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日이 먼저 올지 내생來生이 먼저 올지 박석원 barkswon@hanmail.net
대학 시절 학교 앞에는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을 겨냥한 소탈한 술집들이 몇 있었다. 학생들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그곳을 찾곤 했는데 우리는 그 집을 대폿집이라 불렀다. 지금이야 대포라는 말이 사라져서 듣기 어려운 말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술집 유리창에 흔하게 적혀 있던 말이었다. 대포란 큰 술잔을 이르는 순우리말인데, 안주를 따로 시키지 않고도 대폿술을 마실 수 있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그런 집이었다. 내가 즐겨 찾던 그 대폿집 벽에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오늘은 현금 내일은 외상」 오늘만 현금을 받고 내일은 외상술을 주겠다는 술집 주인장의 선심성 공약이다. 하지만 내일이 되어도 「오늘은 현금 내일은 외상」이었으니 나는 그 집에서 내일의 외상술을 마시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는 넉살이 없어 그런 술을 마실 생각도 해보지 못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내일의 외상술을 마실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성능이 좋은 카메라도 과거나 미래를 찍을 수 없듯 우리의 삶도 과거나 미래를 살아낼 수는 없다. 다만 오늘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살만하니 암에 걸려 죽게 생겼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가끔 듣는다. 자식 교육시켜 내보내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살만하게 되었는데 덜컥 불치의 병에 걸려 인생이 허망하게 된 것이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못한다고 나중을 기약하면 결국에는 그렇게 후회만 남게 된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금은 금거래소의 금이 아니라 지금이요 오늘이다.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 누리는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먹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지금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지금 만나야 한다. 나중에는 소화기능이 떨어져 먹고 싶어도 못 먹고, 체력이 떨어져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다리가 떨려 가고 싶은 곳도 갈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숙명은 만남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즐기라는 쉐익스피어의 말이나. 다리가 떨리기 전에 떨리는 가슴으로 여행을 떠나라는 어느 신부神父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나는 내일의 그럴 듯한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나에게 나중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전통시장에 갔다. 전통시장은 언제 가도 사람 사는 향기와 역동적인 생기가 있어 좋다. 시장에서 내가 알아서 살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아내가 사면 나는 짐꾼이 되어 물건을 들고 이삿짐 뒤에 강아지 따르듯 따라다닐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이런 소소한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시장 초입에는 우리말이 서툰 여인이 붕어빵을 굽는다. 물고기 비린내도 나지 않는 고소한 붕어빵이 두 개에 천원이다. 장보기를 마치면 우리는 사냥에 성공한 수달 부부처럼 붕어 한 마리씩을 입에 물고 시장을 나온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붕어빵 하나에도 행복은 있다. 오늘은 시장에서 싱싱한 아귀 한 마리를 샀다. 솜씨 좋은 아내의 아귀탕에 막걸리 한 잔을 생각하며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동네 마트에서 막걸리 한 병을 사야지.’ 오늘 하고 싶은 일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내일來日이 먼저 올지 내생來生이 먼저 올지 누가 아는가. 내 삶에 다시 올 수 없는 이 순간의 행복을 잘 누리며 살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즉시 사용이 가능한 현금처럼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오늘을 현금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현금」이라는 50여년 전의 일화가 새삼 내 삶의 길을 행복으로 이끈다. ‘아차, 마트에 들르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네.’ 2024년 10월 가을을 맞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