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라는 나라를 지워 버리겠다.."
1984년 사망한 2차대전 당시 영국공군 사령관 아서 T. 해리스 경은 "백정(Butcher)"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소속 군인 중에서 해리스만큼 불쾌한 인물을 찿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는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친절하게 굴기도 했지만 친구도 없고 취미도 없었다. 책이라곤 읽는 법이 없고 음악도 듣지 아니하였다. 그가 일생동안 간직한 단 하나의 거대한 열정은 증오심이었다. 독일에 겨눠진 증오도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육체노동자들을 향해 타오른 증오였다.
해리스는 극우 보수주이자였다. 당시 많은 부유층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종종 영국 노동 계급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곤 했다. 독일 노동 계급은 말할 필요도 없다.당대 지식인들 중 외관상 상당히 온건한 이들도 이문제에 대해서서만큼은 황당한 견해를 글로 남기곤 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 전쟁 중 서로에게 인종적 혐오감을 느끼게 된 것과 다소 비슷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도시들을 산산이 부숴뜨리는 데 미군 지도자들의 혐오감이 한몫했듯, 해리스의 혐오감은 그가 지시한 폭탄들이 떨어질 때 지상에 있는 노동자나 어린이들에 대해 아무런 동점심도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 세계관으로 발전한것이다.
해리스가 영국 공군 사령관에 취임하게 된 것은 1942년이었다. 당시의 폭격은 그야말로 원시적이어서, 비행기 조종사는 눈으로 지상을 보면서 비행을 하거나 자신의 방향과 속도를 지도와 조합해서 하나하나 계산해서 자신의 위치를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의 유도장치같은 건 까마득한 미래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폭격수는 한 수 더 떠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 조준기에 눈을 대고 폭탄을 하나하나 떨궈줘야 했다. 그야말로 농가 지붕에서 바늘던져 콩 꿰기였던
셈이다.
2차 세계대전이 길어지면서 누가 전쟁의 뒷바라지를 오래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고, 결국 공중전이란 적의 진지를 폭격하는 전술폭격에서 적의 민간인 지구와 군수시설지구를 공격하는 전략폭격, 총력전으로 변해갔다. 이런 엉망진창인 폭격기들을 가지고 고사포가 공격하기 힘든 야간에 폭격을 하자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개떼처럼 달려드는 독일군의 전투기들은 별개
문제고.....
해리스는 공군 총사령관이 되자 여기에 해결책을 제시했다:
1. 개떼처럼 많은 폭격기를 동원한다.
2. 선도비행대는 폭격을 하지 않고 오로지 조명탄만 투하한다. 그 뒤 부대는 밝아진 틈을 타 폭탄을 계속 "쏟아붓는다"
3. 짧은 시간에 대량의 폭격기를 동원한다. 몇 대 정도는 독일군 전투기에 희생되도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 고안된 것이 같은 해 5월 실행된 "밀레니엄 작전"이었다. 말 그대로 천 대의 폭격기를 동원한 막강한 화력으로 독일의 전쟁수행의지를 꺾는다는 이 작전은 이전의 폭격작전과 전혀 다른 방식의 군사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이전의 폭격은 폭격기를 동원해 임의의 목적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밀레니엄 작전의 폭격은 그 임의의 목적이 처음부터 없었다.
겉으로는 적군의 공장들을 주 목표물로 삼는 척햇지만, 사실 그는 공장이나 건설 부지를 정확히 맟추려고 노력하는 일이 철저한 시간 낭비라고 확신했다. 비행기들이 적군 잠수함을 찿아 바다 위를 막연히 맴도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산만함은 필요치 않았다. 꼭 해야 한다면 허락이야 하겟지만, 그 자신은 결코 장려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는 건물이나 무기를 파괴하고 싶은 만큼이나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다. RAF가 축적해온 대량의 고성능 폭약과 발화제들은 노동자를 직접 겨눠야 했다. 사람들이 살고 잇는 집 위로 떨어져야 했다. 그는 그것이 적의 힘을 약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굳게 믿엇다. 부르네발 기습작전이 있던 달에, 폭격기 사령부는 지령 22호를 공포했다. 지령의 내용은 앞으로 모든 공습에서 "주 목표점은 해군 조선소나 비행기 제조창 등이 아니라 건물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여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이 점이 확실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 내부나 민간 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된 반대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해리스는 부르네발 자료를 근거로 강력히 주장함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는 채프를 사용하여 도시의 레이더 보호망을 교란시킬 것이다. 도시가 무력해진 처지에 놓이면 그는 뭐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을 파괴할 수도 있겠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원하는 만큼 죽일 수도 있다.
