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2: 5. 누구의 소녀냐? - 룻 2: 6. 모압 소녀
룻 2: 5. 누구의 소녀냐? -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
‘보아스’는 후에 솔로몬 성전 앞 두 기둥 중 하나와 같은 이름으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보아스는 그 이름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고 그의 밭에서 일하는 자들도 그러했던 것 같다.
1]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사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나아르'(히)는 '젊은 사람', '심부름꾼', '시종'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아르'는 '노예'나 '종'을 의미하는 '에베드'(히)와는 다르다.
'나아르'는 대체로 독립된 가정을 가지며, '에베드', 즉 '종'들을 관장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도 사용된다.
* 삼하 9: 9-10 – 9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10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여기에 사용된 '나아르'도 추수하는 일꾼들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6절), 단순한 종이나 사환이 아니라 보아스의 가사를 책임 맡은 감독관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1) 베는 자들에게 묻지 않았다.
베는 자들이나 룻은 지금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2) 사환에게 물었다.
보아스가 이삭을 줍는 룻을 보고 사환에게 물은 것은 그녀의 모습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님을 열심히 섬길 때 주님의 관심 대상이 된다. 성경은 신앙생활의 열심을 강조한다.
* 롬 12: 11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딛 2: 1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계 3: 20)는 열심이 없었기에 예수님이 문 밖에 서 계신 비극이 일어났다. 신학 사상이 아무리 좋아도 열심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다.
* 계 3: 20 -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그리스도(성령)가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중생한 우리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른 신앙생활이란 열심히 이삭을 줍는 것과 같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의 일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고,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듯 겸손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죽어지고 낮아져야 한다.
한 알의 이삭도 귀히 여기듯이 말씀을 귀히 여기면서 그 말씀을 열심히 주어 담아야 한다. 이 열심은 예수 없는 유대인의 율법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열심에 대하여 바울은 롬 10: 2-3에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예수의 이름은 부르나 율법에서 열심을 찾는 갈라디아적인 열심도 아니다.
* 갈 2: 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런데 더 심각한 현상은 예수의 이름은 부르나 아무런 열심이 없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중생한 이 후에는 예수 안에서 신앙의 열심을 가져야 한다. 중생으로 심겨진 새 생명이 나타나야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열심이란 주의 성령을 따라 주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 삶의 열심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를 모른다. 지식적으로는 틀림이 없는 데 체험적으로 모른다. 이것을 빈껍데기, 쭉정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이란 지식이 아니라 예수가 내게서 나타나는 실재적인 것이다. 이러한 실재는 열심으로만이 가능하다.
2]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룻은 모압에서나 이곳에서 고난 중에 있다.
① 기근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② 남편의 죽음으로 편안함이 없었다.
③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므로 여로의 피곤함이 있다.
④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므로 일해야 했다.
⑤ 이방인으로 혼자의 몸이다.
따라서 자기 몸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조건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의 눈에 띄었다. 밭에는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추수하는 베는 자들 외에도 다른 이삭 줍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유독 룻을 가리켜 이삭 줍는 자로 말하지 않고, 아낙네로 표현하지도 않고, 청순한 소녀로 호칭하였다.
(1) 열심 있는 자다.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에 이를 때까지 좀처럼 쉼을 얻지 못한 자였다.
(2) 겉을 꾸미지 않고 마음을 가꾼 자다.
밭의 일은 장정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의 작업은 그들을 곤고하게 한다.
(3) 외모는 태양 빛에 그슬렸지만 타버린 자가 아니다.
① 생나무- 태양으로 인하여 그슬림을 당하지 않도록 피해버리는 자들을 의미한다.
② 타버린 나무-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해버린 자를 의미한다.
③ 그슬린 나무- 비록 곁은 그슬렸지만 속은 본연의 모습을 지닌 자를 의미한다.
(4)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다.
아무도 룻을 보호해주는 자가 없을지라도 빈들에서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자였다.
(5) 동료들의 인정을 받은 자다.
그가 결혼하였고 남편이 죽은 과부였지만, 지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 새 신랑을 사모하는 성도가 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누구의 소녀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누구'라는 말은 소속을 의미한다.
* 수 24: 15 -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룻 2: 6. 모압 소녀 -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
보아스의 질문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룻에 대하여 보고를 드렸다.
1]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의 질문에 즉각 응하여 베는 자들이 룻을 소개하고 있다.
(1) 주위의 사람에게 룻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사환은 베는 자들에게 룻에 대한 신분을 묻지 않았다.
(2) 룻의 개인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룻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3) 베는 자들뿐 아니라 이삭 줍는 자들까지 소상하게 살펴보는 자다.
룻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보아스가 한 말(11절)을 볼 때, 당시 베들레헴 성내에서는 룻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더욱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룻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과 시어머니(媤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사환은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는 것이 본분이다. 주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하나 이루시고 계신다. 그가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말을 한다.
* 요 16: 13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온전케 하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따로 성령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게 함께 있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는 것이지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 없이 성령께서 오셔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 있을 때에 그 말씀에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없는데 성령께서 자의로 말씀하시고 역사할 수 없다.
2]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룻을 말할 때 마다 나오미가 등장한다. 이는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의 상관관계와 같다.
모압이라는 말은 멸시하는 표현이다. 룻의 신분이나 나오미의 처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었지만 관리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백성으로 인식되었다. 이 점이 세상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의 차이점이다.
* 롬 2: 17-29 –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