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 바오로 신부
대림 12월 21일
아가 2,8-14 루카 1,39-45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납니다.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갑니다.
당시 제관들은 흔히 예루살렘 주변 마을에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7-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인카렘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자렛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삼사일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은 이유는 그녀가 친척이었을 뿐 아니라(루카 1장 36절),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힘으로 아들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도 자신과 같이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자기가 받은 은총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잉태의 비밀을 서로 알아보고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말씀은 이제 기쁨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 빛이 또 다른 빛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모르는 잉태의 비밀을 눈빛으로 알아본 두 여인이 기쁨 속에 서로 마주 봅니다.
그 기쁨은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요한까지도 기뻐 뛰놀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은 온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이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소중한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품고 있기에 혼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또 다른 말씀을 찾아갑니다.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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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대림 12월 21일
아가 2,8-14 루카 1,39-45
“두 여인은 행복하십니다.”
구약의 아가서 저자는 사랑하는 여인 대한 연인의 그리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서 2장 10절)
사랑하면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하지요.
그냥 스쳤던 꽃, 멧비둘기, 무화과 나무가 모두 의미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아가서 2장 12절-13절)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또는 여유와 낭만으로 이끌어 주고 지친 삶을 새롭게일으켜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의 특징은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이지요.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가서의 이 연인들의 관계와 신원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고전적인 해석은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골의 한 마을을 찾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길을 나서는 마리아의 심정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서둘러’라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아기 예수님을 가진 마리아에 대한 이후의 설명은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루카 1장 36절)라고
말했던 천사의 말이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래도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천사가 했던 말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고 처녀로 아기를 가진 심정을 늙은 나이에
임신한 친척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었으리라는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유대의 한 산골에서 친척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대대적인 인사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 말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루카 1장 42-44절)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를 치자면 또 한 가지는 ‘함께’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도 임신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선택 된 두 여인의 만남은 또한 ‘함께’라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품은 여인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서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신 여인’
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에게서 주옥과 같은 금자탑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라는 축복의 말씀도 성모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두 여인을 통해서 구원사의 한 획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성실했던 삶은 드디어
두 생명,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도 엘리사벳과 성모님처럼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설레이느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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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민 가스발 신부
대림 12월 21일
아가 2,8-14 루카 1,39-45
오늘 복음을 들으니 온 국민이 즐겨 부르는 노래 하나가 생각나네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소” 로 시작되는 ‘만남’이라는
노래 말이죠. 세상에는 참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지나가고 나면 기억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노래가사처럼 단 한번을 봤어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자신의 존재를
흔들고 일생을 좌우하게 될 커다란 만남입니다.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흡입력을 가진 만남, 그런 만남이야말로 노랫말처럼
그저 우연이 아니라 존재의 바람이 아닐까요?
이런 만남은 성서의 곳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베드로를 비롯한 첫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런 것이고, 또 세관장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이 또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의 만남은 겉으로 보면 우연한 것 같지만 그 만남을 통하여 한낱 어부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교회의 초석이 되고, 죄인이었던 세리가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게 됨을 볼 때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항한 열망이 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한번 이러한 차원의 만남 하나를 소개 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예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엄청난
구원 계획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자렛의 한 가난한 처녀에 불과했고
그저 믿을 것이라고는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종만이 전부였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이 어려운 순간에 같은 처지의 사람을 찾아 갑니다.
엘리사벳도 당시 가난한 사제의 아내로서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한 채로 있다가
늙은 나이에 하느님의 은혜로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기에
딱 좋은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는 예로부터 자신들 같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분이심을 믿고 살아온 의인들이었습니다.
“모든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라고 한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만남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라고 한
엘리사벳의 말을 통하여 엿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요,
세례자 요한은 그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역사 이래로 구세주를 열망해 온 이스라엘 백성의 대변자요
하느님이신 구세주 예수를 만나게 되는 인류의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의 만남은 단순히 인간 예수와 요한의 만남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인류의 범죄 이후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고 싶어 한 모든 양심의 바램이었고,
하느님 편에서 보기에는 탕자를 재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두 만남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와 요한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자 하느님과 구원을 기다려온 인간의 만남을 보았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통하여 하느님을 전해주는 이와 하느님을 알아보는 이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소박한 그들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고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하느님을 알아 본 것이지요.
세상의 수많은 아름다운 노래 중에 ‘아베 마리아’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베 마리아의 가사는 ‘성모송’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단순한 가사를 앞 다투어 작곡하고 널리 애창되어 왔을까요?
그 노랫말에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녹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아베 마리아’를 들을 때, 또 묵주의 기도를 읊조릴 때 이 아름다운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그려 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입시다.
부산교구 방삼민 가스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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