개장은 맵고 누릿했으며, 알리바이처럼 두어 점 띄워놓은 고기는 가죽보다 질겼다. 그는 밥을 반공기도 먹지 못했다. 그는 이 도시의 불친절과 무성의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비는 계속 쏟아졌다. W시의 온갖 잡다한 냄새가 젖은 땅에서 질펀하게 올라왔다. 동물의 배설물과 흡사한 그 냄새는 그가 담당 지역을 순찰할 때마다 질리도록 맡는 냄새였다. 그 냄새에서 그는 이 도시의 현주소를 읽었다. 겉은 멀쩡해 보이나 지하 깊숙이 묻힌 하수관이 터져 오수가 새듯, 사람들도 그렇게 낡은 하수관처럼 서서히 부식되어가고 있었다.
미처 장비를 갖추지 못한 영세한 이삿짐센터의 인부들은 통로의 경비실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담뱃갑만한 경비실은 문이 닫힌 지 오래인 듯 깨진 화분과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이 두어 개 떨어져 있을 뿐, 경비원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서 403호의 문을 열었다. 살림살이를 몽땅 들어낸 아파트는 물 뺀 웅덩이처럼 적나라했다. 가구 뒤쪽의 벽지에서 은밀하게 서식하던 곰팡이는 비밀스러운 지도를 드러냈고, 끼리끼리 모여 수군대던 먼지 뭉치들은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국적을 알 수 없는 동전 한 개가 죽은 체 엎드려 있었다. 그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으려는 감식요원처럼 집안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어본 뒤에 동전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소나기의 기세가 한풀 꺾인 틈을 이용해서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한 건 오후 두 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인부들을 도와서 자잘한 짐들을 계단으로 날랐다. 올망졸망 꾸려진 살림살이를 보자 기분이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10년쯤 세월이 지나 그가 마흔 중반에 이른다 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인부들이 돌아간 시간은 어둠이 젖은 미역처럼 창에 한 겹씩 달라붙기 시작한 어스름 저녁이었다. 아내는 체리목의 실내 가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멘트색의 아크릴 커튼을 쳐서 바깥과 실내를 완전히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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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시의 한 순찰지구대에 근무하는 그의 주된 임무는 관내 치안을 위한 방범순찰이었다. 모든 범죄가 다 그렇듯 검거보다 예방이 우선이었다. 범죄의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고, 억제함으로써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관내에서 가장 기피하는 6지구대였다. 업무량이 많고 사고와 위험은 많으나 근무 여건이 나쁘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장비라고는 업무의 효율성이나 경제성과는 거리가 먼, 구형 디지털카메라와 프린터기, 캐비닛, 신발장, 옷장, 구식 게시판, 전화 등으로 전부 낡아서 간신히 작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청한 자리였다. 뛰는 범죄에 기는 장비로 대처하자면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믿었고, 그 일에 몸 바칠 각오도 했다.
그가 관할하는 지역은 천변을 에워싼 유흥가가 밀집해 있어서 밤마다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술값 시비와 폭력사건 외에도 공무집행방해나 절도 등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다 주취자의 소란은 갈수록 도를 더해갔다. 며칠 전엔 한 주취자의 난동으로 지구대의 기물이 부서지고 폭행까지 당했다. 상당히 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제법 쓰는 놈인지 주먹이 빨랐다. 미처 몸을 피할 새도 없이 강한 어퍼컷이 날아왔고, 눈앞에 별똥별이 무더기로 지나갔다. 아래턱의 통증으로 그는 이틀 동안 음식물을 씹지 못했다. 그는 그 일로 며칠간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놈을 과도하게 제압하다가 자칫 몸에 상처라도 입히면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본서에 바로 민원이 들어가게 되고 상사로부터 호된 문책이 따랐다.
가끔은 무다얼링도 끼어들었다. 서장은 관내 독거노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수시로 그들의 안전을 점검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삼분의 일 이상이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곧바로 독거노인들을 위한 맞춤형 치안서비스를 제공했다, 그게 무다이얼링이었다. 수화기만 내려놓으면 7초 뒤에 자동으로 지령실에 연결되어 인근 순찰차량이 즉각 출동하는 시스템이다.
