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3 반(半)궤도 장갑차(Half-track, 하프트랙)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대량 생산해 운용한 병력수송장갑차다. 기본형을 바탕으로 수많은 변형과 파생형을 개발해 자주포 장갑차나 대공포 장갑차 등으로 운용했다. 미국은 렌드-리스법(Lend-Lease Act: 무기대여법)에 따라 이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군에도 다수 공여했다. 전쟁 중 이를 노획한 나치 독일군도 상당수를 운용했다. 전후 냉전 시대에도 6·25전쟁, 1~4차 중동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서 활약했다.
뒷부분에는 무한궤도가 장착되었지만 앞부분은 바퀴가 양쪽으로 달린 형태여서 반(半)궤도 장갑차라고 부른다. 뒤쪽의 무한궤도는 험지에서도 바퀴가 빠지지 않고 잘 다닐 수 있게 해준다. 그 덕분에 차량의 노지 주행 능력이 높아 어떠한 지형에서도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앞쪽에 바퀴가 달려 완전한 무한궤도 차량보다 방향 전환을 쉽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반궤도 장갑차는 일반 차량과 무한궤도 차량의 장점을 고루 취하려는 의도에서 개발이 이뤄졌다.
미군이 반궤도 차량이나 장갑차에 주목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서부전선에서 전차부대를 운용했던 경험에서 비롯한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을 지키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물자 지원만 했다. 하지만 1915년 5월 7일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RMS Lusitania)가 아일랜드 남부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해 미국인 123명을 포함한 1,198명의 승객과 선원이 목숨을 잃고 761명만 살아남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참전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도 비무장 민간 선박을 공격하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비난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독일은 잠수함의 교전 수칙을 바꾸겠다며 성의를 보였다.
그러던 중 1917년 1월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Felix von Eckhardt)에게 보낸 암호 전문이 공개되면서 미국 여론이 결정적으로 연합군 참전 쪽으로 돌아섰다. 영국 암호해독반이 해독해 미국에 제공한 치머만의 전문 내용은 “독일과 미국과의 중립 유지가 어려울 경우 멕시코와 동맹을 맺어 미국을 공격하는 방안을 추진하라”며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주면 (1848년 멕시코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맺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으로 빼앗겼던 영토 중)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미국 여론은 들끓었고 윌슨 대통령은 그해 4월 6일 의회에 대독 선전포고를 제안했고 의회는 상하원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미군은 그해 7월 5일 미국원정군(AEF, American Expeditionary Force)을 창설했으며 존 조지프 퍼싱(John Joseph Pershing) 장군이 지휘를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5만 3,402명의 전사자와 6만 3,114명의 비전투사망자, 20만 4,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원정군은 1917년 12월 서부 전선에서 미군 최초의 기계화부대인 미국원정군 전차군단(Tank Corps of the American Expeditionary Forces)을 창설했다. 애초 프랑스가 개발한 르노 FT(Renault FT) 경전차 2,000대와 영국이 설계한 마크 VI(Mark VI) 중전차 200대로 무장할 계획이었지만, 각각 77대의 경전차를 갖춘 20개 대대와 45대의 중전차를 장비한 10개 대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8개 중전차대대와 21개 경전차대대가 조직되었다. 그중에서도 전투에 참가한 부대는 2개 중전차대대와 2개 경전차대대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군단으로 명성을 떨친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Jr.)은 당시 기갑부대에 배속된 미군 장교 1호로 기록되었다.
미국원정군 전차군단은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 전선에서 철수했으며 배치 병력은 미 본토로 귀환했다. 전차군단은 미 국방부가 제1차 세게대전을 치르기 위해 조직했던 국민군(National Army) 소속으로 미 본토에서 훈련을 계속하다가 1920년 국민군이 해체되면서 정규 육군 예하 보병부대의 일부로 편제되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전차를 운용하며 전투를 치러본 경험은 미군에게 상당한 영감을 줬다. 전차의 방호력과 기동력을 확인하면서 기갑부대의 가치를 절감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관련 병력으로 1921년 제305전차여단을 구성했으며, 이는 제1전차집단으로 발전했다. 1929년 9월 제1전차연대가 창설되었으며, 이는 1932년 10월 경전차를 갖춘 제66보병연대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이들 전차부대를 운용하며 훈련과 전술 개발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기갑 지원 보병을 태우고 전차를 따라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탑승 보병도 보호할 수 있는 기동성 있는 차량이나 장갑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전차처럼 모든 지형에서 운행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되었다. 당시 미군이 추진하던 육군의 기동력 강화 계획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소요가 제기되었다.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 등장해 1920, 1930년대 프랑스에서 생산되던 반궤도 차량(Half–track, 하프트랙)에 주목했다. 미군이 요구하는 기동력과 험지 운행 능력을 동시에 갖췄기 때문이다. 반궤도 차량은 프랑스의 군사 엔지니어이자 발명가 아돌프 케그레스(Adolphe Kégresse, 1879~1943)가 고안했다. 케그레스는 1905년 러시아로 가서 차르 니콜라이 2세(Nikolai II)의 자동차 개발실에서 일했다. 눈과 얼음이 많은 러시아에서 차량의 기동성을 높일 목적으로 일반 자동차를 개조해 앞바퀴를 그대로 두고 뒷바퀴는 무한궤도로 바꾼 것이 반궤도 차량이다. 케그레스 반궤도 차량의 무한궤도는 단단한 금속이 아니라 고무 재질의 연질 재료를 사용했다. 그는 반궤도 차량의 바닥에 스키까지 달아 눈과 얼음 속에서 차량의 기동성을 높였다.
