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패지관 (豊沛之館) 에 대하여
전주객사현판문
조선왕조는
전주를 풍패지향이라 해서 조선의 관향으로 삼았었다.
전주가 고향인 사람들은 풍패 지관이 무엇인지 쯤은 알아야 한다.
풍패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자방의 고향이다.
그래서 풍패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사람의 고향의 대칭이 되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전주 이씨이고
전주는 이성계의 5대조 穆祖 李安社의 고향이다.
따라서 전주는조선왕조의 관향 즉 豊沛之鄕인 것이다.
전주성의 풍남문과 패서문은 풍패에서 따온 이름이다.
전주성의 동쪽문은 完東門, 북쪽문은 拱北門이었었다.
지금은 남쪽문인 豊南門만 남아 있다.
전주객사의 정문에는 豊沛之館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한국에서 제일 큰 현판이란다.
글자 하나의 세로 크기가 어른 키 보다 크다.현판의 가로 길이는
4.6m나 된다.
저 현판의 글씨는 명나라 재상이요, 명필가인 주지번이 썼단다.
명나라 재상인 주지번은 무슨 연유로
한양도 아닌 전주까지 내려와서 저 현판 글씨를 썼을까?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에 가면 望慕堂이 있다.
저 망모당의 현판글씨도 주지번이 썼다.
망모정은 瓢翁 송영구가 자신의 선친을 기리기 위해서
자신의 집 뒤란에 지은 정자이다.
표옹은 병조 참판과 경상감사를 지낸 사람이다.
표옹은 1593년에 송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다.
명나라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간 것이다.
그 때가 임진왜란 중이어서 송절사는 사실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러간 사절단이었다.
송영구가 묶고 있는 방에서 들으니
부엌에서 장작불을 때는 젊은이가 뭔가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가만히 귀기울여 듣자니 그건 장자의 南華經이었다.
놀란 송영구가 그 젊은이를 방으로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젊은이 왈
자기는 남월이고향인데 명나라 수도에 와서 과거를 봤는데 낙방했단다.
설상가상 고향에 돌아갈 여비 마저 떨어져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여단다.
그래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청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단다.
표옹이 듣고 보니 젊은이가 참으로 딱했다.
해서 표옹은 그 젊은이에게 과거 시험지 쓰는 요령을 가르쳐 주고,
서책과 귀향할 여비까지 쥐어 주었다.
2년 후 그 젊은이는 과거에 장원급제 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주지번이었다.
그로 부터 13년 후인 1613년에
주지번은 명나라의 재상이 되어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조선에 온 주지번은 옛은인인 표옹을 찾아 뵙고자 했다.
한양에서관리들에게 수소문 했더니 표옹이 이미 죽었다고 했다.
주지번은 관리들의 말을 믿지 않고
말 한 필과 하인 한명을 데리고 직접 익산 왕궁으로 향했다.
주지번은 가는 도중 민폐를 끼칠까 봐서
관리들이 표옹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간파한 것이다.
전주의 객사를 먼저 찾은 주지번은 일박 하고 왕궁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豊沛之館이란 객사의 현판을 써주었다.
왕궁에서 표옹과 재회한 주지번은 큰 절 부터 올렸다.
두 사람은 얼사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명필가인 주지번은 망모당의 현판을 고쳐 써주고,
풍수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 답게 표옹의 음택지까지 명당자리에 잡아주고 떠나갔다.
성균관의 명륜당 현판과 강릉경포대의 제일강산도 주지번의 글씨이다.
허난설헌은 조선보다 명나라에서 더 유명했단다.
허난설헌을 중국 명나라에 소개한 사람도 주지번이다.
그가 허균과 교류 하던 사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