무다이얼링이 접수될 때마다 그는 기억의 싸늘한 윗목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요양간호사의 말과 달리 어쩌면 어머니는 혼자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자해할 힘도 없이 죽음이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다가온 순간, 어머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의 한 요양원을 찾은 건 4주 전이었다. 지병인 협심증과 당뇨가 있었다고는 하나, 일흔넷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다는 건 애석한 일이었다. 고통 없이 편히 가셨다는 요양간호사의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자신과의 긴 싸움을 끝내고 평온에 든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이뤄낸 평온이었다 해도 축하할 일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과 그렇지 않은 실제 사이에서 늘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그 싸움에 패한 때가 바로 광포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맞아서 팔뼈가 두 번이나 부러지기도 했던 그는 그 괴리에 대해 잘 알았다.
그가 중학생이 되면서 힘에 부치자 어머니는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쑹덩쑹덩 자르거나, 손목에 불거진 푸른 핏줄을 칼로 찌르고, 스카프로 목을 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미수에 그쳤을 뿐,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뒤에 어머니는 태연하게 모자를 쓰거나 손목에 붕대를 감고 외출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았다. 절제와 인내, 거기다 평온함과 우아함까지 지니길 원했다. 그것은 어떤 현자나 왕녀라 할지라도 갖추기 어려운 덕목으로, 성격이 히스테릭하고 인내심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어머니에게는 애당초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늘 우아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럴수록 내적 갈등은 더욱 팽창해서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곤 했다. 그는 어머니가 부드러운 음성과 눈길로 그를 대할 때 가장 두려웠다. 불안정한 어머니의 감정이 언제 또 표변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살한 뒤에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걸 안 건 그가 고등학생이 된 뒤였다.
그는 입관식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았다. 7주 만의 대면이었다. 어머니는 평소 그가 요양원에 찾아가도 별로 반기지 않았고, 만나면 딱히 서로 할 말도 없었다. 달갑지 않은 의무를 행사하기 위해 두 시간 거리를 달려가는 일이 점점 따분해지자, 그는 자신의 의무를 두 달에 한 번으로 조정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화장사가 정성들여 화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거짓된 미소를 가면처럼 걸쳤던 어머니도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가장 정직한 표정을 드러냈다. 삐뚜름하게 굳은 입매는 운명을 조롱하는 듯했고, 좁은 미간은 짜증과 불평의 도끼날이 다녀간 듯 깊숙이 패어 있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표 나지 않게 단장했던 부위가 있었다면 바로 눈썹이었다. 연갈색 섀도로 결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준 아치형의 눈썹은 부드럽고 평온한 모습을 상징하는 거짓 트레이드 마크였다. 더욱이 나이보다 깨끗한 피부와 가느다란 눈은 감정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화장사에게 어머니의 눈썹 단장에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말을 잘못 이해한 화장사는 어머니의 특징 없는 인상을 보완하기 위해 눈썹을 각지고 진하게 그렸다. 그 세련된 눈썹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은 더 완강하고 불행해 보였다. 그는 어머니의 슬픈 미간을 쓰다듬으며 편히 가시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눈물은 그 순간, 안도하는 심정에 아부라도 하듯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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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더 자주 출몰했다. 이제 그는 술집이나 시장 통, 심지어 사람들의 눈 속에서도 안개를 목격하곤 했다. 사람들의 눈은 백내장이 낀 듯 뿌옇다가도 어두워지면 야릇한 광채를 내뿜었다. 자살 미수나 방화 사건이 발생하고 패거리 싸움도 잦아졌다. 현장에서 검거된 피의자들은 놀랄 만큼 태연자약했다. 처음부터 죄의식이나 후회를 느낄 수 없도록 설계된 존재처럼 보였다. 안개는 마침내 인간의 의식까지 잠식한 것 같았다. 지구대 내에서도 위태로운 공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최근 김 소장은 비이성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전형적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풍선처럼 한순간 빵, 터져 버리지 않을까 싶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에게 험한 욕설을 화염방사기처럼 내뿜었다. 분노가 김 소장을 완전히 집어삼킨 꼴이었다. 그는 김 소장의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대해, 그리고 그 분노를 유발시킨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보고가 지체되는 건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초기에 수습하려는 의지가 과하다 보면 공조에 혼선을 빚게 되고, 의도와 달리 진행이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온몸을 분노에 투척한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냉철함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김 소장은 최근 들어 벌써 세 번이나 그에게 분노를 폭발했다. 폭발의 강도는 점점 거세져 마지막엔 그가 집어던진 볼펜에 맞아 눈의 실핏줄이 터지기도 했다. 동료들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분을 뿜고 나면 탈진 상태로 까라져 있는 김 소장을 위로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점점 침울해져갔다.
