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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페일리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년 7월 – 1805년 5월 25일)는 잉글랜드의 성공회 신부이며, 기독교 옹호론자, 공리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쟁을 해설한 그의 작품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or Evidences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1802년)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시계를 제조하는 시계공 유추를 사용했다.
윌리엄 페일리
생애
잉글랜드 피터버러에서 태어났다. 페일리는 그의 아버지가 학장으로 있던 기글스윅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763년 시니어 랭글러로 졸업을 하고, 1776년과 1768년에는 그의 학교에서 튜터가 되었다. 그는 윤리철학 개설과목에서 새뮤얼 클러크와 조셉 버틀러 그리고 존 로크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윤리와 정치철학에 대한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지적 설계 이론
페일리가 지은 《자연신학》에 따르면, 시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계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일단 시계를 한 번 보면 누구나 그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능을 가진 그 누군가가 시계를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계와 마찬가지로 신이 창조한 우주는 아주 복잡한 과학적 원리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시계의 침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창조한 것이고, 그 창조주는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여호와)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설계 이론이다. 찰스 다윈이 과학으로서의 진화이론을 발표했을 때, 사회적으로 진화라는 원리를 사회를 설명하려는 것(진화주의)으로 확장이 되었고, 철학적 지적 설계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창조론을 두둔하여 이런 사고에 반발했으나, 생물학적 진화론까지 공격하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철학으로서의 지적 설계 이론은 또한 무신론, 이신론, 범신론, 불가지론, 악신론 등으로부터 정통 기독교와 성경 교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후 마이클 베히 등의 유사과학적 설명과 통일교에 의해 변질되어 생물학적 진화를 공격하는 잘못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같이 보기
유신진화론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에 자연계의 생명체에게 진화 능력을 부여해서 현재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다고 보는 기독교 창조론의 하나이다. 유신진화론은 신학적 개념으로 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에 해당하며, 진화가 가치중립적인 사실이므로,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이 아니며,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진화적 유신론,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의 창조주의 계열 중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창조의 방식이며, 진화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지지받는다.
미신https://naver.me/5cTU3xJY
창조과학https://naver.me/FcjQs0jV
창조과학(創造科學, 영어: creation science, scientific creationism)은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아브라함 종교 계열의 사이비과학이다.[1]
19세기 말[2] 미국 개신교계에서 제칠일재림교[3] 출신자들의 문자주의적인 창세기 해석에 의해 기초가 놓이고,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통일교[4][5]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화생물학과 지질학 등 증명된 과학적 사실들을 부정하며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과학임을 자칭하고, 기독교 근본주의 및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으로[6] 과학을 왜곡한다. 대체로 종교 경전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축자영감설을 자신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바는 한 가지가 아니며, 젊은 지구 창조설, 지구적 노아의 홍수 실존, 생명의 진화 부정 등의 여러 주장을 포함하며 근현대 과학에 대한 음모론적 성격이 강하다.
종교적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유사과학에 해당된다.[7][8][9]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주장하는 학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10][11] 창조과학자들은 물리학, 천체과학, 지구과학, 생화학, 진화 생물학 등 증명된 과학들을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사과학 https://naver.me/FLB2VMqF
유사과학(類似科學, 영어: pseudoscience), 의사과학(疑似科學)은 학문, 학설, 이론, 지식, 연구 등에서 그 주창자와 연구자가 과학이라 주장하지만, 과학의 요건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과학적 방법)과 맞지 않을 때 일컫는 말이다. 유사과학이라는 용어는 어떤 것이 부정확하거나 심지어 기만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멸칭으로 사용된다.
유사과학은 과학적 방법, 주장의 반증가능성, 머튼의 규범과 같이 허용된 과학적 기준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과 차별화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유사과학'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다.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는 것은 건강관리, 전문가 증언, 환경정책, 과학교육의 경우에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유사과학은 넓은 의미로 과거에 과학으로 불리던 원형과학을 포함하며, 이런것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 "사이비과학"으로 세부분류할 수 있다.