케그레스의 반궤도 차량은 러시아에서 군사 장비로도 응용되었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서 장륜형인 오스틴 장갑차(Austin Armoured Car)를 사들였다. 4바퀴 이륜구동형으로 최고속도 시속 56km에 행동반경이 201km에 이르렀다. 차체에 3~6mm 장갑을 대고 2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1916년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의 푸틸로프(Putilov) 공장에서 이를 자체 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1917년 3월에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로마노프(Romanov) 황가의 제정이 무너지고 같은 해 11월에 볼셰비키(Bolsheviki)가 ‘10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생산이 무산될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1917~1922)이 한창이던 1918~1920년 붉은 군대는 이를 자체 제작해 실전에 투입했다. 오스틴 장갑차의 러시아 버전은 오스틴 푸틸로트(Austin-Putilov)로 불렀고, 그 가운데 일부에 케그레스 반궤도 차량의 샤시를 장착한 것은 오스틴-케그레스(Austin-Kégresse)로 불렀다. 반궤도 차량이 실전에서 사용된 첫 사례다.
케그레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적백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귀국해 시트로엥(Citroën) 자동차 회사에서 일했다. 시트로엥은 1921~1937년 케그레스의 시스템을 장착한 노지 및 군사용 반궤도 차량을 생산했다. 케그레스의 반궤도 차량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민간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개발과 개량이 이뤄진 셈이다. 시트로엥-케그로스로 불린 이 반궤도 차량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모든 지형에서 운용 능력을 보여줬다.
고속의 보병 전술 차량 개발을 목표로 개발 작업을 진행하던 미 육군 병참국은 케그레스 반궤도 차량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프랑스에서 몇 대의 시트로엥-케그로스 차량을 구입해 성능 개량 작업을 벌인 뒤 생산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 육군 병참국은 1939년 반궤도 장갑차 시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미군의 반궤도 장갑차는 기존에 개발한 장륜형 장갑차에서 앞바퀴는 그대로 두고 뒷바퀴 부분에 케그레스 시스템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이에 앞서 1937년 미군은 4개의 바퀴가 달린 화이트 모터 사(White Motor Company)의 M3 스카우트(Scout) 장갑차를 채용했다. M3 스카우트 장갑차는 무한궤도 없이 바퀴만 4개 달린 장륜형 장갑차다. 정찰, 수색, 지휘, 앰뷸런스와 야포 견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운용되었다.
그 뒤 기병의 요구로 M3 스카우트 장갑차를 기반으로 하되, 그보다 노지 주행 성능이 더 나은 장갑 하프트랙(armoured half–track), 즉 반궤도 장갑차 시제품 T7을 개발하게 되었다. T7은 M3 스카우트 장갑차의 전반부 섀시와 차체에 케그레스 시스템)에 사용된 궤도 차대 부품을 결합했다. 시제품의 무한궤도는 강철 케이블로 만든 기초 재료를 포함해 모두 단단한 고무 재질로 이뤄졌다.
포병에서도 기동성이 있는 야포견인차량 개발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강력한 화이트(White) 사의 160AX 엔진을 장비한 T14가 시험 제작되었다. 보병부대는 기갑사단에 수반하기 위한 차량에 유효하다는 판단에서 보병 1개 분대를 수송할 수 있도록 차체 후반부를 연장한 T8의 시제품을 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T14는 M2 반궤도 장갑차로, T8은 M3 반궤도 장갑차로 미 육군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1942년 아프리카 전선에 처음으로 투입된 M3 하프트랙의 모습 <출처: CriticalPast 유튜브 채널>
특징
M3 반궤도 장갑차의 시제품은 미국의 자동차 제작사인 화이트 모터 사(White Motor Company)는 자사가 제작하던 M3 순찰차의 섀시(chassis: 차대)와 차체(body)를 이용해 제작했다. 화이트 모터 사의 디자인은 신뢰성과 생산 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기존 자동차에 사용하던 상업적인 부품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도록 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디자인은 1940년대에 생산성 향상을 위해 표준화했다.
