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8 - 태백(泰伯) - ⑬ |
1 |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독실하게 믿고서 학문을 좋아하며, 목숨을 걸고서 바른 도를 닦아야 한다.
篤厚而力也 不篤信 則不能好學 然篤信而不好學 則所信 或非其正 不守死 則不能以善其道 然守死而不足以善其道 則亦徒死而已 蓋守死者 篤信之效 善道者 好學之功 篤이란 두텁고 힘쓰는 것이다. 독실하게 믿지 못하면 배우기를 좋아할 수 없다. 그러나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믿는 바가 혹시 제대로 된 올바름이 아닐 수도 있다. 죽음으로써 지키지 않는다면, 그 도를 선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지키기만 할 뿐 그 도를 선하게 하기에 부족하다면, 역시 헛되이 죽는 것일 따름이다. 대개 죽음으로써 지킨다는 것은 독실하게 믿은 효과이고, 도를 선하게 한다는 것은 배우기를 좋아한 공이다.
朱子曰 篤信是信得深厚牢固 守死只是以死守之 善道猶工欲善其事之善 又如善吾生善吾死之善 不壞了道也 주자가 말하길,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굳세고 견고한 것이다. 죽도록 지킨다는 것은 그저 죽음으로써 지킨다는 것이다. 도를 선하게 함이란 장인이 그 일을 좋게 한다는 善과 같고, 또한 내 삶을 善하게 여기고 내 죽음을 善하게 여긴다는 善과 같은 것으로서, 道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篤信乃能好學 亦有徒篤信而不能好學者 不好學以明理愈篤信而愈不正 不可回矣 故篤信又須是好學 守死乃能善道 不能守死臨利害又變了 則不能善道 然亦有守死而不足以善其道者 如荊軻聶政之事徒死而已 比干之死方能善其道 若不善道 但知守死也無益 故守死又須是善道 然雖曰篤信而未能至死不變 則其信亦不篤矣 故能守死方見篤信之效 雖曰 好學而不能推以善道 則其學亦無用矣 故能善道方見好學之功 能篤信好學 乃能守死善道而篤信好學 又須要守死善道 數義錯綜其義始備 此四者之所以更相爲用而不可有一闕焉者也 주자가 말하길, “독실하게 믿어야만 마침내 능히 배우기를 좋아할 수 있지만, 역시 헛되이 독실하게 믿기만 할 뿐 배우기를 좋아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를 밝히지 않는다면, 독실하게 믿을수록 더욱 올바르지 않게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실하게 믿으면 또한 반드시 배우기를 좋아해야 하는 것이다. 죽도록 지킨다면 마침내 능히 道를 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죽도록 지키지 못하고 利害관계에 임하여 또 다시 변해 버린다면, 道를 선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죽도록 지키기만 할 뿐 그 道를 선하게 하기에 부족한 사람도 있으니, 예컨대 荊軻와 섭정의 일 같은 것은 헛되이 죽었을 따름이다. 비간의 죽음은 비로소 그 道를 선하게 할 수 있었으니, 만약 도를 선하게 하지 않고, 그저 죽도록 지킬 줄만 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이 때문에 죽도록 지키면서도 다시 반드시 도를 선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독실하게 믿는다고 말하지만 죽음에 이르더라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믿음은 역시 독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죽더라도 지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독실하게 믿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비록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지라도, 미루어 道를 선하게 할 수 없다면, 그 배움은 역시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道를 선하게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배우기를 좋아하는 공을 보는 것이다. 능히 독실하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할 수 있다면, 마침내 능히 죽도록 지키고 도를 선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한 다음 다시 반드시 죽도록 지키고 道를 선하게 해야만, 여러 義가 모여 얽혀서 그 義가 비로소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가 다시 서로 쓰임이 되어서 한가지라도 빠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鄭氏曰 許行陳相非不篤信 曰好學則未也 召忽筍息非不守死 曰善道則非也 정씨가 말하길, “허행과 진상은 독실하게 믿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아니다. 소홀과 순식이 비록 죽도록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道를 선하게 하였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아니하며, 천하에 도가 있다면 자기를 드러내고, 도가 없다면 숨느니라.
