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이사 56,1-7; 로마 11,13-32; 마태 15,21-28
연중 제20주일; 2023.8.20.; 이기우 신부
1.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섭리와 안배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서들 중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셨다는 계시를 전해준 바 있습니다(이사 49,6). 그 계시는 우선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건설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늘 제1독서에서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이사 56,1) 하고 선포하였습니다. 공정과 정의는 공동선의 핵심 가치이며, 공동선은 최고선의 질서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즉,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날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 그 안식일에는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과 기도라는 종교적 도구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이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이 되시는 최고선의 질서를 확립한 위에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된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자신이 받은 계시의 말씀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배하신 섭리였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을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성모 승천 대축일과 광복절을 지내고 난 이즈음, 우리 교회가 민족 안에서 성모 승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길, 즉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이방인 선교의 시작, 가나안 여인
하지만 이사야 이후 이스라엘은 민족들의 빛이 되기는커녕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고, 그리스계 왕조들과 로마 등 이방인들의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지배를 줄곧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나서신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방인 선교가 출발하게 된 계기는, 이스라엘 북쪽 해안에 있는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마귀에 들려 호되게 고생하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을 만나셨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 지역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우상숭배에 물들기는커녕 의외로 큰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습니다. 이에 감복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그 믿음의 진정성을 떠보셨지만 그 여인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로 고백할 줄 알았으며,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청할 줄 알았는데다가, 자존심까지도 굽힐 줄 알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에 걸린 마귀를 쫓아내주심으로써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셨고 아울러 제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본보기의 교훈은 그 여인이 보여준 대로, 믿음이 크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믿음을 지닌 인간이 당신께 기도하기를 애타게 기다리셨다가 들어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본보기 가운데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쉽게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해야 하고 끈기있게 그 믿음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세상에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온 세상에 퍼져나가던 복음을 오묘한 섭리로 18세기에 들여온 이래, 공정과 정의가 사라진 조선 왕조로부터 19세기 백 년 동안 종교적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백 년 동안에도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모르는 세력들로부터 사회적인 박해를 받으면서, 21세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선 대륙 정벌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는가 하면,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을 추구하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민족이 강제로 분단되었고, 그리고 남북 간의 내전을 겪은 것도 모자라서, 극심한 가난과 끔찍한 독재를 겪었고, 70년 이상 분단과 휴전 상태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었던 약소 민족의 비애(悲哀)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광복절 즈음에 생각하는 오키나와, 오키나와 사람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고통을 준 약소민족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Okinawa) 사람들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일본 본토를 공략하려는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일본군은 항복을 하기는커녕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미군에게 항복하지 말고 오로지 천황을 위하여 집단자살할 것을 강요하는 바람에 십만 명 이상이 애꿎게 희생되었습니다. 일본 본토에 살던 일본인들 대신 전쟁의 제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는 대신에 반일정서가 대단히 강합니다.
그 이후 미군정 시대에 대규모로 군사기지를 건설해 놓은 미군이 병력과 장비 대부분을 이곳 오키나와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주둔 미국의 최대 기지는 괌입니다만, 괌과 평양까지는 3,400km이고 오키나와에서 평양까지는 1,400km이기 때문에 한반도 작전을 전개하는 미국 공군 병력은 주로 오키나와 기지에서 발진합니다. 그래서 북한이 겨냥하는 대(對)미군 표적 역시 미국 본토나 괌 이전에 이곳 오키나와입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주일미군이 저지르는 각종 폭력에 시달리고 있어서 반미정서도 강합니다. 위치상으로는 일본의 최남단이지만 한반도의 휴전선 같이 군사적 긴장이 높은 최전방인 곳입니다.
원래 이곳 주민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 식민지로 점령당하기 전까지 류큐 왕국(琉球 王國)이라 불리던 독립된 나라였고 그 이전에는 수렵과 어업으로 살아가던 원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오던 13세기에 항몽고려군(抗蒙高麗軍)의 최선봉에 섰던 삼별초(三別抄)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며 항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이곳 오키나와로 진출했습니다. 삼별초 군인들은 고려의 최정예 엘리트들이었으므로 고려 문물을 이곳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며 그곳에 왕국을 세워 지배세력이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한반도, 일본, 대만 사이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지만 그 어느 문명과도 접촉이 없었던 차에 고려의 선진 문명이 이곳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어 일본이 이 류큐 왕국을 군사적으로 정벌하는 바람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지금까지 노예 아닌 노예로서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오키나와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이곳 오키나와 주민들도 자신들의 운명과 지위에 대한 자결권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주민들은 한국과의 정서적 유대가 강해서 한국 내에서도 비슷한 운명 즉, 미군정 시기에 4·3 항쟁을 겪었던 제주도민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3. 하느님과의 통교를 위한 최고선 질서와 공동선 가치
강제로 일본 식민지가 되어 미군 총알받이로 전락한 오키나와의 운명도 피압박민족들의 비극과 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한민족의 운명 못지않게 슬픕니다. 둘 다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가 이러한 약소민족의 비극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반도는 예로부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붙는 각축장이었습니다. 한반도가 대륙에 맞붙어 있는 육지의 각축장이어서 남한이 대륙공산세력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미 육군의 최전선이라면, 오키나와는 대륙공산세력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미 해군의 최전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그러한 비극을 더 슬프게 만든 배경은 천 년 이상 주변 민족과 접촉과 교류가 없이 고립된 채로 살아옴으로써 문명과 문화의 지체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주변 민족과 끊임없이 문물을 교류하고 문화를 선도했던 한민족과는 아주 대조적인 점입니다.
