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산책> 12회
유배지에서의 최후~~
정국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 두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2년(1507) 윤 정월에 조광보(趙光輔)라는 인물이 핵심 대신인 박원종(朴元宗)ㆍ 노공필(盧公弼) 등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이라고 비판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비밀히 중상하려 하니 마음놓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면서 시골로 물러가겠다고 밝혔다
<중종 2년 2월 2일>
그러나 대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중종 2년 4월 13ㆍ16ㆍ22ㆍ23일>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지금 경상북도 울진)로 유배되고 자손들도 멀리 귀양갔다.
그때의 사간들의 사평(史評)은 유자광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압축하고 있다.
「유자광은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다시 갑자년의 사화를 일으켜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
<중종 2년 5월 1일>
이 사평대로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지금까지도 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서자 출신 인물을 살펴본다. 그 인물은 ~~
우리들은 조선의 명필하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린다.
그러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또 한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바로 양사언((楊士彦 1517 - 1584)이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아래 시조를 지은 사람이 바로 양사언이다.
「 태산가(泰山歌)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楊士彦)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다.
1517년 경기도 포천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다.
조선 전기(명종)의 문신·문장가·서예가이며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1540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54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함흥부윤, 평창군수, 강릉부사를 지내고 성균관에 있다가 회양군수, 철원군수, 고성군수를 지냈다.
40여년의 관직생활동안 따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청렴하고 검소하였게 살았다.
서예와 시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란 친필을 남기는 등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때가 명종, 선조 연간에 회양 부사로 있던 때라고 한다.
또한 평창 군수로 있을 때는 궁핍한 백성의 실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고전번역서인 성호사설에는 봉래(蓬來) 양사언(楊士彥)의 글씨는 표하여 마치 하늘에 치솟고 허공을 걸어가는 기상이 있으니, 그 글씨 속에 선골(仙骨)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농암집(조선 중기의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 ∼ 1555)의 시문집)에는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마치 ”용이 꿈틀대는 것 같은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 고 극찬을 하였다. 🍂🍃🍂
ㅡ 계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