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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세계는 창조주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영원과 무한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주 하나님께서는 그런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인간의 지각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신 것 같습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영원과 무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극히 약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피조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창조 영역의 극소 부분을 주의 계시에 따라 희미하게 사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마 티끌로 만들어진 우리의 사고의 범위와 깊이는 대양에서 작은 컵으로 물 한 컵 퍼내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는 피조물인 우리나 천사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극히 작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원’은 시간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로 무한하게 거슬러 가는 그런 개념도 아니며, 미래로 무한하게 펼쳐지는 그러한 개념도 아닙니다. 창조주의 ‘영원’은 피조의 세계에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만들어진 피조의 세계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면에서 무한을 포함합니다. 숫자를 보더라도 작은 부분 역시 무한합니다. 1/2, 1/10, 1/100, 1/1조, 1/경…. 큰 숫자 역시 무한합니다. 1000, 만, 억, 조, 경, …. 이제 과학은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광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우주의 생성에 대해서도 138억 년 전에 생성되었으며 우주의 반지름은 465억 광년이 걸리는 길이이고 수천 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무한하게 커지는 우주라고 헛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머리로 피조물에 대한 무한을 따져보아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 개념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즉, 피조의 세계입니다. 이때 피조의 세계에서의 무한과 영원은 시간과 공간에 갇힌 무한과 영원무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창조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 및 영원으로는 사실 하나님의 무한과 영원을 아무 것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조의 한계에 갇혀 사고하는 가운데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계시의 범위 외에는 아무 것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계시 범위 내에서조차 인간들은 그 계시를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계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중생한 자라도 성경의 계시를 거의 제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우리가 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만큼 알려주셨고 피조의 세계인 천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의 온전히 알 수 없어도 주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통해 충분히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에 오늘 우리는 오직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에 대해 지극히 작은 부분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입니다.
먼저 본문을 다루기 전에 본문 해석의 틀을 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모세가 쓴 창세기는 문학 장르에 있어서 역사서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시도 있고 비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역사서 안에서 시를 만나거나 비유를 만나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학 장르를 따로 언급하지 않을 때는 역사서는 역사적인 진술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역사적 진술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이때 구속사적인 사건에 대한 진술은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한 진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및 재림과 관련해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눈으로 본 사실을 증거합니다.
[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6-18)
또한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를 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한 여러 사건들을 진술합니다.
[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 15:14-15)
그러면서 그 사건의 신학적 의미, 즉 창조와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6-20)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도 역사적 진술이면서 구속사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1장 1절도 역사적 진술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2장 1-2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라고 하며 “천지와 만물”을 각각 창조하셨음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천지를 만드신 일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천지에 있는 만물도 주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진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안내 글이 아니라 실제 무에서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 인간의 시공간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는 “모든 하늘의 하늘”, 즉 삼천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영역은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들의 영역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진술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다”(신 10:14).
그리고 1절의 ‘천지’ 창조에는 물, 불, 공기 등을 포함한 모든 물질의 창조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절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고 하면서 ‘물’이 이미 창조된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절의 ‘천지 창조’는 ‘물’을 포함한 모든 물질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에서 신기한 말을 합니다.
[
4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4-5)
이와 관련된 구절로는 시편 24편 2절과 시편 136편 6절이 있습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 24:1-2).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5-6).
이런 성경 내용 때문에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텔레스는 모든 만물은 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설은 히브리서 11장 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자, 본문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겠습시다.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버레-쉬이트 바라- 엘로힘 에 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이 있기 전에 무엇이 있습니까? 네, 우리가 아는 영적인 하늘과 이 땅과 하늘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태로 계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상태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만든 모래 집이 나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욥 36:26).
그런데 창조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창조하시기 위해 주 하나님은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야 피조의 세계가 시간이라는 단위 속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조의 세계는 시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그 공간 안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들어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만물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만물에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과 그들의 세계도 포함됩니다.
이에 하나님의 계시의 시작은 “버레-쉬이트”로 시작합니다. 개역 개정은 “태초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영어 성경은 “In the beginn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경은 (엔 아르케이), 즉 “최초에”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를 위해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는 순간이 태초입니다.