축자영감설 https://naver.me/5ykmhH0W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영어: verbal inspiration 버블 인스피레이션[*])은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 한 글자도 한 문장도 틀림이 없으며, 이로 인해 오류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경관이다. 극단적인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식의 일종이다. 전통적 성경무오설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성경이해이다.
4세기부터 전해진 전통 성경무오설은 성경이 구원의 절대적인 복음의 책이고, 교회의 바탕이라는 의미일 뿐, 글자 하나마다 의미를 두지 않으며, 살아있는 붓으로서 성경 저자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축자영감설은 문자적 성경 이해인 성경 문자주의와 항상 함께 거론된다. 축자영감설의 해석 방식은 역사적 성경해석이 아니라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개신교 성서해석 기준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성서의 문헌양식, 전승자료, 편집양식, 사회학적 배경 등을 분석하는 성서해석방법론인 성서비평학을 반대하는 이론이다. 제임스 바(James Barr)에 따르면 이 이론은 16세기와 17세기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시도되었다고[1] 하지만, 종교개혁 전통에 따르는 개신교 신학에서는 거부하는 성경이해 방식[2][3]이다. 이것을 19세기 세대주의와 20세기 초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인 《근본》이란 책에서 활용하며 재등장하였다.
축자영감설 옹호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원본에 영이 깃든 글자와 문장으로 구성되어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보아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최선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성서내용을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석한다. 축자영감설의 근거로 종종 제시되는 성경 구절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그외에도 갈라디아서 3:16, 베드로후서 1:21 등에 근거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축자영감론자들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에 따른 선지자, 사도들의 권위 아래 쓰인 원본이 한획 한점까지 틀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전서 개역개정, 디모데후서 3:16-17 》
성경 원본 문제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이 원본이 아니지만 다른 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사본간의 대조[4]를 통해서 거의 원전과 비슷한 텍스트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의 활용
성경이 영적인 감동으로 쓰였으므로 영적인 감동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성령이 알려주시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영적인 성경과 성령에 붙잡힌 사람이 성경을 바람처럼 흐르는 성령을 따라 인용하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계시된 말씀을 인간의 과학이나 연구가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하는 과정으로 과학을 뛰어넘는 영적인 것이고, 진정한 성령을 따르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축자영감설의 문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하고,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계에서도 거절한 이론이 '축자영감설'이었다.[5][6][7] 초기 개신교회 신학사상에서도 축자영감설은 환영받지 못했으며, 개신교 초기 신학자들도 성경이 구원의 절대적인 복음의 책이고, 교회의 바탕이라는 의미의 성경무오설을 주장했다. 즉, 종교개혁의 전통을 구성한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은 축자영감설을 주장한 적이 전혀 없다.
개신교 초기 신학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영으로 성경이 씌여졌다는 의미는 기록자가 마치 한 자루 붓이 되어 성령의 부르심대로 성경을 써내려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고, 그 기록된 내용이 영적이어서 구원을 알리는데 완전하다는 의미인 유럽의 중세적 표현이었다.
축자영감설과 문자적 성경 이해의 관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문자주의(문자적 성경 이해)'와 '축자영감설'은 종교개혁 전통을 잇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근간으로 발전한 개신교 성경신학을 배격하기 위해 채택한 실제적인 신학적 도구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신학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의 이론을 활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고,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계에서 폐기하고,[8][9][10] 성경신학이 다루지 않는 '축자영감설'과 문자적 성경이해인 '성경 문자주의'를 도입 활용해야 했다.