그는 저녁이면 자전거를 타고 천변 길을 순찰했다. 안개는 벌써 천변 둘레에 매복해 있었다. 그는 안개의 지문이라도 채취하려는 사람처럼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 회색 무리들은 감미로운 술책으로 그를 유인했다. 길고 축축한 혀로 목덜미를 미끄럽게 핥거나, 짙은 살 냄새를 풍겨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술에 취한 것처럼 몸에 열감이 느껴지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꿈속인 듯 아득해졌다. 그는 안개 속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돌이켰다. 그의 사명은 악을 징벌하는 것이다. 배가의 응징, 그것이 그의 교전수칙이었다.
마침내 그는 안개 속에서 지극히 희미하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것은 소리였다. 톤을 한껏 낮춘 조소, 비아냥거림으로 터질 듯 음흉한 웃음소리였다. ‘킬, 킬, 킬,’ 그 소리는 숲의 가만한 뒤채임처럼 은밀한 율동을 가지고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또 몸 밖의 소리가 아닌, 몸 안의 절규처럼 그의 감각을 두드려 깨웠다. 갑자기 머리칼이 곤두서고 심장이 끓어오르며 허파를 부풀렸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우두둑 관절을 일으켜 세웠다. 불끈 움켜쥔 그의 주먹이 전동칫솔처럼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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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이삿짐 박스를 거실에 쌓아둔 채 잠들어 있었다. 어디가 편치 않은지 겁먹은 벌레처럼 잔뜩 웅크린 모습이었다. 아내의 얼굴은 눈두덩에 바른 푸른 섀도 때문에 파리하고 고달파 보였다. 화장을 한 채 잠드는 건 시신뿐이라고 믿는 그에게 아내의 그런 버릇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 한밤중에 깨어 흐린 스탠드 불빛에 비친 아내의 기괴한 얼굴을 볼 때면, 마치 무덤 속에 함께 누워있는 듯해 섬뜩해지곤 했다. 그는 최근 아내의 민낯을 본 적이 없었다. 몇 겹으로 동여맸는지 모를 비밀스러운 표정만을 볼 뿐이다. 채색 유리 같은 눈이 거북해서 그는 아내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눈을 맞추지 않으니 마음도 멀찍이 비껴갔다.
사랑에 대해 특별한 환상이 없는 사람은 만남에 별 가탈을 부리지 않는다. 상대의 미모나 매력이 만남의 선행 조건이 되지 않을뿐더러,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잔물결이라도 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온기였다. 단단히 동여매지 않은, 어딘가 느슨한 존재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온기, 그러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대상일수록 온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용모 또한 남의 눈을 끌만한 어떤 매력도 없었다. 건어물처럼 바싹 마른 몸이며 건조한 표정, 거기다 뚝뚝 부러지는 말투까지, 사람들은 그를 보면 웃다가도 웃음을 뚝 그쳤다. 도저히 웃음이 투과하지 못할 것 같은 표정 때문일 것이다. 그의 표정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언젠가 어린 그가 어머니를 보고 웃었을 때 비웃는다며 호되게 뺨을 맞은 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무의식은 웃음을 작동시키는 안면근육까지 퇴화시켜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웃음을 잃자 눈물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웃음과 눈물이 어떻게 한 메커니즘인지는 몰랐다. 다만 자신의 의식과 상관없이 수시로 밀려드는 희비의 조수(潮水)를 막기 위해 무의식이란 놈이 높다란 방조제를 쌓았을지도 몰랐다.