엔진은 화이트 모터 사의 화이트 160AX나 IHC 레드 다이아몬드(Red Diamond) 450 중 하나를 장착하도록 했다. 변속으로 인한 기어 손상이 작고 조작도 비교적 쉬운 콘스턴트 메시 방식(constant mesh type: 항상 맞물리는 식)의 수동 변속기를 채택했다. 모든 기어를 맞물려둔 채로 변속비를 바꾸어가는 방식이다. 전진 4단과 후진 1단으로 이뤄졌다.
M3 반궤도 장갑차는 1940년 오토카 사(Autocar Company)가 생산을 시작해 미 육군에 대량으로 배치되었다. M2와 M3 모두 화이트 모터 사뿐 아니라 오토카 사와 다이아몬드 T 모터 사(Diamond T Motor Company)에서도 나눠서 생산했다. 한 회사로는 전쟁 중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표준화 덕분에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도 동일한 제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M3 반궤도 장갑차는 군수품 대량 생산 방식에서 한 획을 그었다.
M3는 M2보다 조금 더 길다. 원래 야포견인용으로 개발된 M2와 달리 M3는 병력 수송이 주목적이었으므로 운전병 외에 12명의 소총 분대원이 탈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M3는 차량 후미에 출입문을 설치하고 내부에 양쪽으로 각각 5개의 좌석을 설치했으며 전방 운전석에 3개의 좌석을 마련했다.
M3 반궤도 장갑차는 병력수송용을 기본형으로 대전차와 대공자주포, 자주박격포 등 다양한 파생형이 개발되고 생산되었다. 생산 비용을 줄인 버전을 포함해 모두 5만 3,813대가 생산되었다. 병력수송용과 야포견인용이 3만 9,436대, 파생형이 1만 4,377대다.
결론적으로 미군의 반궤도 장갑차는 기존 스카우트 장륜형 장갑차의 뒤쪽 바퀴 부분 대신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명목뿐인 장갑을 댄 차량이다. 하지만 비교적 강력한 엔진으로 앞바퀴를 구동해 힘이 좋고 험지 주행 능력이 뛰어났다. 고가에다 부품이 복잡한 독일식 반궤도 장갑차보다 단가와 생산성에서는 물론 실용성과 기동성에서도 앞섰다. 포장도로에서 최고속도 시속 72km를 낼 수 있다.
대량 생산된 M2 반궤도 장갑차는 M2 반궤도 장갑차와 함께 렌드-리스를 통해 미국이 아닌 다른 연합군에도 다량 공급되었다. 반궤도 장갑차의 대량생산과 해외 연합군 공여의 배경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38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다. 1941년 3월 11일 발효된 렌드-리스법에 따라 영국, 자유프랑스군, 중화민국에 이어 나중에는 소련까지 포함한 연합군에 식량, 석유, 물자를 지원했다. 이는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지원 물자에는 군함과 군용 항공기, 지상 무기체계까지 포함되었다. 지원은 대개 무상이었으며 일부 군함은 전후 돌려받았다. 미국은 무기를 공여하는 대가로 연합군 영토의 육군이나 해군 기지를 제공받았다. 이 법에 따라 미국은 다른 연합국에 모두 당시 가격으로 501억 달러(2017년 기준 약 6,670억 달러에 해당)에 이르는 물자를 제공했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쏟아부은 전체 전비의 17%에 해당한다. 영국에 314억 달러(2017년 기준 약 4,180억 달러), 소련에 113억 달러(2017년 기준 약 1,500억 달러), 프랑스에 32억 달러(2017년 기준 426억 달러), 중화민국에 16억 달러(2017년 기준 약 213억 달러), 다른 연합군에 26억 달러(2017년 기준 약 346억 달러)에 해당하는 현물이 각각 제공되었다.
렌드-리스를 통해 미국은 1931년 이래 유지했던 유럽에 대한 불개입과 중립정책을 사실상 끝냈다. 뿐만 아니라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1,6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이 가운데 40만 5,399명이 전사하고 67만 1,278명이 부상했다. 미군 13만 201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 가운데 11만 6,129명이 살아서 귀국했다.
케그레스의 반궤도 차량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은 물론 독일군 측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독일군도 노획한 M2와 M3 반궤도 장갑차의 성능과 유용성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운용했기 때문이다.
3A1 반궤도 장갑차의 설원 운행 장면 <출처: VeteransMuseum 유튜브 채널>
* M3 반궤도 장갑차의 운용 현황 및 파생형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소개됩니다.
저자 소개
채수윤 영국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가며 현대 중국학을 연구했다. 러시아와 발칸 지역을 비롯한 동유럽의 분쟁사와 대외 관계사, 서유럽 국가 지도자들의 위기관리 리더십, 중국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분쟁사와 무기체계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