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에 익은 자색 옷에 긴 포목 형태의 청색 겉옷을 두르시고 등장합니다. 청색은 하느님의 색깔입니다. 물·청결·고요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육화’, 다른 말로는 청색을 겉에 입으심으로써 ‘밖으로 드러나신 하느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콘에서 자주색 옷에 청색 겉옷은 예수님만, 청색 옷에 자주색 겉옷은 성모님만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흔히 동굴 안에 소와 나귀가 그려지는데, 어둠 속에서 동굴 밖 아기 예수님을 향하여 공경하는 이 짐승들은 다른 나라 민족(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3)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방인인 동방 박사의 경배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이스라엘 백성보다 이방인들에게서 강한 믿음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10-13; 마르 7,24-30 참조)
요셉
요셉은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데, 무엇인가 생각하고 고민에 차있는 듯합니다. 그 앞에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털옷을 입은 노인이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콘에 따라 여러 형태로 등장합니다. 즉 성모님의 동정성을 요셉이 의심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사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상징합니다. 또는 천사로부터 듣고 본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는 양치기라든지, 계획된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알리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해당 성경 구절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로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천사가 꿈에 그 의심을 풀어줘 그는 천사가 시킨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마태 1,18-25)(작품 1)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갈등없이 완전히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는 요셉만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신앙인이 믿음 안에서 해결해야할 모서리 돌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우리 인간으로서 의심·고민·갈등하는 삶을 드러내는 각본으로 꾸며집니다.
요셉의 뒤에 있는 작은 나무는 이사이의 나무로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 1-2)라는 구절에서 나온 나무인 다윗 가문의 자손을 상징합니다.(작품 2)
아기를 비추는 세 줄기의 빛은 삼위일체를 나타냅니다. 성자는 살아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그분을 통해 그 안에 계신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요한 8,19; 10,30 참조) 요한 사도는 복음에서 그분이 아버지임을 알고, 아버지에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씻김과 산파
왜 주님 성탄 이콘에서 아기를 씻기는 장면이 나올까요? 우선 아기를 씻기는 의식은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으로, 구원으로 가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즉 구원의 순서로서 깨끗이 하려면 씻어야 한다는 것, 물로 씻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 이를 통해 영혼을 씻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외경에 의하면(야고보 원복음) 여기에 나오는 여인은 살로메라는 산파입니다. 그녀는 아기가 성령에 의해 동정녀에 잉태되었고, 구세주로 오시게 되었다는 요셉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그 여인이 손으로 임신부를 만지자마자 손이 불에 덴 듯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믿지 못한 잘못을 빌며 울면서 애원하였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아기에 손을 대어라’라고 하자 아기 예수님에게 손을 대었고 다시 낫게 되었다는 여인입니다.
못 미더워 웃는 살로메는 그 당시 요셉이 산후조리를 위해 필요로 했던 산파로서, 여기서는 믿지 못했던 하와(Eva)를 상징합니다. 아기를 씻기며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하와로 인한 원죄에서 벗어나게 됨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하와의 교만에 의한 불복종으로 죽음이 왔지만, 동정 마리아를 통해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씻기는 의식은 순수한 인간적 행동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그것으로 세례의 전조를 보여 줍니다.
별, 동방박사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중략)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3)
공중에 나는 천사는 별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별에 빛을 주는원천적인 빛이 오신다며, 우리에게 오실 메시아를 환상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별을 따라 새로 태어난 왕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라고 놀라운 소식을 헤로데 왕에게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는 하느님의 계약에서 제외되었던 사람, 구세주를 찾는 이방인들을 대표합니다.(작품 3)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민수 24,17), 그 별을 따라가야 하지만, 유다인은 그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보았던 그 길로 따라가야 아버지를 뵐 수가 있을 것입니다.(요한 14,6 참조) 그들이 보기를 원하고 기다리던 메시아,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있었던 하느님을(요한 14,9-10 참조) 이스라엘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립니다. 황금은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고, 유향은 하느님께 특별히 올렸던 신성을, 몰약은 인성을 드러냅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구세주의 모습은 다분히 오늘날 기쁨만이 아닌, 깊은 묵상 거리이기도 합니다. 먼저 삭막한 성탄의 모습은 당시 광야를 연상케 해주며, 그때 육신적으로 굶주린 이스라엘을 위해 광야에 내렸던 만나처럼(탈출 16,31 참조) 이제는 우리에게 오신 살아 계신 빵(요한 6,35.48 참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숙소를 찾아 헤매야 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산모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방을 내주지 않았던 인색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 것은(루카 10,36-37 참조) 마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이사 29,13)”라는 이사야 예언처럼 훗날 메시아를 버리는 이스라엘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작품 4)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은 그분의 백성은 유다 나라였지만, 오늘날 그분의 백성은 누구일까요?
첫댓글 요셉을 깊이 알았음을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