늘 혼자였지만 외로움에 대해서도 애달파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호의와 악의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미 외로움이 체질화되어 있었기에, 사실 외롭지 않다는 게 어떤 건지도 잘 몰랐다. 아내는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자였다. 작고 통통한 체격에 발음이 분명치 않은 중간 톤의 목소리, 금방 돌아서도 도저히 그 윤곽을 떠올릴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 상대를 제압하기는커녕 시선 처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눈빛, 어찌 보면 다소곳하나 달리 보면 매우 비밀스럽고 자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말이 없다는 거였다. 묻는 말에 짧게 답하거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없는 대신 잘 웃었다. 그의 모든 말에 박수를 치듯 활짝 웃어주었다. 웃음이 만능 키라는 사실을, 웃음이 가장 깊은 대화라는 사실을 그는 아내를 통해 깨달았다.
말이 없으니 질문도 없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와 혈액형은 무언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긴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어떤 요구나 주문도 없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늘 높다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듯 불안하게 출렁거리던 그의 마음을 땅에 편히 내려놓게 만들었다. 이미 세상 떠난 아버지는 물론이고,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20년째 소식이 끊긴 누나에 관해 털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궁금해 하지 않았다. 마치 비밀스러운 어떤 임무를 띤 사람처럼, 그림자보다 더 조용히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떠벌리고 싶지 않은 허접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지극히 무덤덤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 무덤덤함이 위장술이든 삶에 지친 결과든 타고난 성격 탓이든 상관없었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까지 비슷해서, 그는 간단한 서류 신고만으로 아내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 뒤 거실에 쌓아둔 이삿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버려두면 정리하는 것과는 담쌓은 아내가 집 꼴을 갖추는데 몇 달이 더 걸릴는지 몰랐다. 결국 불편한 건 자신이었다. 그는 며칠째 박스마다 뒤져서 옷을 꺼냈고, 출근할 때면 현관께에 밀쳐둔 박스에서 구두 짝을 찾아 신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곤 했다. 현관이란 젊은 부부의 스킨십을 위한 장소지 화를 돋우는 장소가 아니다. 그는 박스에서 물건을 꺼내 전부 제자리에 넣은 뒤에 신발장도 정리했다. 신발장은 묵은 먼지로 퀴퀴하고 더러웠다. 그는 신발장을 대충 닦아내고 신발을 제자리에 넣었다. 경첩이 망가진 신발장은 문을 여닫을 때마다 내려앉아서 마치 탈구한 관절을 꿰맞추듯 안간힘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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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시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의 가장 큰 지류인 서쪽 천변에서 발견한 시체는 오른쪽 팔목이 잘린 30대 초반의 사내였다. 상처부위가 연장으로 처리한 것처럼 깨끗한 걸로 보아서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되었다. 시체의 신원은 폭행 전과가 있는 자로 얼마 전 지구대에서 취중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다. 형사과 강력 팀이 파견되어 사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합숙하던 원룸을 수색하고,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휴대전화 전원이 마지막으로 켜진 위치를 중심으로 탐문조사까지 벌였으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거기다 김 소장의 실종까지 겹쳐 지구대는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김 소장이 모습을 감춘 지 사흘이 지났다. 휴대전화는 꺼져있고 가족들과도 연락두절이었다. 가족이라 해야 이혼한 전처와 그 전처가 맡아 기르는 딸 하나가 전부였다. 전담부서가 설치되고 본부에서는 순찰 인원을 늘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서쪽 천변을 순찰했다. 자전거 순찰은 차량의 진입이 곤란한 주택가 골목길이나 공원, 천변, 재래시장 등을 자유롭게 돌아볼 수 있고, 주민들과 긴밀한 접촉도 할 수 있어서 정보 수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배기가스를 줄여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다.