인문과학적 개념과 계몽주의 개념을 활용하는 성경신학에 대해 신령한 개념으로 보이는 '축자영감설'은 매우 적절한 공격 무기였고, 성경신학을 세속 학문으로 평가절하시키고, 기독교 근본주의의 '문자적 성경이해'즉 성경 문자주의 성경관을 거룩한 학문으로 포장하기에 알맞았다. 그러나 현대적 개신교회의 성경신학은 역사적 성경해석에서 발전한 종교개혁 전통의 성경해석 방법론을 따르는 것이며, '축자영감설'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거부한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축자영감설과 성경 문자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 본문의 의미가 아니라 해석자의 해석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알레고리 성경해석[11]을 강력하게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축자영감설과 연결된 '성경 문자주의'(문자적 성경 이해)는 모든 성경 본문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전제를 한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도, 기록자의 '환경'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맥'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영적인 지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성경의 문장을 취사 선택하여 재편집하면 된다. 구약 욥기의 욥의 독백과 친구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명령 문장에서 취사선택하여 모두 뒤섞어 새로운 문단으로 재편집해도 된다. 그 이유가 바로 축자영감설이다. 모든 문자와 단어와 문장은 영적인 것이므로 어떠한 문장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근대적 '성경신학'만이 아니라 서방교회 종교개혁 정신을 잇는 '정통 신학계'와 '정통 개신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축자영감설을 이용해 성경 구절을 재편집 후 인용하여 주장하였다. 정통 개신교회를 반대하고 자신들의 분리주의적이고 보수적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을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마음대로 취사선택 재배열할 수 있다고 알리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학적 도구가 바로 축자영감설이다.
종교개혁 정신을 벗어난 이론, 축자영감설
성경이 글자 한 점 한 획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기록자들이 무아지경에서 보았고 한자 한자 베겼다는 인식은 초기 개신교 사상과 이를 잇는 정통 개신교 신학과도 맞지 않는다. 기록자들은 어휘를 선택했고 문체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성경 각 하부 책의 기록자들의 의도과 학식은 제각기였음을 문체로 알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논리적 사고와 높은 교육 수준이 드러나 있고, 다윗, 모세, 베드로 등과 같이 기록자의 개성이 너무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누가복음서의 누가는 누가복음 8:44에서 당시 전문의학용어인 '유출병'을 사용했고, 다윗은 목동이었기에 양,막대기,지팡이,몰매 등과 같은 목동들의 용어를 주로 썼다. 이는 성경이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과 영혼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한 자루 붓이 되어 기록한 결과가 아니라 성령이 사람에게 지혜를 넣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 개인의 정신과 힘으로 시대에 맞게 기록한 것이다.
현대 개신교와 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영감을 원본에만 한정시키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 디모데후서 3:15절에 "또 어릴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에서 알 수 있듯이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원본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는 문자적 의미가 된다. 성경이란 원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이해가능하다. (출처 조직신학, 피터 럭크만 말씀보존학회 )
위키 백과에 편집한 이 분은 축자영감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축자영감론자들은 하나님이 불러주고 성경 저자들이 비서처럼 받아 썼다고 보는 구수설(dictation)을 주장하지 않는다. 축자영감이란 말은 제정신 가진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에 오류가 없도록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이론이다. 20세기 초에 생긴 근본주의의 주장보다 앞선 1846년 미국 복음주의연맹(Evangelical Alliance, 아마 이 연맹이 후엔 WEA가 되었을 것이다.)의 구개 신조에 근거하고 이 9개 신조는 그 이상은 종교개혁주의, 그 이상은 초대교회, 그 이상은 예수님의 성경관으로 소급된다. 구약시대 성경 필사자들은 아주 엄격하여 성경을 필사할 때(빼껴 쓸 때) 글자 수를 헤아리고, 심지어 알파벳 수를 헤아려서 다음 필사자들이 참고하라고 단어 수 와 알파벳 수를 기록해 두기도 했다. 여호와란 4개 거룩한 문자(YHWH)가 나오면 일일이 붓을 씻고 다시 잉크를 찍어 썼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해 철저한 경건성을 단어와 문자에도 가졌다. 이렇게 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어느 부분은 구수설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전승이 불가능한 부분이나 사람이 목격하지 않은 부분의 기록은 그렇게 했다고 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축자영감에 의해서 기록했다고 본다.
