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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아름다운 고장.. 충절의 고장..
슬픈 역사의 아픈 과거가 함께하는 고장..
2010 년 6 월 4 일 오늘은 영월
단종 임금의 넋을 위로할겸 유배지 청령포와 단종릉 한번 다녀올까합니다..
세종 임금의 큰아들 문종이 병약하지 않고 건강해서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아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일찍 왕위에 오르지도 않고 안정된 정치에
기반이 흔들리지 않았을터인데..
그만 삼촌 숙부인 세조에 의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고 한양서 멀리 유배를 떠나고
사약을 받고 죽어서도 시신이 영월 동강에 한동안 버려져 방치되었다는 사실에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인간이 사악해야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종 임금 유배지 청령포를 안내하는 광장이네요..
세종 임금의 큰 손자 단종이 아버지 문종 이향이 아프고 병약하지만 않았어도 어땠을까..??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세종이 4 대 문종이 조선 제 5 대 단종임금이 제 6 대 이어서
수양대군의 세조가.. 7 대 조선의 임금이었다는 사실.. 우리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이지요..
영월 기차역이 우리네 건축 양식으로 특이하게 지어져 있군요..
1450 년 2 월 세종 임금이 돌아가시고 곧바로 큰아들 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약 2 년정도밖에 왕위에 있었던 관계로 그의 어린 아들 단종도 흔들리는
조정 정치 현실에서 피해자가 되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요..
영월역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오면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를 안내하는
삿갓 쓴 김삿갓의 조형물이 반가이 맞아주고 있었지만 왠지 마음 한켠에선
싸해져오는 느낌이었다고나할까요..? 암튼 그랬습니다..
2010 년 3 월 하순 어느 일요일날이었는데..
역 광장은 한산했으며 자꾸만 기차역을 뒤돌아 보았답니다..
모처럼의 기차여행.. 단종임금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서운 나날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치고 한양 서울로 돌아갈수 있을까..??
곰곰히 때를 기다렸을 단종 그의 생각으로 가득했던 지난 초봄 어느날이었죠..
세종의 큰아들이 문종 둘째가 수양대군 셋째 아들이 안평대군이었으니
안평대군도 바로 위 형인 수양대군에게 척살당하고 말았으니 세조는 어떤 인물이었을지
그의 무덤을 찿아가 보았는데 사악했던 그 수양대군 세조 임금도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국은 땅속으로 갈걸 왜 그리했는지 무언으로 물어보고 또 물어 보았답니다..
단종이 이 강물을 건너가 절해 고도.. 육지안 천연 감방.. 유배지에 다다르게 되겠네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수양을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는데 어떤 연유인지 금새 수양대군 세조의 아들이 죽고
세조도 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생고생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네요..
성질이 포악한 세조 수양대군은 단종의 생모이신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그 관을 바다에 쳐 넣으라 명하니 참으로 살벌했네요..
사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수 있단말인가..??
강바람도 예사롭지 않았으며 무심히도 흘러가는 강물은 그옛날 그 옛물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여기 왔을 불쌍하고 가엾은 나이 어린 단종 임금을 바라 보았으리라..
강변에 무수한 돌 자갈밭을 걸어봐도 단종대왕 생각뿐이었네요..
수시로 오가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서 유배지가 있는
강 저편으로 단종대왕의 발자취따라 가고 있네요..
단종대왕은 12 살 어린나이인 1452 년에 임금에 오르고
2 년후인 1454 년 1 살 많은 송현수의 따님이신 정순왕후와 결혼을 하지만
금새 이곳 영월로 유배오는 바람에 그때 헤어져 영영 죽어서 무덤까지도
함께하지 못하고 따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수없네요..
눈물의 나날들.. 고통의 나날들.. 어찌 말로다 표현할수 있을까요..??
솔밭길 걸어 가노라니 통곡소리 울음소리 들리어오네요..
솔나무 바람 한점에도 단종의 애환이 스며있는데..
삼촌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등 단종의 충신들을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마져 가차없이 처단하니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서
단종대왕이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을런지.. 힘없는 단종이었네요..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테니까요..
솔밭길 청령포 걸어가고 있으면 또 떠오르는군요..
유배를 보내놓고 서울에 남겨진 그의 왕비 송씨는 궁궐에서 쫒겨나와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에 거처하면서 여승이 있는 청룡사에
평생을 여승이 되어 보내기로하는데.. 애 끓는 마음 절절합니다..
유배지에 감금된 단종의 시녀들이 거처하던
초가집 한채에는 의복과 식사를 책임졌을테고요..
단종임금이 머물렀던 청령포 유배지가 이처럼 기와집이었을까..??