얼마 사이에 수초가 우거진 천변은 물길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물 냄새는 탁하고 비릿했다. 저녁이면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천변 길은 살인사건 이후 인적이 끊어졌다. 어쩌다 지나는 사람마저 ?기 듯 허둥지둥 지나갔다. 느리게 스쳐가는 풍경 사이로 냄새를 가득 실은 바람이 천변 너머에서 불어왔다. 먼지 냄새, 화장품 냄새, 땀 냄새, 고기 타는 냄새, 알코올 냄새, 지린내, 비린내, 노린내, 암모니아 냄새, 냄새, 냄새……하루의 서글픈 일상이 저물어가는 냄새였다. 그 모든 냄새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선지비린내였다. 낯익은 듯 낯선, 근원도 확실치 않은 그 냄새는 한번 맡으면 심한 두통까지 따라왔다. 그가 유독 냄새에 민감한 것은 타고난 체질 탓도 있었다. 손발이 차고 설사가 잦은 그는 쉽게 체하고 식성도 까다로웠다. 거기다 후각 또한 남달리 예민했다. 직장에서도 부재중에 누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댔는지 냄새로 금방 알아챘다. 심지어는 씻어 놓은 컵에서 좀 전에 누가 그 컵을 사용했는지도 알았다. 동료들은 그에게 공항 근무를 추천하며 더 이상 마약탐지견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제는 시에서 꽤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 병원을 찾아갔다. 눈이 길고 매섭게 생긴 젊은 의사는 그의 콧속, 귓속, 목안까지 꼼꼼히 들여다보며, 몇 가지 질문과 검사를 하더니 의외의 소견을 내놓았다. 냄새가 그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이다. 냄새가 몸 안에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의사는 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체험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나 상황에 강한 느낌을 받으면 그 냄새에 대해 과민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구체적인 두통의 증상을 예로 들어 실제의 냄새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의사는 냄새에서 발생한 화학성분이 콧속의 통각을 자극해서 두통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했다. 선지비린내가 존재하는 곳이 기억 속이라니,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그는 냄새에 대해 어떤 실오리기만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는 퇴근하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마트에는 놀랄 만큼 많은 종류의 탈취제가 있었다. 신발에서부터 발, 의류, 자동차, 실내용까지 가지 수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머릿속의 냄새를 없애는 탈취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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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이 둔감하던 아내가 갑자기 냄새에 예민해졌다. 냄새에 예민해지면서 식탐도 자취를 감추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빵과 과자가 봉지도 뜯기지 않은 채 식탁에 그대로 놓여있고, 식품을 사다 나르는 일도 없었다. 아내는 잠이 많아졌고 더욱 게을러졌다. 그가 출근할 때 보여준 자세로 퇴근 때까지 그대로 누워있는 날도 있었다. 그는 답답했으나 아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아내가 자신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쪽지방 어디에 거주한다는 장모도 만난 적이 없고, 왕래하는 친척마저 없었다. 심지어 친구와 통화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어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가 몇 마디 묻기라도 할라치면 아내는 심문에 응하지 않으려는 피고처럼 입을 완강하게 다물었다. 최근엔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밝혀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미 밝혀진 사실조차 다시 한 번 검증하고, 확인하는 그의 직업적 특성은 그럴 때 의심의 경광등이 번쩍거렸다.
아내는 보이는 그대로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그건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보이는 것마다, 아내가 보여주는 것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집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음식 부스러기와 과일 껍질들, 발효와 부패의 중간에 놓여있는 온갖 냄새 사이로 초파리들이 극성을 부렸다. 모든 물건은 항상 뒤엉켜있거나 종적이 묘연한 상태여서 주인과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오직 제자리에 놓여있는 거라곤 3인용 소파와 19인치 텔레비전 정도였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게을러서 늘 쥐색 코르덴바지에 색 바랜 누런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결혼 전에 혼자 지내던 자신의 방을 떠올렸다. 방문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나 늘 완벽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다. 물건이란 물건은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제 자리에 붙어 있었고, 집기나 가구도 얼룩 한 점 없이 청결했다. 그의 자취방에 들렀던 아내는 선뜻 자리에 앉지 못했다. 무섭다는 것이었다. 어른보다 아이가 더 무섭다거나, 원칙이 혁명보다 무섭다는 얘긴 들어보았어도, 깨끗한 게 무섭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며칠 전에는 화장대 서랍에 들어있던 아내의 가계부를 몰래 들쳐보았다. 가계부의 항목에는 과일, 야채, 고기라고만 쓰여 있고 세세한 품목은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지출 난에도 애매모호한 숫자의 스케치 같은 기록만 있었다. ‘5000원이 약간 넘음. 20000원에서 좀 모자람.’ 그건 수입과 지출을 빈틈없이 짜 맞추는 가계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기록이었다. 결혼 전에 혼자 살면서 파 한 단, 달걀 한 개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던 자신의 가계부와 비교하면 완전 엉터리 주먹구구였다.