축자영감론은 비기계적 축자완전영감론(unmechanical verbal plenary inspiration) 혹은 비기계적(unmechanical) 완전(plenary)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의 약자로서 축자영감이라고 한다. "비기계적"이란 저자가 몽롱한 상태나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받아 쓴 글이 아니란 의미이며, "완전"이란 성경전체가 구원하기에 부족함이나 빠진 것이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진리이란 의미이고 "축자"란 하나님의 영감이 모든 언어와 말, 단어, 문법에까지 만연 되어서 그 진리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되게 했으며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진리를 모두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축자영감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비기계적 축자완전영감(축자영감)이란성경의 영감이 모든 사상과 모든 사상이 표현하는 언어에까지 축어적으로 만연되어 성경이 가르치는 바 윤리와 신학적 내용은 진리이며 역사는 사실(史實)이고 과학은 우주 원리에 부합하여 정확무오를 보장하며 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께서 저자의 내면적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저자의 개성, 문체, 경험, 특징, 자료 수집 등등 저자의 인격적 요소가 하나님의 목적과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채용되어 저자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고 성경을 저자 자신의 모든 오류에서 해방시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절대적인 권위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도록 역사했다는 견해이다." [ 배종수, "성경영감론에 관한 소고," <신학과 선교>, 8집, p.117(1983, 서울신학대학교)]
축자영감설의 성경무오 문제
축자영감설의 성경무오설은 종교개혁 전통의 성경무오설과 그 맥을 완전히 달리한다. 축자영감설에서 주장하는 성경의 무오는 단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위한 근거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주장일 뿐이다.
축자영감설의 순환논리의 문제
축자영감설 찬성론자의 주장처럼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경이 완전하다는 성경 내의 구절을 근거로 두는 것은 순환논리 또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해당한다. 그 오류를 피하려면 신약성서 저술 당시 성경으로 인정되던 구약성서만을 지칭한다고 해석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신약성경이 무오류하다는 근거가 사라져 구약성경이 무오류하다는 신약성경에 제시된 근거 또한 동시에 취약해지는 논리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축자영감설의 본문과 사본 이해 문제
축자영감설의 무오는 현재의 성경 본문의 기록자료로 부정된다. 모든 성경은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12] 무엇이 원본 그대로 또는 원본에 충실한 내용이고 무엇이 변개된 내용인지 알 수 없다.[13][14] 내용이 글자 하나하나 완벽하며 무오하려면 무엇이 원본인지 알 수 있어야 하지만, 현재까지 성경의 진정한 원본은 발견된 바가 없으므로 축자영감설은 그 전제 자체의 실체가 불분명한 주장이다.<ref name="성경 왜곡의 역사">바트 D. 어만(Bart D. Ehrman), 민경식 역 (2006). 《성경 왜곡의 역사 (Misquoting Jesus:The Story Behind Who Changed the Bible and Why)》. 청림출판.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해결할 수 없는 끊임없는 논쟁거리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사본으로 부정되는 축자영감설
교회가 지닌 대다수의 성경 사본들은 원문 작성 이후 수 세기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어느 한 사본도 다른 사본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본들이 없다. 사본들의 차이만이 아니라 특정 지역들간의 사본들을 비교해도 특정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본문을 이문(異文)이라고 한다. 신약성서 필사 전승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문이 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이 이문들에서 원본과 가장 가까운 사본을 형성하는 일은 축자영감설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축자영감설은 본문이 영감이 있는 글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느 사본의 본문이 영감이 있는지 주장할 수 없다.
성경본문은 성경신학을 통해 구성
성경 원문에 가까운 성경 본문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따르는 성경신학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미 모든 교회가 읽는 성경 본문은 성경신학의 방법론을 통해 구성한 본문이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사용하는 성경 본문 자체가 이미 성경신학을 통해 구성된 성경 본문이다. 다양한 성서 사본의 대조를 통한 재구성으로써 원본을 추정할 수 있다는 시각 또한 기본적으로 성경 신학의 성서비평학에 근거하여 고대문헌의 원본을 예측하여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축자영감설 주장에서 사용하는 본문이 후대의 사본을 통하여 성경의 원본을 예측 및 재구성한 본문이므로 이미 축자영감설의 전제를 부정하게 된다.
사회적 비판
진화를 비롯한 명백한 사실들을 부정하는 등, 현대과학과의 마찰이 많고,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부분이 많기에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성서비평학
이중저작설
진화학
창조주의에 대한 반론
시계공 유추
창조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