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과 사육신공원,전쟁기념관으로
2018년 11월 20일 서울에 머무르는 기간을 이용해, 동작동 국립공원 현충원과 인근 노들역 주변에 위치한 사육신공원을 돌아보고, 내친김에 용산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이날 국립공원 현충원을 찾게된 연유는, 이틀전 까닭 모를 꿈이 나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기도 했다.
꿈의 내용은 신기하게도, 한번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고나서, 아무래도 박정희 대통령 묘소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립공원 현충원을 찾았던 것이고,사육신 공원은 늘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긴 해도 솔직히 어디 있는지 자세히 몰라 가보지 못했던 곳이기도 하여,일부러 컴에서 검색해 두었다가 함께 가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삼각지 전쟁기념관을 가게된 것도, 나라를 지키려다 먼저 간 국군 용사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계기야 어찌되었건, 하룻동안 돌아본 스케줄은 매우 유익하고 보람스러운 발걸음이라 느껴졌다.
현충원은 여러차례 가본 곳이었지만,입구에서부터 도보로 가다보니 예전에 미쳐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둘러볼수 있어 좋았고,사욱신동원과 전쟁기념관은 직접 현장을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서 얻어진 수확이 컷던 때문이었다.
특히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부영그룹의 이 종근 회장이 펴낸 6,25전쟁 1129일이라는 역사적 자료(비매품)를 선물로 받게되어 무척 귀한 좋은 자료를 얻게 되어 무척 기쁜 마음이였다.
현충원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먼저 간 순국 선열들에게 하늘나라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는 곳이다.
일반병사 묘지에 월남 파병의 영웅 채 명신장군 묘소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아
아름다운 단풍이 아직 이렇게.....
창빈 안씨의 묘역
현충원에는 생경스러운 내용들도 있는 곳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호국지장사 사찰과 조선조 중종 계비 창빈안씨묘역이 그것이다.
왜 이런 게 여기에 있게된 것일까? 까닭이 궁금했다.
현충원이 1952년 부지선정을 하게 되었는데, 사찰은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곳이라 하며, 창빈안씨묘역은 1500년대 이장(移葬)하였다고 하니, 현충원이전부터 잇던 곳인데 현충원이 조성되고서도 그대로 존치(存置)하여, 먼저 자리잡은 것을 배려하고 역사를 거스리지 않았음은 다행스런 표상(表象)이라 할 만하다.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는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이후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바꾸게 된 것이란다.
호국지장사라는 절 이름에 어울리게 현재 절에는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의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소년시절 이곳에 머물면서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창빈안씨묘역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1499∼1549) 묘가 있어 동작릉이라 불린다.
동작구와 동작동의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단다.
본래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무덤이다.
후궁의 무덤은 그냥 묘라고 한다.
그런데도 후궁인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 이유는 손자인 선조(1552∼1608)가 14대 왕에 오른 후,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1874∼1926)까지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繼承)했기 때문이란다.
창빈안씨는 본관이 안산이며 시흥에서 태어나 9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했다고 한다.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의 눈에 들어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종3품인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큰아들 영양군은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둘째인 덕흥군 초는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인 하성군 균은 임금이 되자 아버지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으로 할머니는 정1품인 빈(창빈)으로 추존(推尊)되었다.
성품이 어질었던 명종은 비록 배는 다르지만 조카들을 좋아하였다.
그중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곁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양자(養子)로 받아들여 왕위를 물려주었다.
후궁(後宮) 소생으로는 처음 왕이 된 것이다.
박 정희대통령과 육 영수여사의 묘역
동작동 국립공원에서 9호선 전철을 타면 노들역에 갈수가 있다.
바로 그 전철역 인근에 사육신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육신의 묘역
묘소는 6기가 아닌 7기가 있었다.
그 까닭을 자세히 알아보려 사육신 묘에 관한 기록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의 기념상이 지하철역사안에....
전쟁 기념관에 도착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사력
베트남과 월맹군은 비교가 안될만큼 월등히 베트남이 좋았지만, 월맹에 의해 베트남은 패망하고 말았다.
미국과 자유우방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월맹에 패망한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국민 정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배트공 공산세력이 곳곳에 침투하여 국민 정신을 어지렵혔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이 패망하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 위인이라서 그러는 건지, 평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안보담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있다.
어찌해야 하는건지, 판단은 국민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