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86
1월30일[연중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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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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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7WXRqTnYBw장우호 야고보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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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악령은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개되는 스토리 역시 기괴하고 특별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산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입니다. 그는 아마도 빈 무덤이나 무덤 사이에 굴을 파서 그 안에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악령 들린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세고 난폭하던지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틈만 나면 손에 잡히는 데로 부숴버리기 일쑤였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힘센 장정들이 여럿 달려들어 그의 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장사였던지 쇠사슬과 족쇄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괴물 같은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멀찍이 피해 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그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역시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민가와는 멀리 떨어진 산이나 광야, 무덤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들이 가끔 현실로 돌아올 때도 있다지요. 그럴 때마다 참혹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억울함과 비참함을 달래기 위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울며불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기괴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이게 과연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은 게 더 낫다며 자해행위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기도 했고 큰 돌로 자신의 몸을 치기도 했습니다. 악령으로 인해 그의 미래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객사, 아니면 동사, 아니면 자살...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악령 들린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권능의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이유로 완전히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소리로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예수님의 기에 완전히 눌린 악령들은 완전한 무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령이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에 호소하며 자신의 거처인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지옥의 괴로움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외치시며 악령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 안에 6826마리의 악령이 붙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악령들과 당당히 맞서시며, 악령 들린 사람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성매매,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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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중국 어느 곳에서는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가마우지의 목에 줄을 매서 강에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오리처럼 생긴 이 새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입에 한 가득 잡아 가지고 옵니다. 물 속에서 1분 이상 빠르게 헤엄쳐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는데 그것을 자신이 먹지 않고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에 묶여있는 줄 때문입니다. 숨을 쉴 정도만 남겨놓고 줄을 매어놓으니 물고기를 삼키지 못해 주인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도 우리를 이렇게 자신의 종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죄가 원하는 재물과 쾌락과 명예 등을 잡아 죄의 주인에게 바칩니다. 주인이 배부른 것이지 내가 배부른 것이 아닌데도 나는 주인이 기뻐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것이 죄의 종살이입니다.
나는 돈이 있어도 없어도 그냥 같은 나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죄를 구별하지 못하여 종살이합니다.
그럼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목의 줄을 끊고 탈출해야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자신의 줄을 끊을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해방시켜 줄 누군가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줄을 끊어주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목줄을 끊어주시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은 고해성사 중에 “자신과 화해하세요!”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친절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죄와 화해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죄는 화해할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습니다. 가마우지가 자신을 이용하는 주인과 화해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여전히 죄의 종살이만 남습니다. 죄는 창세기에서는 뱀이고 탈출기에서는 파라오로 상징됩니다. 그것들의 노예 생활하는 것이 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과 화해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탈출시키려고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시고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이 우리를 종살이시키는 죄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길들이신 분이 아니라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게라사의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 마귀 들린 사람은 무덤에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악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미 그 마귀 들린 사람을 통제해보려고 시도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망가뜨리는 것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도 우리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우리 안에 분명 ‘원죄’가 있다고 가르치는데 원죄는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절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셨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돼지가 죽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피해보고 싶지 않아 예수님을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죄이고 마귀 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섬기는 마귀의 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화해하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이렇게 자아와 화해하라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는 방식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오시는 믿음이란 우리가 하느님이란 사실입니다. 내가 주님의 힘으로 내 자신을 이기려고 하지만 끝까지 내가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면 여전히 자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이라 믿으면 그 믿음의 굴레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탈출합니다. 그런데 그 영역이 여전히 이집트 땅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나이 산은 당시 지리적으로는 여전히 이집트 땅이었습니다. 광석이 많이 나기 때문에 군사들이 몰려 있던 곳이었습니다. 만약 탈출의 목적지가 그곳이라면 여전히 이집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이라 믿으며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다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파라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우리 목적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지는 죄를 이기는 인간이 아닌 죄와 무관한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새 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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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2시간 정도의 거리는 쉬지 않고 운전하지만 5시간을 넘으면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운전하면 차에도 무리가 오고, 운전하는 사람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023년 1월의 끝자락입니다.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방문하는 성지순례도 2번 있었고, 한국에서 온 신부님과 모임도 있었고, 앨파소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일정의 중간에 몸살이 왔습니다. 며칠 쉬면서 지내니 몸살은 떠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무 무리한 일정을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제게 몸살을 주신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시면 그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라.’