君子見危授命 則仕危邦者 無可去之義 在外則不入 可也 亂邦 未危而刑政紀綱紊矣 故潔其身而去之 天下 擧一世而言 無道則隱其身而不見也 此惟篤信好學 守死善道者 能之 군자는 나라가 위험한 것을 보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니, 그렇다면 위험한 나라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그곳을 떠날 의로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 밖에 있다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다. 어지러운 나라는 아직 위험하지는 않지만 법과 정사의 기강이 문란한 나라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여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천하는 세상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도가 없다면 곧 자기 몸을 숨겨서 드러내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도를 믿기를 독실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며 도를 선하게 하는 사람만이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朱子曰 未仕在外 則不入 已仕在內 見其紀綱亂 不能從吾之諫 則當去之 不早見幾而作 則亂必危亡 不可去矣 주자가 말하길, “아직 벼슬을 하지 않아 그 나라 밖에 있다면 들어가지 않고, 이미 벼슬을 하여 그 나라 안에 있을 경우, 그 기강이 어지러워 나의 간언을 따를 수 없음을 알았다면, 마땅히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일찍 그 기미를 보고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난리나 나서 반드시 위급하고 망하게 될 지경이 되어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氏曰 君子在危之外則不入 在亂之中 則不居 非徒以遠害也 去就不審以及於難 則其死也亦死於愚而已 非死於義也 是故 貧賤患難之中 君子貴於守死而亦不徒死 守死將以善其道也 徒死豈得爲善哉 제씨가 말하길, “군자는 위급한 나라의 밖에 있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지러운 나라 안에 있다면, 그곳에 거하지 않으니, 헛되이 해를 멀리하는 것일 따름은 아니다. 떠나고 나아감을 잘 살피지 못하여 위난에 이르렀다면, 그 죽는 것도 역시 어리석음 때문에 죽는 것일 뿐, 의로움에 죽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빈천과 환난 중에서도 군자는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은 이로써 장차 그 道를 선하게 하기 위함이니, 헛되이 죽는다면, 어찌 善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有道不必待十分太平然後出 無道亦不必待十分大亂然後隱 有道如天將曉 雖未甚明 然自此只向明去 不可不出爲之用 無道如天將夜 雖未甚暗 然自此只向暗去 知其後來必不可支持 須見幾而作 可也 주자가 말하길, “道가 있다면, 반드시 대단히 태평해진 연후에 벼슬길에 나설 필요가 없고, 道가 없다면, 또한 반드시 대단히 크게 혼란해진 연후에 물러나 숨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道가 있다면, 마치 하늘이 장차 밝아지려 할 적에 비록 아직 대단히 밝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때부터 그저 밝은 쪽을 향하여 가는 것과 같으니, 벼슬길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쓰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도가 없다면, 마치 하늘이 장차 밤이 되려 할 적에 비록 아직 대단히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때부터 그저 어둠을 향해 가는 것과 같으니, 나중에는 반드시 그것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반드시 기미를 보고서 일어나야만 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好學以善道 則見道明矣 篤信而守死 則信道篤矣 見道明信道篤 必能審去就出處之宜 守常固 必行其道 遇變亦必能守死以善其道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배우기를 좋아함으로써 道를 선하게 한다면, 道를 알아봄이 밝을 것이다. 독실하게 믿으면서 죽음으로써 지킨다면, 道를 믿음이 독실할 것이다. 道를 알아봄이 밝고 道를 믿음이 독실하다면, 반드시 나라를 떠나고 나라에 나아감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합당함을 잘 살필 수 있을 것이고, 지킴이 항상 굳세어 반드시 그 道를 행할 것이니, 변고를 당하더라도 역시 반드시 죽음으로써 지켜서 그 道를 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危亂不入不居 尙有可入可居之邦 若天下無道 則無適而可 惟有隱而已 쌍봉요씨가 말하길, “위태롭거나 어지러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거주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들어갈 수 있고 거주할 수 있는 나라는 있다. 그러나 만약 천하에 전부 道가 없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괜찮은 곳이 없으니, 오직 숨는 것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
3 |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나라에 도가 있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음에도 부유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世治而無可行之道 世亂而無能守之節 碌碌庸人 不足以爲士矣 可恥之甚也 세상이 잘 다스려짐에도 행할 만한 도를 갖고 있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움에도 능히 지킬 수 있는 절개가 없다면, 이는 평범하고 무능한 사람으로서, 선비가 되기에 부족한 것으로서, 대단히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다.
