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의 일 (외 2편)
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 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한밤의 트램펄린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종아리를 걷은 맨발들이 보이고
총총 사라진 뒤
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트램펄린이 놓여 있고
속이 환히 비치는 슈퍼문이 떠 있다
검은 짐승의 눈빛과 마주칠 때
병명도 모르는 병을 오래 앓았다
아버지 등에
잠든 사슴처럼 늘어져
보리가 익은 샛길을 지나다녔다
디룽거리는 발이
이삭에 쓸려 아프다고 신음하면
달은 어깨 너머로 다가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갔다
병원 냄새가 난다고 했다 달은
살아 있는 영혼을 조금씩 들이마시며 빛을 얻는 거라고
누가 몸에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헛소리하는 아이를 놓칠까봐 두려움에 떨고
달은 이를 부딪다 달아났다
언덕 너머 손톱만한 낮달의 눈이 매섭다
골목에는 검푸른 초록이 죽은 고양이처럼 누워 있고
아이를 염탐하는 푸른 달빛
저 아래 눈을 감은 것들은 왜 무엇에 취한 모습으로 잠드는지
잠은 쏟아지고
누군가 아픈 몸을
후루룩 삼킬 것 같은 두려움
얼마나 많은 몸들이 내 몸을 다녀갔는지
어디를 쏘다니다 돌아온 것처럼 땀에 젖어 깨어나면
숨결에 달맞이꽃 냄새가 난다
달 언덕은 환하고
그 꽃 냄새에 취해
혼곤한 잠 속으로
잠 속으로
잠 속으로
어느새 나는 아이를 낳고 누워 있다
노란 아기 냄새
온 천지가 그 꽃으로 덮여 있는데
품 안에
들어온 달이
네 발을 버둥거리며 운다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 2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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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순 / 전남 순천 출생. 2012년 《시로 여는 세상》 등단. 시집 『분홍의 시작』 『한밤의 트램펄린』, 합동시집 『시골 시인 Q』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