의문이 아닐수 없네요..
어쩌면 초가집 초라한 한채가 시녀들이 머물렀던 초가집과
마주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었습니다..
단종이 영월 유배지에서 사약 받고 죽은후 200 여년이 지난 후에야
숙종 임금의 배려로 단종 임금과 왕비 송씨로 복위되긴했지만
그들의 한 많은 삶을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수가 없네요..
영월에 유배 중인 단종이 관풍헌 자규루에 올라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새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시를 짓기를..
일자원금출제궁 (一自怨禽出帝宮) 원한맺힌 새 한마리가 궁중에서 나온 뒤
고신쌍영벽산중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매인다..
가면야야면부가 (暇眠夜夜面無假)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궁한년년한불궁 (窮限年年恨不窮) 해가 지고 해가 떠도 한은 끝이 없구나..
성단효장잔월백 (聲斷曉墻殘月白)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담장에는 달빛만 희고
혈루춘곡락화홍 (血淚春谷落花紅) 피 눈물 나는 봄 골짜기에는 낙화만 붉구나..
천롱상미문애소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하내수인이독총 (何奈愁人耳獨聰)
어쩌다 수심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지..
나이 어린 단종을 임금에서 내치고 사약까지 먹인 삼촌
수양대군 세조가 저세상에서 어찌 아버지 세종을 쳐다 볼것이며
큰형 문종에겐 또 뭐라 말할것인가..??
친동생 안평에게는 또 뭐라 말하리..
조카 단종대왕을 어찌 만날수가 있을런지..
한양을 떠나 앞서 올린 자료 한강 광나루..
그 광나루에서 배를타고 떠나온지 7 일만에 영월 유배지 청령포
이곳에 도착한 단종대왕이셨습니다..
청령포는 3 면이 강물로 막혀있고 뒤로는 절벽 바위산이니
천혜의 옴짝달싹 못하는 유배지이었네요..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나올수 없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음이니 유배지 이곳 청령포
기나긴 밤 두견새가 밤새 처량히도 울었으며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사나운 산짐승들 배고파 우는 소리..
강물이 철썩철썩 휘감아 돌아 흘러가는 소리에
단종대왕은 감히 잠들지도 못하였네요..
유배지 청령포에서 단종의 시 한수 읽어봅니다..
천추무한원 千 秋 無 恨 寃 천추의 원한을 가슴에 깊이 품은채..
적령황산리 寂 寧 荒 山 裡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일고혼 萬 古 一 孤 魂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메이는데..
창송요구원 蒼 松 繞 舊 園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영수삼천노 嶺 樹 三 千 老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계류득석훤 溪 流 得 石 喧 시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심다호표 山 深 多 虎 豹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부석엄시문 不 夕 掩 柴 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가운데 보여지는 큰 소나무가 600 여년된 단종의 슬픈 삶을 보았을
볼 觀 소리音 觀音松 이라고 부르고 있구요..
천만리 머나먼길 고운님 여의옵고..
왕방연의 시한수가 또 눈물나게 합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는데..저 물도 내안같아서 울어 밤길 예놓다..
이 소나무가 단종의 그때를 보았고 단종이 나무 아래서 통곡하였답니다..
단종이 저 갈라진 소나무 사이에 걸터 앉아
많은 생각을 하고 놀기도하고 그랬다고 전해져 오네요..
단종의 죽음에 관하여..옛 문헌 기록들을 잠깐 들여다 봅니다..
世祖實錄..세조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이 자살로 기록되어 있구요..
당연히 그렇게 썼을테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하니까요..
"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
병자록(丙子錄)에 단종 죽음은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네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니와서 온 까닭을 물으니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魯山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 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이었다.
통인(通引)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 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 할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단종이 강 절벽 위에 멀리 한양을 바라보면서 망향에 젖어
돌탑을 쌓았다는 망향탑이 애처로웠습니다..
아성잡설 기록에는..
魯山이 害를 입자 命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하는데 갸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더 있었다.
아전(衙前)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衙前)이 집에 老母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棺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소릉(昭陵 ..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파헤쳐지는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은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하고 도로 묻었다.넘실대며
흘러가는 강물은 무심히 오늘도 흐르고 있것마는..
영남야어(嶺南野語) 기록으로는.. 魯山이 항상 객사(客舍..
관풍헌)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써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害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官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물었더니 魯山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官에 들어가니 벌써 害를 당하였다.
절벽 아래 저 강물 흐르고 또 흘러도 단종의 옛 눈물
지금 어디로 모두다 흘러갔는지..