는 성경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의욕과 과욕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모든 악보는 쉼표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한 달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께 의탁하면서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그 만남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시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룰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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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서품 대상자들은 교구장님 앞에 3가지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 서품자들과 함께하면서 3가지 약속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3가지 약속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독신서약’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사는 것은 사목활동을 잘 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사목활동을 잘 하기만 하면 독신으로 살지 않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사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께 사랑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함께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충실하게 선포하지 못한다면 독신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독신은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삶도 아닙니다. 독신은 그리스도를 온전한 삶으로 드러낼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고백’입니다. 사제는 본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 또한 부활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는 교회의 가르침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발표하시는 ‘회칙, 서한, 문헌’들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순명서약’입니다. 사제는 교구장님의 말을 잘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사제들은 예수님의 기도와 성모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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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그런데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주님을 대하는 주민들의 처신에 대한 예언적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이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또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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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공과 실패>
1월 30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역’에서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고, 그 지역에서 마귀들을 완전히 제거하신 일은 ‘성공’에 속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셨는데도, 지역 주민들이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서 복음을 선포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신 일은 ‘실패’에 속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쪽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 쪽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는 말은, 게라사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입니다.
<‘당신 땅’이라는 말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즉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면,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조금 있긴 했지만, 태어나실 때부터 거의 항상 박해를 받으셨고, 배척당하셨고, 활동의 마지막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떠나버렸고(요한 6,66), 결국에는 십자가 죽음으로 끝났으니,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실패한 활동입니다.
그렇지만 ‘부활’하심으로써 그 모든 실패를 한 번에 뒤집으셨고, 활동 중에 거둔 ‘조금의 성공’이, 즉 몇 명의 제자들이 하나의 겨자씨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마르 5,1-3)
앞의 4장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그곳에 가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그곳에 가셨습니다.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라는 말은, 그곳에 가시자마자 곧바로, 복음을 선포할 틈도 없이 거부당했음을 암시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마귀 들린 사람을 묶어 둘 수가 없었다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마귀들을 제압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마귀 들린 사람을, 또는 마귀들을 제압해 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까 그냥 포기하고 방치한 것 같고, 마귀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에 적응했던 것 같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데(6절-7절), 그것들이 하는 말은, 신앙고백도 아니고, 굴복한다는 표시도 아니고, 쫓겨날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저항해 보려고 하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이라는 말은, 당시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도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는 특별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자기들을 건들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라는 말은, 마귀들이 사용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자격도 권리도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말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아내시는 분입니다.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들은 마침 근처에 있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마르 5,12)
예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바람에 마귀들은 그 지역에서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인데, 마귀들이 사람들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파괴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마귀들이 하는 일과 같은 일, 즉 악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5.17)
마귀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기뻐하지는 않고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여기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떠나라고 요구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 지역에서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게라사인들은 왜 예수님을 쫓아냈을까? 예수님이 마귀들보다 더 힘이 센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을 무서워했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싫어했거나, 배상하라고 요구했다가 그게 뜻대로 안 되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할 기회도 없이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다시 배에 올라서 그곳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널리 알린 것은, 복음 선포는 아니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선포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 작업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는데, ‘놀람’이 믿음으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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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공생활의 시작에 예수님의 능력을 구마로 소개한 바 있는 마르코 복음은 다시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21-28 참조) 두 이야기 모두 악령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과 오늘 복음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과 함께 복음 선포라는, 예수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의 외침에도 그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이 사건은 주민들을 통하여 그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악령이 들렸다가 제정신을 찾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함께 있기를 청하는 것은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이 ‘함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치유받은 이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사명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여기서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의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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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간청하는 사람의 요청을 굳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셨을까요?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시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하신 경우도 있어서, 매번 상황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에게서, 한 가지 모습이 마음에 걸립니다. ‘군대’라고 할 만큼 수가 많은 더러운 영이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아주 괴로운 일이고, 족쇄와 쇠사슬로 묶여 있어서 더욱 힘든 것은 물론이며, 게다가 돌로 스스로 제 몸을 자학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무척 안쓰러우셨을 텐데, 그 사람은 예수님께 낫게 해 주시기를 청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방해하지 마시라고 떠들어 댈 때에도, 그 사람은 이것에 맞서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물리치려는 마음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시고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지만, 그가 더 이상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아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나 ‘더러운 영’의 공격은 받을 수 있고, 우리 안에도 조금씩은 죄악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겠지요.