자, “태초에”라는 단어 하나로 우리는 시간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의 시작이 있기 전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상태는 피조물의 시간 개념에 속한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태초 이전”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도 이미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창조주의 세계를 다루려는 어리석은 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시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써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이 계신 세계! 그분은 시간이 있기 전에도, 시간이 있은 후에도,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때에도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 개념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계신 그런 개념이 아니며, 시간의 어떤 다른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개념도 아닙니다. 소위 물리학에서는 3차원의 공간과 4차원으로서의 시간을 묶어 우주의 시공간을 다루는데 심지어 11차원까지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써 이러한 11차원이든 10차원이든 그런 시공간의 차원마저 초월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적용될 수 없는 존재시며 영역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자신은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의 피조 세계를 지으신 초월하신 분이신 것을 여러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알려주신 자신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2장 4절을 보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창 2:4)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자신이 호렙산에서 만난 하나님을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라고 알려줍니다. 이때 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셨습니다.
[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 3:13-15)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자음 넷으로 된 것인데 지음을 받지 않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자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Self-Existent 라고 합니다. 이는 변함이 없음을 뜻합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무한히 존재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은 자존하는 자라는 뜻과 함께 ‘Eternal’이라는 영원의 뜻이 담깁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을 원어적으로 분석해보면 과거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계시다는 뜻으로서 계시록의 표현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 4: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기원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순간, 그분은 시간, 공간, 질서, 물질, 생명 등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모든 존재의 원인이시며 모든 움직임의 시작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천지의 중심에 생명체를 만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식물 어류 조류 동물 곤충 등 모든 보이는 피조물을 관리하고 섬길 사람을 만드실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모든 보이는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 사명에 있어서 첫째 사람은 실패할 것이지만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시는 둘째 사람 예수님은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다니엘서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 표현된 분이고, 미가서에서는 “상고에 영원한 분”으로 묘사되는 분입니다. 그분이 사람으로 베들레헴으로 오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셋째는, 독생하신 아들이신 말씀 하나님 역시 동일한 창조주 여호와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이는 태초에 말씀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태초를 시작하신 분이 말씀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시편의 시인은 계시 가운데 이렇게 노래합니다.
[
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5-27)
[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
12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도다.
](렘 10:10-12)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사 43:10-11).
이로써 하나님은 여호와로 우리에게 계시되면서 우리는 그분이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전능자요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피조물의 어떤 형상으로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우상을 만드는 것에 대해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신 4:11, 15-16).
다시 1절을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인데 (엘로힘)은 복수형태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엘)이라는 단수로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창조의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복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복수 형태로 존재하시는 창조주십니다. 새언약의 계시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더라”(창 1:26-27).
그런데 1절에서 ‘창조하다’라는 히브리 동사 (바라)는 단수입니다. 즉, (엘로힘) 복수를 단수의 주어로 받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단수로 표현되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엘로힘)이 (바라)하십니다. 즉, 창조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십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여기서 천(天)은 하늘을 뜻하는데 원어는 (하샤마임)입니다. 이는 복수 형태인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늘들”입니다. 이에 대부분의 공신력 있는 영어 성경은 the heavens 라고 복수로 번역했습니다. 즉, 하늘은 복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늘은 땅과 구분되는 공간이지만 하늘은 세 종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경 계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공, 우주, 그리고 천상 또는 영적인 저 하늘입니다.
첫째 하늘은 창공으로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땅에서 공기와 바람이 흐르는 저 대기권까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늘은 대기권을 넘어 저 광대한 우주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어떤 차원으로까지 존재하는지 아직 다 알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우주의 차원은 이미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살아가는 3차원 4차원을 넘어 6, … 심지어 11차원 등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과학적으로 말하는 ‘우주’는 영적인 차원은 아니고 물리적인 차원입니다. 즉, 우주는 영적인 세계인 삼천층과는 전혀 다른 둘째 하늘일 뿐입니다.