아내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갔다. 살이 빠져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이 노골적인 병색을 드러냈다. 야근을 하고 아침에 귀가했을 때, 아내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아챘다. 심장이 지진이 난 것처럼 무섭게 요동쳤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격렬한 몸의 반응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자 곧 그것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진심으로 기대했던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무신경을 자책했다.
그는 퇴근하기 전에 아내를 위해 마트에서 귤 한 봉지를 샀다. 급격한 변화는 자신이 먼저 감당하기 쑥스러웠다. 그가 견딜만한 변화는 고작 귤 한 봉지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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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끊어질 듯 괴로운 비명소리에 그는 잠이 깼다. 눈을 뜨니 주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그는 최근 종종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비명을 지를 때도 있고 어디서 비명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그 소리는 매번 너무 처절해서 잠이 깨면 기억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달아난 잠을 잡아오기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이미 아득한 거리로 사라진 뒤였다. 감은 눈 속으로 심야 영화를 상영하듯 수많은 얼굴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비몽사몽간에 짧은 악몽까지 다녀갔다. 그는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였다. 아내는 부장품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양이 걸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캄캄한 거실 벽을 점자처럼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화들짝 놀란 어둠이 검은 망토자락을 끌고 재빨리 사라졌다. 그는 어둠이 빠져나간 자리를 휘둘러보았다. 가뜩이나 좁은 거실은 변함없이 지저분했고, 세탁기 속에 들어 있어야할 빨래거리가 여기 저기 쌓여 있었다.
그는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맞은 편 동의 불빛 몇 점이 흐릿하게 깨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처럼 흐린 기억의 틈새로 얼굴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그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을 나간 누나였다. 얼굴이 네모지고 뚱뚱했던 누나는 공부도 늘 꼴찌였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아서 어두워지면 문밖을 나가지도 못했다. 누나는 특히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귀신이 돌아다니는 불길한 시간이라고 했다. 귀신이 어디 있느냐고 핀잔하면 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밤중에 변소에서 오줌 눌 때 귀신이 등 뒤에서 내 머리칼 세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어. 넷을 셀 때 뛰쳐나왔지. 머리칼을 다 센 사람은 죽는대.” 그렇게 귀신을 무서워하던 누나는 지금 어디서 곤한 잠에 빠져 있을까. 어쩌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삶이 그녀의 잠을 훼방하지는 않을까.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잠이 덜 깬 식도 근육이 놀랐는지 목 안이 뻐근했다. 그는 탁자 위의 놓인 어지러운 신문 더미 속에서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볼륨을 최대한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첫 화면에서부터 날카로운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비명을 이해하려고 화면에다 두 눈을 고정시켰다. 화면을 꽉 채운 여자의 벌거벗은 몸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유명 정치인이 내연녀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은 방법이었다. 현장을 처음 발견한 호텔 청소부가 지른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피는 살아있는 물체처럼 꿈틀거리며 화면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피를 멈추려고 급히 텔레비전을 껐다. 갑자기 밀려든 정적과 함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희망은 언제부터 욕망이란 단어로 대치된 걸까.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욕망으로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신용카드처럼 욕망을 자동 결제한다. 청구서가 도착할 때쯤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후회하지만, 그 후회를 잊기 위해서 또 다른 욕망에 탐닉한다. 그는 간밤에 6지구대의 한 호프집 앞에서 주운 전단지를 떠올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어느 종교 단체의 집회를 알리는 글이었다. 괴로울 만큼 난해한 글이었지만 정신을 긴장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은 누구며 하늘에 있다는 악의 영들은 또 무엇인가. 그 주장들이 사실이라면 보이지 않는 삶의 배후에 그토록 많은 악의 복병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단지의 분위기는 이미 전쟁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듯 했다. 