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추로 가는 길목에 서서...
만추로 가는 때라 하늘은 드높고 눈이 시리도록 맑은 이름하여 천고마비의 계절에 들판에는 오곡백과 알알이 영근 곡식들이 가을걷이에 들녁이 휑하니 비워져간다.
흔히 오곡백과(五穀百果)라 함은 다섯가지의 곡식과 백가지의 과일을 뜻하는데, 오곡(五穀)은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이르는 말이고, 백과(百果)는 백가지의 과일을 뜻하기도 하지만 ‘온갖’ 이라는 의미다.
오곡이 딱 부러지게 다섯가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나 옛날 인도에서는 보리, 밀, 쌀, 콩, 깨를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콩, 수수 또는 참깨, 보리, 피, 콩, 쌀을 오곡이라 했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또 주요 식량이 무엇이냐에 따라 오곡의 종류가 변했음을 알수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의 오곡(五穀)은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말한다.
○ 숙맥이라...
중국의 진나라에 주자(周子)라는 왕이 있었다. 주자는 원래 서열상 왕이 될수 없었는데 그의 형이 아둔한 관계로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얘기고 '주자의 형'이 왕이 되지 못한 이면에는 또 다른 얘기가 있다.
당시 진나라에는 왕권을 둘러싸고 심각한 권력다툼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일단의 신하들은 진나라 왕 여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자인 주자를 왕위에 앉혔다.
주자에겐 몇살 위의 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열을 무시 불과 14살 어린아이를 왕으로 앉힌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쿠데타 세력들은 "주자에겐 형이 있는데 지혜가 없어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했으므로 왕으로 세울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춘추좌씨전'에 보면 "불능변숙맥(不能辨菽麥)"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이 변해 "숙맥불변(菽麥不辨)"이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다시 "숙맥(菽麥)"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어느날 주자는 형을 앉혀놓고 방바닥에 콩과 보리를 주르르 쏟았다. 주자와 달리 주자의 형은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모자랐다.
“형님! 잘 보십시오 이렇게 크고 둥들둥글하게 생긴게 콩 입니다” 주자는 콩을 들고 자세히 설명했다.
형은 질질 흐르는 콧물을 훌쩍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건 보리가 아닌가?”
주자는 답답했지만 형에게 화를 낼수는 없었다. 주자가 이번에는 보리를 들고 찬찬히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형님! 이게 보리입니다 보세요~ 콩보다 작고 생긴것도 콩은 동글동글한데 보리는 납작하지요?“
주자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콩과 보리를 설명했고 콩과 보리를 번갈아 가며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던 형은 그제야 구별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제 알았어 둥글고 큰 것이 콩이고 약간 납작하고 작은 것이 보리지?” “예, 형님 맞습니다”
주자는 가르친 보람이 있자 마음이 흐뭇했다. 다음 날 주자가 형에게 부탁했다. “형님! 창고에 가서 콩 좀 꺼내다 주실래요?”
형은 얼른 창고로 들어가 주자가 얘기한걸 자루채 가져왔다. 그런데 자루를 들여다본 주자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형님...! 이건 ...”
“아니 ~ 뭐가 잘못된 건가?”
“어제 그렇게 가르쳐 드렸는데도... 형님, 이건 보리잖아요, 보리!”
형은 무안을 당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숙맥불변(菽麥不變) 이는 콩(菽)과 보리(麥)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콩숙(菽)자와 보리맥(麥)자를 써서 '숙맥(菽麥)'이라 한다.
즉 주자의 형처럼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켜 숙맥(菽麥)이라 하게 된것이다.
숙맥의 원뜻은 숙맥불변(菽麥不變)에서 나온 말이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 사리 분별을 못하는 바보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 속담에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와 같은 뜻이다.
○ 숙맥의 시대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高)가 있었다. 간신 조고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 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신하들은 세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침묵파' 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선택한 부류였다.
또한 부류는 '사슴파'였다.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이었다.
마지막 한 부류는 '숙맥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숙맥들만 남고 모든 신하는 죽임을 당했다. 바야흐로 숙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숙맥의 시대는 채 몇 년도 가지 못했다. 더는 숙맥으로 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봉기해 결국 진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전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생긴 배경이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되고, 변명이 사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숙맥의 시대라 하고, 이런 시대를 숙맥의 난(亂) 시대라고 정의한다.
숙맥의 난맥상은 그 어떤 혼란의 시대보다 폐해가 크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술수가 성행한다. 이런 술수을 부리며 세상 사람들을 흘리는 야바위꾼같은 이들이 숙맥의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된다.
'숙맥교' 교주들은 분별력을 잃은 숙맥들을 이끌고 허무맹랑한 말로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잇속을 챙긴다. 이미 좀비가 된 숙맥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교주들의 구호에 맞춰 절규하고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댄다.
이념이 사람을 잡아먹고, 관념이 현실을 가린 숙맥의 난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늘 '숙맥의 난'으로 들끓었다.
서양에는 르네상스가 동양에는 성리학이 이성을 기치로 '숙맥의 난'을 평정하려 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혀 좌절됐다.
진실은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너무 과분한 이상이었기 때문일까?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숙맥의 난' 시대에 절정을 달리고 있다.
숙과 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