사실 지금 현재 우리가 천상, 천국 또는 낙원이라고 부르는 셋째 하늘, 즉 삼천층은 그 어떤 과학으로도,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무한하게 발전해도 그 영의 세계를 전혀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와 둘째 하늘, 그리고 셋째 하늘은 서로 종류가 다른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역시 범위와 차원에 있어서 크게 서로 다른 종류의 하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학으로 인간의 영혼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과학으로 사랑, 미움, 질투 등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영혼, 사랑, 미움 등은 분명히 존재하며 현실인데 망원경과 현미경, 그리고 숫자와 기계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세계와 마귀의 세계 역시 과학으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이치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셋째 하늘에 대해서는 영원히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셋째 하늘은 성도들이 죽음을 통과할 때 들어가는 영적인 영역으로서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둘째 하늘과 구별하여 하늘 위의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인데, 천지에 있는 만물도 주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진술할 때 “하늘의 하늘”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다”(신 10:14).
시편의 시인들도 마찬가지 표현을 합니다.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시 68:33).
[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48:3-4)
여기서 “하늘의 하늘”은 천사들이 거하는 영역이니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지극히 높은 곳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보좌 곁입니다. 그런데 그 곳은 하늘 위의 하늘보다 더 높은 곳입니다.
[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9-10)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히 7:26).
한편, 셋째 하늘, 즉 삼천층은 영과 물질의 세계가 혼합된 세계인데, 물질의 세계가 어떤 차원으로까지 존재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체가 그곳에 계시니 그 부활체의 영광의 차원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또한 천사들이 입고 있는 몸과 유사한 그러한 영적인 물질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곳에는 천사가 있고, 의인들의 영이 있습니다. 부활의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에녹과 엘리야가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천층은 죄가 없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삼천층 역시 피조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악령이 더 이상 거하지 못하고 쫓겨난 곳으로써 오직 선한 천사들과 의로운 영이 거하며 죄가 전혀 없는 세계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한량없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은 아닙니다. 피조물의 세계로서 단지 영적인 하늘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천국’입니다.
한편, 바울은 그곳을 정확하게 삼천층이라고 부르면서 낙원이라고 불렀습니다
[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2, 4)
신자인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낙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삼천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의식과 영혼은 활동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지금 인간이 사는 세계에 남아있거나, 우주를 떠돌며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된 영혼은 천사들과 함께 삼천층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하늘은 이 땅에서 죄가 사라지면 이 땅에 내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하늘과 땅이 실제로 연합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영원무궁한 세대입니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이지만 세 면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무소부재입니다. 이 개념 역시 피조의 영역에 국한된 개념입니다. 즉, 무소부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 가운데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우주에도 계시고 창공에도 계시고 저 깊은 바다에도 계시고 원자에도 계시고 아메바 위에 속에 아래 밖에도 계시고, 천상에도 계십니다. 심지어 이런 의미로 하나님은 피조물의 영역인 지옥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는 어떤 곳에 계시면서 다른 곳에 없는 것도 아니요,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그분의 임재가 조금이라도 변형되는 것도 아닙니다. 태초에 천지가 지어진 이래로 그분은 영원무궁토록 변함없이 모든 만물 가운데 편재하십니다. 그것이 무소부재입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지으신 영역인 피조의 세계에 영원무궁토록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3-24)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신 4:39).
그리고 만물의 모든 생명은 오직 창조주로 인해 기동하며 존재합니다.
[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행 17:24-28)
둘째,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는 죄를 향한 무한한 진노를 나타냅니다. 마치 바퀴벌레가 빛을 싫어하여 도망하고, 어둠이 빛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치는 것처럼, 죄에 물든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면 주의 진노의 불에 무한한 고통을 당하며 멸망합니다. 이때 주의 임재는 무소부재의 의미가 아닙니다. 빛과 선이신 하나님의 본질이 피조물 가운데 뚜렷하게 나타날 때 어둠과 죄가 멸망되어 제거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임재로 인해 나타나는, 어둠과 죄를 향한 무한한 심판과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옥과 불못은 반드시 있습니다.