그 악을 떨쳐 버리려는 노력도 갈망도 없고, 예수님께 나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하지도 않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겠지만 당신을 따라 나서기에는 부당하다고 판단하실 것 같습니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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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코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께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저와 제가 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갖지 마시고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저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더러운 영아,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괴롭히는 더러운 영아,
나는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는 참 사람이라
내 마음은 늘 사람을 품고
내 삶은 늘 사람과 함께 하거늘
어찌 사람과 상관이 없느냐.
사람을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신
하느님의 이름마저 더럽히는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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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령에 맞서야 합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는 악의 세력(악령)이 있습니다. 악령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옴직한 귀신의 모습을 한 무엇이 아닙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귀신의 모습이라면,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릴 텐데.
이 악령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악령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내 안의, 세상 안의 악령들을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사람을 노예로 만들려는 물신(物神)이라는 악령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부추기는 이기심이라는 악령이 있습니다.
자신의 더러움과 부족함을 철저히 가리고다른 이들에게 완전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라는 악령이 있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방과 불관용이라는 악령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차별, 억압, 착취,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의 무리들이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려고 때로는 은근히 달콤한 미끼를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도 합니다.
이 악의 무리들은 수효가 많아서 군대라고 불립니다. 스스로의 정체를 교묘히 숨긴 채마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것인 양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명하기도 합니다.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느님의 편에 서고자 하는 우리가 오히려 이 악의 무리에 편승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하느님을 거스르기 쉽습니다. 이 무수한 악령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아마 무관심의 악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을 조금만 돌아본다면, 다른 모든 악의 세력들은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마치 악이 아닌 것처럼 자신을 숨기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관심의 악령은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의 귀를 막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덩어리로 만듭니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마비시킵니다.
내 삶에 충실하면 돼지금의 행복을 맘껏 즐기는 거야분홍빛 미래를 희망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해무관심의 악령이 우리에게 주문을 겁니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열심히 살겠다는 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미 무관심의 악령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쟁, 고문, 살인, 사형, 질병 …죽음에 내몰린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어찌 지금 소중한 생명을 보듬을 수 있을까요. 결손 가정, 소년 소녀 가장, 독거노인, 이혼, 가정 폭력 …폐허 같은 삶의 보금자리에 머무는 이들을 외면하고 어찌 사랑 가득한 행복한 가정을 꿈꿀 수 있을까요.
해고, 불법철거, 인종차별, 새터민, 이주민, 망명, 난민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표류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고 어찌 지금 따뜻한 삶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관심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히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반쪽짜리 누더기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함께하며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아름다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당신께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오직 저는 이 사람과 관계가 있는데 왜 저와 이 사람 사이에 끼어드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답하십니다. 악령을 단호하게 쫓아내심으로써. 악령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소?”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정녕 사람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오. 나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나는 더 철저히 모든 이와 함께 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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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 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 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만큼 우리도 기도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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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직장의 한 동료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스트레스가 벌써 1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년 동안 그분과 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군요. 그런데 참지 않고 복수해도 그 지긋지긋한 관계는 멈출 수 없을 텐데요.”