총알과 폭탄이 난무하는 곳만 전장이 아니었다. 죄악이 들끓는 곳도 전장이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몇 개의 의문들이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신은 선한 존재라면서 왜 악을 창조했을까. 신의 변호인인 어떤 신학자는 신은 절대선이며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절대선에서 유출되었으며, 신의 사랑에서 폭발한 마그마가 흘러나오는 것이 창조의 과정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마그마는 산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온도가 식어간다. 물론 식어도 본질은 같으며 용암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는 악을 정의하길, 창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 바로 사랑의 결핍이 악이라고 했다. 그래서 악이 존재한다기보다 선이 결핍되었다는 게 옳다는 것이다. 교묘한 변론이었다. 선에서 파생되어 단지 온도가 식었을 뿐이라는 마그마가, 즉 사랑의 결핍이 악이라면 그는 이제껏 악의 구덩이에서 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왔다. 그의 피와 살을 이룬 모든 것이 악이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며 잇새로 토막토막 끊어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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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몇 시간이고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특별히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아내는 천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W시가 발칵 뒤집어지도록 시끄러운 이 일에 아내의 반응은 의외였다. 말이 없는 것과 표현이 없는 것은 달랐다. 어쩌면 아내의 침묵은 가장 확실한 의사표현일 수도 있었다.
현란한 조명 아래 상반신을 검은 가죽으로 동여맨 네댓 명의 남자가 노래인지 염불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몸을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은 이상하게 그의 기분을 멋대로 조종하며 혼란스러운 잔상을 남긴다.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입력된 노랫말이 헛걸음질을 하듯 종일 입술에서 맴돌기도 한다. 아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에 정신이 꽂혀 있었다. 푸른 아이섀도 아래 깜박이는 눈동자가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종일 웃음을 켜놓고 살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낯선 얼굴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었다. 아내의 검은 머리칼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요즘 왠지 잠이 부족했다. 야간근무 날을 제외하곤 충분히 잔다고 믿는 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눈알이 뻑뻑하고 온몸은 축축하니 무거웠다. 밤새 이슬을 맞으며 거리를 헤맨 사람 같았다. 더구나 오늘은 종일 두통에 시달린 날이었다. “아이는 안 낳을 거야.” 아내가 갑자기 그에게 드라마 대사 같은 멘트를 날렸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니? 마치 예매해둔 영화표를 무르거나, 예정된 여행을 취소하겠다는 심상한 말투였다. 그의 심장이 물 위를 지나는 제트스키처럼 빠르게 달렸다. “미쳤군, 이유가 뭐야?” 그의 날카로운 반격에 아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놀란 눈을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내의 얼굴 위로 의혹과 두려움이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텔레비전 속에서 튀어나온 소리일지도 몰랐다. 드라마 속의 여자들은 언제부턴가 완곡하게 말하는 법을 버리고 강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 그 날카로운 말투를 대할 때마다 그는 못에라도 찔린 듯 움찔움찔 놀라곤 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이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잘못 들었다고 믿기엔 너무나 확연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혹 아내의 마음속 깊이 꽁꽁 숨겨둔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는 최근 들어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소리들은 너무 은밀하고 적나라해서 마치 감춰둔 내면의 소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찬찬히 더듬어 생각하기엔 기분이 영 죽 같았다. 아내에게서 먼저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경험상 거짓말탐지기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호흡이나 표정에서 진위를 가려낼 수 있었다. 아내의 눈은 어느새 텔레비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아내의 표정을 훑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유가 되고, 또 모든 것이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만 알 뿐, 더 이상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실낱같은 단서라면 어떤 고뇌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는 아내의 무심한 입술과 달리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번뜩인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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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되었던 김 소장이 강 하구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목에 마트 상호가 인쇄된 오렌지색 포장끈이 감겨 있는 것으로 보아 자살을 시도했거나 아니면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김 소장의 죽음은 최근에 보인 심리적 증상을 참작하여 자살 쪽으로 무게가 실렸으나, 확실한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의뢰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천변 길로 퇴근했다. 