慶源輔氏曰 所貴於士者 爲其進而用則有可行之道 退而藏則有能守之節 故退不失己 進不失義 若咸無焉 則是碌碌庸人而不足以爲有亡矣 冒士之名而無士之實 豈不可恥之甚哉 경원보씨가 말하길, “선비에게 귀한 것은 그 나아가서 기용되면 행할만한 道를 가지고 있고 물러나 숨으면 능히 지킬 수 있는 절개가 있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물러나도 자신을 잃지 않고 나아가도 의로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이 모두 없다면, 이는 평범하고 무능한 사람이니, 있고 없고를 따지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선비의 이름을 덮어 쓰고서 선비의 실질이 없다면, 어찌 부끄러워할 만함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洪氏曰 邦無道而富貴 固可恥 邦有道而貧賤 何足恥乎 蓋有道之邦 必用有道之士 無可用之道 所以爲恥也 홍씨가 말하길,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하다면, 본래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지만, 나라에 도가 있음에도 빈천하다면, 어찌하여 족히 부끄러워할 만한 것인가? 대체로 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반드시 도를 갖고 있는 선비를 기용할 것이므로, 쓸 만한 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 때문에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 晁氏曰 有學有守而去就之義潔 出處之分 明然後 爲君子之全德也 조씨가 말하길, “배움이 있고 지킴이 있으면서도 나라를 떠나고 나라에 나아감의 뜻이 깨끗하고 벼슬길에 나가고 안 나감의 구분이 명확한 연후에 군자의 온전한 덕이 된다.”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邦有道而貧賤是無學也 邦無道而富貴是無守也 쌍보요씨가 말하길, “나라에 道가 있음에도 貧賤한 것은 배움이 없기 때문이고, 나라에 道가 없음에도 富貴한 것은 지킴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勿軒熊氏曰 學者先須辯得篤信守死底心 又做得好學善道底事 然後於出處去就 見得明 守得定 用之有可行 舍之有可藏也 篤信是知之眞 守死是行之篤 물헌웅씨가 말하길, “배우는 자는 먼저 반드시 독실하게 믿고 죽음으로써 지키는 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고 道를 선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후에 出處와 去就에 대하여, 밝게 보고서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니, 쓰이면 행할 만한 것이 있고, 버려지면 숨길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篤信이란 앎이 참된 것이고, 守死란 행함이 독실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首兩句雖四者相爲用 不可缺一 然集註曰 守死者篤信之效 善道者好學之功 則第一句最重 蓋有學貴乎有守 然必有學然後能有守 學問之深者 雖以之處生死之變 可也 而況於去就之義 出處之分哉 危邦而入 亂邦而居 雖死不足以爲善 有道無可見而貧賤 無道不能隱而富貴 雖生而甚爲可恥 此皆無學力者之所爲也 故夫子曰 信而好古 曰 好古敏求 曰 好學 其敎人 獨於此拳拳焉 운봉호씨가 말하길, “첫 두 구절에서 비록 4가지가 서로 쓰임이 되어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집주에서는 ‘守死라는 것은 篤信의 효과이고, 善道라는 것은 好學의 공효’라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첫 번째 구절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대체로 배움이 있음은 지킴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반드시 배움이 있은 연후에 지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이 깊은 사람은 비록 이로써 생사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가능하니, 하물며 去就의 마땅함과 出處의 분별에 있어서랴! 위태로운 나라임에도 들어가고, 어지러우 나라임에도 거주한다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善한 것으로 여기기에 부족한 것이다. 나라에 道가 있음에도 볼만한 것이 없어서 貧賤하고, 道가 없음에도 능히 숨지 못하고 富貴하다면, 비록 살아남을지라도 대단히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배움에 힘씀이 없는 자들이 하는 짓들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信而好古’라고 말씀하셨고, ‘好古敏求’라고 말씀하셨으며, ‘好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공자께서는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유독 여기에 마음속에 간직하여 늘 잊지 않으셨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