셋째, 죄가 없고 선만 있는 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통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생명과 질서와 복과 사랑과 거룩함과 감사와 기쁨과 평안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피조물이 충만하게 되며 은혜와 모든 선한 것이 무한히 흘러 넘칩니다.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은 현재 천상에 계십니다. 창조주께서 천상에 임재하여 머문 상태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께서 공간과 시간 가운데 셋째 하늘에 피조물의 형태로 와 계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천상에 계시다는 뜻은 그곳에 충만하게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영광 가운데 계시다는 뜻입니다. 영광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영적인 피조물과 교통이 한량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천사들과 그곳에 이른 의로운 영들은 죄가 없는 천상에서 하나님과 한없는 무한한 교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곳은 하나님의 복과 생명이 무한하게 흐르는 곳이며, 공의가 완전하고 사랑이 완전하고 거룩함이 완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과 영광이 흘러 넘치는 곳입니다. 인간이 그곳에 들어가면 무한한 환희와 기쁨과 평강과 만족과 보람과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말했고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사 63: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처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는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서도 영광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2-4)
즉, 피조물의 세계에 죄와 죄로 인한 저주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도 한량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는 땅이든 하늘이든 천사들과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임재는 무소부재의 개념이 아니라 언약 가운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함이요, 죄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 및 모든 피조물 위에 한량없는 충만함으로 영광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덴 동산의 상태였고,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사망을 비롯하여 죄와 관련한 모든 것이 불못에 던져지면 온 세상이 에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주의 재림으로 죄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될 때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 창조주 하나님, 곧 우리 모든 새 인류의 주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원무궁한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하나님은 창조주시기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눈으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활 승천하셔서 영원 무궁히 존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등불로 계실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도 피조물의 영역에 들어와 영원 무궁토록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주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2-23)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십니다. 이때 시간과 공간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활동하신다고 해서 창조주의 세계 전체가 시간의 세계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의 세계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인데 그 세계는 변함없이 있으면서 피조의 세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칼빈의 이런 개념을 루터파 사람들은 ‘초칼빈주의’라고 빈정거렸지만 칼빈의 깊은 통찰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아무튼 “태초” 이후로부터 피조물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시간의 세계로 들어오신 것이지, 그 존재가 창조주의 영원의 세계를 비우거나 창조주가 시간에 갇히거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를 굳이 인간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창조주와 그분의 세계는 자존하며 영원하시며 무한 불변하기에 그대로 있으며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즉,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로부터 무한하게 초월하시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만물에 완전하게 계시며 이에 천지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 곳은 없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시간 안에 동시에 계시고, 또한 창공 우주 심지어 저 영적인 하늘인 3천층에든 어디에든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의 무한하신 영광으로 나타나 한량없는 교통을 하시는 곳은 현재는 하늘의 셋째 하늘, 즉 천상입니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십니다. 또 다른 영원하고 무한한 창조주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막 12:3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 18:3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9-10).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4-6).
현재 신자들의 본향은 하늘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죄가 해결된 상태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인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한 셋째 하늘입니다. 그곳이 지금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러나 여기서 “한 성”은 하늘의 예루살렘 성이지만,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 땅에 새하늘과 새땅으로 임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영혼은 무궁하게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는 피조물이기에 이곳을 떠나면 이 세상에 우리의 영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영혼은 뚜렷하게 삼천층에 가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계시고 천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재림의 때에 영광의 부활체를 입고 천상이 이 땅에 임하는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아 하늘과 땅이 통일된 가운데서 영원 무궁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며 교통할 것입니다.
반면, 성경은 지옥도 말합니다. 지옥 역시 죽은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갇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갇히면 영원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지옥에서 주의 심판의 때에 더러운 부활체를 입고 일어나 지옥의 연장 선상에 있는 무궁한 불못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불순종과 함께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천국 낙원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지금도 이 땅의 죄악은 관영합니다. 따라서 주의 영원한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처럼 주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나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놀라운 사실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얻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에 성령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교회를 세워주시고 복음을 들려주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셋째 하늘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데 그 누림은 실제로 천상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도다
](엡 2:5-6)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새언약 가운데 자신의 새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은 “성부성자성령”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한 삼위, 즉 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별된 무한하고 영원한 삼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무한하고 영원한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독생하신 하나님, 즉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창조주로서의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피조의 영역에 사람이 되어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조의 세계로 창조의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에 피조물의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와 통일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창조주시며 사람이고, 무한에 속하지만 유한을 입으셨고, 영원하시지만 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이요 참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인은 그분의 구속의 사역 덕분에 죄 문제가 가려지고 해결되며, 또한 피조물은 창조주시며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교통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6-18)
우리는 호흡 마치는 그 날까지 창조주시며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영원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성경을 통해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즐거운 교제가 우리 모두에게 차고 넘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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