피곤하고 기분이 몹시 언짢은 날이었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만 싶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거실 창가에 처음 보는 벽돌색 꽃무늬 여행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의 얼굴로 열기가 확 솟구쳤다. 아내가 가끔 재활용 분리수거함에서 집어오는 물건 중의 하나일 수도 있으나 언뜻 봐도 새것 같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아내가 몰래 병원에 다녀왔고, 곧 그의 곁을 떠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몸이 사납게 떨렸다. 아내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 국수를 삶았다. 그는 식욕이 전혀 없었다. 국수 국물에서 나는 멸치 비린내가 비위에 거슬렸다. 아내는 국수를 그릇에 담고 냉장고에서 배추겉절이를 꺼냈다. 배추겉절이에 혈흔처럼 점점이 엉긴 고춧가루를 보자 그는 마침내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내는 긴 국수 가락을 한번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입속에 밀어 넣었다. 거의 흡입하는 수준이었다. 숨을 쉬는 게 용했다. 아내가 입술에 묻은 고춧가루를 혀로 핥으며 그에게 얼른 먹기를 채근했다. 아내의 혀가 그렇게 붉고 긴 줄은 처음 알았다. 등줄기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 서름한 느낌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불길한 감정이었다. 손에 끈적한 땀이 고였다. 그의 국수는 이미 불어서 한 덩이로 엉겨 있었다.
아내는 마음이 바쁜지 자신의 빈 국수그릇을 개수대로 가져가서 서둘러 씻었다.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며 심장에서 북소리가 났다. 온몸의 피가 결승점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아이를 마음대로 처형하고 이대로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서슬에 놀란 아내가 뒷걸음을 치며 식탁 의자를 넘어뜨렸다. 그의 몸이 과녁을 겨냥한 탄환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그는 의자에 발이 걸려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폭약이 터진 듯 큰소리가 울리며 격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눈을 뜨니 이상하게 그는 부엌 바닥에 누워있었다. 축축한 목덜미와 뺨으로 흘러내리는 액체에서 선지비린내가 났다. 그를 여러 날 괴롭히던 바로 그 냄새였다. 그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내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경찰봉을 한 손에 쥔 아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킬, 킬, 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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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장은 지구대 사무실에서 상황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자정을 1시간 정도 앞둔 시각이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다 유리문에 비치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밖에 웬 커다란 가방을 든 여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하다 보면, 심야에 지구대를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막상 문 앞에 와서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이런 곳이 처음이거나, 말 못할 어떤 사정이 있는 경우였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 여자를 안으로 들였다.
여자는 쥐색 코르덴바지에 색 바랜 누런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얼굴엔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상습적인 구타의 흔적으로 보이는 상처가 얼굴 곳곳에 있었다. 양 뺨의 찰과상 외에도, 코뼈가 휘었고 눈두덩엔 섀도를 칠한 것처럼 짙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여자는 꽃무늬로 뒤덮인 조잡한 벽돌색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마 가해자와 관련된 물건인 듯 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민원을 취급하지만 창구에 직접 증거물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 가지의 겉옷과 속옷, 양말, 그리고 경찰봉과 검정 비닐봉지, 그 비닐봉지 속에 다시 신문지로 여러 겹 싼 뭉치 안에 든 것은 검자주색 피가 엉겨 붙은 코팅 장갑과 휴대용 쇠톱, 그리고 마트 상호가 새겨진 오렌지색 포장끈이었다. 여자는 약간의 정신지체 장애가 있어 보였다. 피 묻은 경찰봉을 한 손에 꼭 쥔 채 재미난 놀이라도 하듯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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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꾸는 정원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