문명과 문화의 접촉과 교류로 통공할 것인가, 혹은 고립되어 지체될 것인가 하는 점이 운명을 갈라놓습니다. 이는 비단 사람들과 나라들 또는 문명 단위들 사이의 수평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영적이고 수직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공동선으로써 사회 내부의 수평적 통공을 이룩하는 한편, 안식일 예배와 봉헌과 기도를 통한 최고선으로써 하느님과의 수직적 통공을 이룩하도록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이 치유된 기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마귀와 사람 사이를 떼어놓고, 사람이 하느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영적인 연결을 시켜주신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평적 및 수직적 통공이 최고선의 질서와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도직 활동을 가능케 하고, 사회를 인간화시키는 한편 더 나아가서는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자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통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했습니다. 그 결과 형식적인 종교예배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회는 최고선의 질서가 몰락하는 바람에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의 질서마저도 몰락하고 말아서, 끝내 나라가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은 유다인 엘리트 그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와 외교는 물론 금융, 언론, 정보, 군사, 과학 등 주요 분야에서 정치세력의 교체와 상관없이 은밀하고 치밀하게 미국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군사력이나 자본, 심지어 천황 등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우상으로 섬긴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상을 섬기기는 매한가지인 소행을 유다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구약시대에나 현대에나 유다인들은 우리 민족이 반면교사로 삼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이 미국을 위시한 서구 사회에서 발휘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최근 출간된 한 권의 책(위어드, WEIRD)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그 힘은 서구적이고(Western), 교육수준이 높으며(Educated), 산업화되어 있고(Industrialized), 부유하며(Rich), 민주적인(Democratic)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가치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의 본질은 결국 서구 백인들의 세계 경영, 세계 지배, 패권 추구입니다. 최고선의 질서는 물론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의 가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4. 사도직과 복음화를 위한 통공의 질서와 수단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를 실현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라는 이사야의 예언과 가나안 여인의 마귀 들린 딸에게 예수님께서 베푸신 구마 기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마음을 모으기를 바라시고 서로 모은 마음으로 당신과도 통교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지 못하게 방해하고 더욱이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자신들의 이런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우상은 힘입니다. 돈, 권력, 군사력 등 사람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힘들이 전통적으로 우상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현대 동아시아에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하느님과의 통교를 튼튼히 한 바탕 위에서 믿는 이들끼리 서로 간에 신의와 공정함으로 정의를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신뢰와 신용으로 조화를 이룬 온전한 믿음입니다.
신앙과 신뢰와 신용으로 조화를 이룬 온전한 믿음, 이는 경제력이나 군사력 등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동서고금의 강대국들이 추구하는 우상숭배적 풍조와는 대조적인 하느님의 질서요 가치입니다.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네 종교생활과 신앙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 즉 본당과 수도회와 평신도들의 여러 단체들에서 행하고 있는 사도직에서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통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기도와 봉헌, 말씀과 나눔 등은 모두 이러한 지향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져야 하지요. 통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겉치레로만 치루는 종교생활과 신앙활동은 마귀들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분열과 무관심이 나타나고 있다면 이미 마귀들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다는 흔적입니다. 흔히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한국 내 반통일세력의 준동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한반도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상호 간의 소통을 원활히 하고 특히 한반도 평화와 민족 화해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를 실현해야 마귀들에게 또 다시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민족의 기나긴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의 복음화와 더 나아가서 민족의 복음화 그리고 동아시아의 복음화라는 전체 좌표까지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미시적이며 또한 실질적으로는 내 주변에서부터 두 세 사람이 마음을 모으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 사회 현실에서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을 실천해야 하고, 우리 신앙 현실에서는 그 공동선을 뒷받침하는 최고선을 수호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믿음이 크면 바라는 바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시던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도 진정한 광복을 바라며 오늘 화답송의 후렴으로 기도하면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