강물아 말좀 해 보려무나..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衙前)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郡) 북쪽 5리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 때 엄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니 엄흥도가 말하기를
" 내가 옳은 일을 하고 害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爲善被禍 吾所甘心 "고 하였다
송와집기 (松窩雜記) 기록에서는..
魯山이 영월에서 죽으매, 棺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 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 산골에서 불 태웠다 "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 江에 던졌다 "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假墓)라 하니,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수 없다.
점필재 (점畢齋 .. 金宗直)의 글로 본다면 江에 던져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漣)의 무리로써,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가 아닌가. 영원히 恨이 그치랴.
魂이 지금도 떠돌아 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도다..
말없이 멍하니 한참을 내려다 보게 됩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엄흥도는 이 고을의 오장(戶長)이었었다.
밤낮으로 단종의 거소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 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에서
슬프고 애끓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 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단종은 울음을 멈추고
"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 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 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옛 일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이 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매일 밤 비비람을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 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단종은 청령포 어소(御所)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觀風軒)으로 침소를 옮기게 되었다.
객사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구시(子規詩)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시신은 동강물에 내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東江絶壁 ..
후일 낙화암)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히였으니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 호장(戶長)은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世祖의 지시를 두려워 한 군수가 거절하자,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인양하여 아들 3명과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知山)의 先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말리는 아들들에게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
즉 나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
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단종이 이 바위 절벽에 앉아
많은 눈물을 흘렸던 노산대가 강 절벽 위에 이렇게 있네요..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 묘소는
단종의 복위를 몰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었으니
그게 바로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 되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6 명..
이들의 죽음도 원통하고 분하기는 매 한가지인거지요..
노산대 강 바위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푸른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직의 시 한수 읽어봅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 이 너뿐인가 하노라..
노산대에서 바라다 본 단종의 망향탑쪽 강 절벽 산이 저기 보여지네요..
유응부.. 단종복위 운동의 주모자는 성삼문과 박팽년이다.
나 유응부는 무인 출신으로 행동 책임자다..
세조..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박팽년.. 明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자리에서 내가 칼 한자루로 족하를 죽이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간사한 놈(金質..밀고자)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유응부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박팽년의 살가죽을 벗기고..
다시 심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자복하지 않고 오히려
성삼문을 향하여 소리 지른다.
노산군 단종이 앉았던 자리에 소년이 뭔가를 느끼려는듯
똑같은 자세를 취해보고 있어 마음 아려옵니다..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그렇구나..
지난 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히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요" 하더니, 오늘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족하는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성삼문)에게 물어보라...
世祖는 더욱 화가 나서 불에 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 밑을 지지게하니 ,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성삼문 成三門 함깨
단종 복위에 참여하였던 김질의 밀고로 발각이 되고
성삼문도 갖은 문초끝에 새남터에서 죽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아버지, 세 동생, 네 아들 모두 남은 가족도 없고 누구도 무서워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다가 생육신 김시습이 노량진에 묻었다..
성삼문이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남긴 절명시.. 고최인명 (擊鼓催人命)
처형장의 북소리는 생명을 재촉하고 서풍일욕사 (西風日慾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황천가는 길에는 주점도 없다는데 금야숙수가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볼까....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님의 밥 님의 옷을 먹고 입으니 소지평생막유위 (素地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수가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忠)과 의(義)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文宗의 능) 푸른 송백 꿈에서도 못 잊으리..
단종 복위 운동하다 숨져간 성삼문의 또다른 시가 절절합니다..
금부도사 왕방연 ..王邦衍이 단종에게 사약(賜藥)을 전하고,
한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왕방연(王邦衍) 千里遠遠道 (천리원원도)..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美人別離秋 (미인별리추)..
고운님 여의옵고 此心未所着 (차심미소착)..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 (하마임천류)..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천류역여아).. 저 물도 내안 같아여
鳴咽去不休 (명인거불휴)..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묘소 장릉에서 두손 모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한참을 떠나오지 못하고 이곳에 서성이며 여기저기 둘러봅니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 갑니다..
왕릉을 지키는 문인석 무인석은
시커멓게 비바람에 단단히 지켜주고 있었고
둘러쳐진 곡장에 혼유석 장명등도 바라보았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가엾은 넋이여.. 영원토록 좋은 세상에서 영면하시옵소서..
불행했던 지난날의 모든 기억들 다 내려 놓으시고.. 부디부디..
이나라 대한민국 보살펴 주시옵고..
가난한자 병든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어루만져 주시옵고..
국운이 상승되는 이나라 되게하여 주셨으면하고 마음속 기도를 하고서
무거운 발걸음 뒤로하고 저는 돌아갑니다..
자주 들르지 못한다하여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늘 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려합니다..
편안히.. 편안히.. 영원토록 잠드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