융단폭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해리스가 실력을 행사할 도시로 어디를 낙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함부르크야말로 노동자 주거지가 빡빡하게 밀집되있는 거대한 산업중심지였다. 게다가 북해에 면하고 잇는데다 엘베 강을 끼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경계에서는 비행기 조종이 특히 쉽다.
출격은 7월27일 저녁 11시였다.
RAF 주력 중폭격기, 랭카스터 (좌)와 핼리팩스(우)
비행기들은 어두운 북해 상공을 날며 발각되지 않고 있었다.
1시간후 RAF에서 레이다 교란용 알루미늄 조각이 선발기에 의해 뿌려졌고 특히 독일 대공포사수들은 작동은 멈추거나 마구잡이로 쏴댔다. 비행중인 전투기조종사들은 걷잡을 수 없이 당황하여 지상 통제자에게 방향 지시를 요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자들 중 몇몇은 라디오를 통해 조종사들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흩어져! 폭탄이 증식하고 있다!" 성난 다른 몇몇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나선 비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하늘 가득 불어나고 잇는 알루미늄 발신파와 비행기를 구분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소용없었다. 이제 영국 폭격기 를 대적할 상대는 없었다. 먼저 고성능 폭발물을 떨어뜨려 급수관을 뚫고(나중에 통계에 따르면 2천개소 이상에서 피해를 입었다) 집들을 부쉈다. 벽돌이 쪼개지고 파편이 마구 날아갔다. 그제야 주 폭탄창의 문이 열리고 화학 발연제들이 쏱아지기 시작했다.
열기는 함부르크의 시가를 따라 번져가면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공기에 떠다니던 먼지 덩어리는 영기를 머금어 폭팔했다. 마찬가지로 함부르크에 목제 건물들에 잇는 탄소도 열기를 받아들여 산소와 반응하고선, 불꽃으로 타올랐다. 태양이 숲을 키울 때 오랜 세월에 걸쳐 나무에 불어넣었던 에너지는 갑자기 공포스럽게 분출하기 시작했다.
불이 일어나고, 불길이 서로 뭉쳐 번져가고, 도시 전체가 활활 타올랏다.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어떻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열다섯 살 짜리 소녀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엄마가 젖은 담요로 나를 감싸고는 입을 맞췄어요. 그리고 '뛰어가거라!' 라고 말했어요. 나는 문간에서 잠치 주저했지만…….. 곧 거리로 달려나갓어요……..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했어요."
열아홉 살의 한 소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아이페슈트라세 대로를 가로지르려 했다. 그런데 발을 내딛으러는 찰나, 소녀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깨달앗다. 불길은 거리까지 녹이고 있었다.
"길 한중간에 잇는 사람들은 산 채로 아스팔트에 몸이 붙어 있었어요. 아무 생각없이 거리로 뛰쳐나간 거였어요. 발이 땅에 붙어버리니까 떼어내려고 손을 대고, 그래서 손도 붙어버렸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손과 무릎이 땅에 붙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엇어요."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한 선도기 편대의 대장이 한때 살아있는 도시였던 불덩어리를 내려다보고 잇었다. 다른 조종사들보다 나이가 많은 편인 스물일곱의 청년이었다. "불쌍한 개자식들...." 그는 라디오에 대고 중얼거렷다. 조종사는 마지막으로 힐끗 아래를 바라본 뒤 랭카스터 폭격기를 몰아 사라졌다. 하룻밤의 공습은 막을 내렷다........................
결국! 해리스의 작전은 주효했다. 어찌나 작전이 성공적이었는지 늦게 출발한 폭격기들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타오르는 쾰른시의 화염을 두 눈으로 똑똑이 볼 수 있었다. 쾰른은 250여개의 공장이 도시와 함께 잿더미가 되고 하루 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집을 잃거나 사망, 혹은 부상했다.
영국군 피해는 예상했던 50대를 밑도는 40대였다.
성공의 맛을 본 해리스는 같은 작전을 반복해서 실행했다. 1943년 함부르크 공습작전에는 무려 3천 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 도시를 무차별 폭격, 삽시간에 4만 명이 죽고 함부르크 시내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는 참사가 벌어졌으며,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공습작전은 단 한 시간만에 드레스덴 시민 10만 명이 죽어, 독일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날로 기억된다. 말 그대로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은 사상 최대의 학살극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해리스의 손에 죽어간 독일인은 50만 명이 넘는다.
해리스는 자신에게 "도살자" 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그는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난 원래 사람을 죽이라고 이 자리에 앉혀진 사람이야!!"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나치 독일 전범들에게..
"똑같이 사람을 죽이고도 우리가 다른점은 난 자유롭지만 당신들은 죽거나 감옥에 간다는것이다."
"............."
출처 - http://blog.paran.com/kwhunx?p_eye=blog + 구글 이미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