복수한다고 상대방이 무서워서 피할까요? 아마 또 다른 방향으로 복수할 것입니다.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은 누가 되든 상관없이 빨리 끊는 것이 제일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 좁은 생각은 속 좁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넓은 생각, 긍정적인 마음은 마찬가지로 넓고 긍정적인 좋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이 악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 유익하겠습니까? ‘나는 안 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안 될 것은 또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뻔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사회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남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역시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나가긴 하겠지만, 산 쪽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한 명의 사람이 더러운 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함께 기뻐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속 좁은 생각에 잡혀 있습니다. 한 명의 구원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아닌, 자기들의 물질적인 손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보다 작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주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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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집착과 애착의 더러움>
마르코복음에서는 드물게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 얘기를 오늘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만큼 마르코복음이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들여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도 이 얘기를 중요시하여 자주 강의와 강론 때 다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번 강의와 강론을 했음에도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했을 뿐 더러운 영들이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뒤 어떻게 됐을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더러운 영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돼지와 같이 죽었을까요?
돼지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렇게라도 게라사 지방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 거지요. 그러니 세상을 그리고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는 영이 더러운 영이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영이란 죽었어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려 하지 않고 세상과 자기 살던 곳을 맴도는 존재이잖습니까?
우리 민속 신앙에서 이런 영들은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도 하는데 하느님 나라에도 가지 못하고 자기 지역에서도 쫓겨났으니 구천을 떠돌까요?
저도 이런 영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영적인 존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영은 훌훌 날아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최선이고, 하느님께 아직 갈 수 없다면 연옥이나 지옥에 머물든지 해야 하는데
더러운 영은 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지구에서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고 교회의 공식 가르침도 저의 주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는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이 돼지 속에서라도 자기 지방에 남게 해달라고 한 점이지요.
저는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인데 제 친구가 서른셋에 죽고 허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꿈에 친구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밝아서 꿈에서 깼을 때 저는 친구가 하느님께 갔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그때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더 이상 제 친구로 붙잡고 있지 않게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꿈에라도 어머니 얼굴 보고 싶은데 보여주시지 않으니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영적으로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이나 저의 곁을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신 표시라고 생각되어 위안을 삼습니다.
사실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그리고 보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를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로 보내드리자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러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아직도 보고 싶은 애착이 남아있습니다.
떠나지 못하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집착과 애착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이고, 이런 면에서 나도 더러운 영의 존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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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선택, 훈련, 습관-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31,25)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의 중요성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좋은 선택-훈련-습관은 이를수록 좋습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세상 떠나는 이들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어제도 산행을 하다가 빙벽에서 떨어져 실족사로 추정되는 어느 사제에 관한 비보도 들었고, 한 자매로부터는 시아버지의 죽음 소식도 들었습니다.
불쌍한 노년에 불쌍한 죽음이 너무 많습니다. 잘 늙어가기가, 잘 죽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 많이 목격합니다. 부부가정생활 역시 똑같습니다. 끝까지 좋은 부부관계에 좋은 가정을 유지하는 것 역시 참 어렵습니다. 저는 이들을 보면 무조건 성인聖人이라 격찬激讚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면담성사때 주고 받은 말중 마음에 와닿은 내용입니다. 오빠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70을 넘었어도 인내, 절제의 훈련이 전혀 안되었기에 그 나이에도 너무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것입니다. 새삼 삶의 훈련, 덕의 훈련을 생각하며 어제 강론을 나눴습니다.
진복팔단을 근거로 성덕 계산 점수를 함께 산출해봤습니다. 어제는 성사를 본 60대 초반의 두 자매의 성덕 점수였습니다. 최대한 각 항목별로 스스로 후하게 주도록 한후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에 8개 항목 합산후 예수님이 10점을 더 보너스로 준다하며 계산해 봤더니 무려 한 자매는 90점, 또 한 자매는 93점이었습니다.
“성녀입니다. 90점을 넘었으니 정말 성녀입니다. 성덕도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앞으로도 성덕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로 성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유쾌하게 웃으며 나눈 덕담입니다. 매일 일과표에 따른 수도생활, 그대로 기도와 노동, 공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영성훈련으로 습관화를 목표로 합니다. 이런 선택과 훈련, 습관이 있어 늘 거기 그 자리에서의 평화롭고 안정된 정주의 삶도 이뤄집니다.
누구도 노년을, 죽음을 뜻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찍부터 좋은 선택에 의식적 훈련, 습관화하는 것이, 심신心身을 단련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선택-훈련-습관 역시 은총과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정말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아름답고 건강한 노년에 선종의 죽음의 은총일 것입니다. 정말 시종여일,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다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수행을 사랑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정주도 훈련이고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침묵도 경청도 회개도 감사도 찬미도 겸손도 지혜도 순종도 훈련이고 독서도 공부도 노동도 운동도 인내도 절제도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이런 모든 수행의 선택-훈련-습관이 목표하는 바 하느님 중심의 삶, 구체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성덕의 훈련입니다. 사실 이런 선택-훈련-습관이 안되었을 때 세상 유혹에 본능대로의 육적 삶을 살다보면 괴물이나 폐인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죽기까지 존엄한 품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길은 좋은 선택-훈련-습관화의 길뿐임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우리는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선택-훈련-습관에 유리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안정과 평화에 참행복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 때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새삼 행복기도중 “주님” 호칭다음에 곧장 이어지는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고백이 정말 너무 잘됐다 싶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의 미친 사람을 고치신 일화입니다. 게라사의 미친 사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상들이나 악령들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미치는 것입니다. 아무도 통제 불가능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자, 미친 자에 대한 다음 묘사가 너무 실감납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완전히 고립단절된 혼자의 삶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참으로 구제불능의 자해 인간, 미친 사람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함부로 막 살았을 때,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잃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마침내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마귀들은 축출되고 미친 자는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새로운 파스카의 삶, 부활의 삶이 펼쳐지게 된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본래의 삶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가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자 반전인지요! 그러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 중심의 삶의 선택-훈련-습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삶,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예방이자 영혼을 튼튼히 하는 첩경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다음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희망,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믿음이라 다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묘사되는 불쌍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파스카 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산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묘사되는 이들의 모습은 복음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를 때 일입니다. 믿음에도 공부가 훈련이 필요합니다. 광신狂信과 맹신盲信의 잘못된 무지의 눈먼 믿음도 있으며 이런 경우는 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밝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지 못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들의 무지한 믿음입니다.
성덕의 수련에, 올바른 믿음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선택-훈련-습관”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파스카 예수님을 모시고 날마다 올바른 신망애의 삶을 살게 하는,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시편 31,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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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실망하지 말자!>
오늘 복음(마르5,1-20)은 '마귀들과 돼지 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그 사람 안에 있던 더러운 영들을 그들의 바람대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히브 11,32-40)는 많은 예언자들의 믿음과 그들이 기쁘게 받아들였던 고난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11,37-40)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이, 하느님께 선택된 많은 예언자들의 믿음과 희생과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예언자들 중에서 첫 번째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 12,1-2 참조)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끝나는 복이 아니라, 이사악과 야곱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향해 계속 진행하는 복이라는 것을,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다고 묵상합니다.
그러니 많은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의 믿음과 희생과 고난의 결과로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이, 지금 내게 그리고 우리 때에 당장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맙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아픔은, 더 큰 아픔을 막아주시기 위한,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손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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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LKb3GA5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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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 8)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인격과
더러운 영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인격을
더러움 속에
가두어 둘 순
없습니다.
뒤죽박죽 같은
더러운 영을
내쫓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길을 찾게
됩니다.
인격으로
시작하여
인격으로
완성되는
창조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인격은
정화되고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우리의
인격을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뿐인
목숨이
고귀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우리가
계속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성실하신
사랑의 창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깊어가는
둘숨과 날숨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더러운 영의
이름값이 아닌
소중한 인격의
이름값을 하며
살라고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랑의 성찬이
이루어지는
감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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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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