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인권 영화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또래 친구였다. 그녀는 적극적인 성격이었고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동아리 모임을 마치면 점심시간이었는데 어느 날엔가 A가 내게 함께 식사를 하자 청했다. 저시력인 A가 나를 안내해 식당에 찾아갔다. 나는 그녀가 내게 개인적인 어떤 용건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A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 개인 신상만 묻고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다. 그날 이후로도 동아리 모임이 끝나면 A와 식사를 했다. 그녀는 내게 궁금한 게 무척 많았다. 그녀는 나란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했다.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혼자 사는 건 외롭지 않은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싫어하는지. 나는 A가 나와 친구가 되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넌 첫인상부터 엄청 착할 것 같았어. 우리 친구 된 것 맞지?" A의 낯 뜨거운 고백에 나는 웃어버렸고 남아있던 경계심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친구라는 관계에 저도 모르게 집착한다고 고백했다.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담담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A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녀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아기 때부터 수술을 시작해 간신히 약간의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돌림은 유치원부터 시작되었다. 안구 모양 때문이었다. 그녀는 흰 티셔츠를 입을 수 없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철없던 아이들은 A의 등에 '눈깔병신"이라는 낙서를 매일 해댔다. 어린 마음에도 그 낙서를 부모님이 보면 속상할 거라 생각해 화장실에서 티셔츠를 벗어 스스로 빨았다. 물이 닿자 잉크가 번졌다. 그 시퍼런 흔적은 아무리 헹궈도 지워지지 않았다. A의 가슴속에 든 시퍼런 멍처럼. 그녀의 부모님이 딸이 괴롭힘 당하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하고 아이들을 불러 부탁도 했다. 그러나 어린 악마들은 놀잇감을 놓아주지 않았다. A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A의 도시락에 장난을 쳤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분필 가루가 쏟아졌다. 어느 날은 모래가, 또 어느 날은 더러운 걸레가 날아와 도시락 위에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A는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밥을 먹었다. 혹시나 누가 화장실에서 도시락 먹는 걸 알게 될까 봐 허겁지겁 밥을 입속에 밀어 넣고 눈물을 삼켰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형성된 소심한 성격은 이후에도 계속 그녀를 소극적이고 눈치를 살피는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랬던 그녀가 삶의 태도를 바꾸게 된 계기는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A는 어린 딸의 모습에서 눈치를 살피던 지난날의 자신을 봤다고 했다. 순간 그녀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아이가 이대로 자신을 보며 성장하면 자신의 불행했던 학창 시절을 답습할 것만 같았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날부터 A는 자신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당당히 어깨를 펴고 걷는 연습을 하고 어린이집 엄마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솔선수범하자 그녀를 향한 평가가 조금씩 달라졌다. 사교적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사람과의 관계 형성이 원활해졌다. 내가 본 그녀는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나는 이사를 앞두고 잔금을 치렀다. 계약은 대리인이 대행했는데 나는 임대인과 대면하지 않아 다행이라 속으로 안도했다. 나에게는 임대 계약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다. 남동생이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의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회사에서 지원하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학교 기숙사를 신청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주말이라도 집에서 편히 쉬다 가게 하고 싶었다. 저시력 동료에게 부탁해 전셋집을 얻으러 다녔다. 12월이라 날씨도 춥고 내 마음도 몹시 시렸다. 집주인들은 시각장애인이 집을 보러오자 대놓고 장애인에게는 집을 줄 수 없다 거절했다. 어느 집에서는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못하게 해 그대로 쫓겨났다. 부동산 중개인을 나무라던 집주인들의 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장님한테 집 빌려줬다가 불이라도 내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곧 집을 팔 건데 장애인이 살았다고 책잡아 집값을 후려치면 어찌할 거냐고. 몇 차례 거절을 당하자 전셋집 얻으려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아 매입을 했다. 어부지리로 사야 했던 집에서 몇 년을 거주하다 일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노골적인 거절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보다 못한 중개인이 꾀를 냈다. 집주인이 거주하지 않는 집만 보여주었고 계약 당일은 내가 아닌 대리인을 세워 대신 계약을 진행하게 했다. 이런 비참한 경험은 나를 소심해지게 하고 주눅들게 했다. 이번엔 무사히 잔금까지 치르자 마음이 편해졌다. 열쇠를 받아 새로 이사할 집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동행했던 활동지원사와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고 보니 한식뷔페였다. 입담이 거친 주인아주머니가 손님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다녔다. 나는 잘못 들어왔다고 후회했으나 그냥 나가려니 눈치가 보여 자리 잡고 앉았다. 음식이 놓인 동선은 좁고 사람은 많았다. 지원사가 자기가 알아서 음식을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우두커니 식탁을 지켰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빨리빨리 밥을 먹고 자리를 비워야 다른 손님을 받을 것 아니냐며 내게 통박을 줬다. 내가 무어라 변명을 하나 고민하는 사이 지원사가 조용히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 자신이 챙겨다 줄 거라고. 주인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미안했는지 본인이 도와주겠다며 국과 밥을 퍼서 내게 가져다 주었다. 나는 감사하다 인사하고 수저를 들었다. 지원사가 반찬 접시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입구에서 계산을 받던 주인아주머니가 누군가에게 말했다. "요즘 저런 사람 많이 보이네. 우리 식당도 꽤 와." 나는 아주머니가 말하는 '저런 사람'이 나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나는 A를 떠올렸다. 그 단단한 삶의 태도를 말이다. 나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바르게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수저질을 했다. 불쾌한 마음은 들었지만 상처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다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써야지.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거야. 그게 내가 정한 나의 사명이야.' 내가 씨익 웃자 눈치 보던 지원사가 죄지은 아이처럼 자기가 식사비를 내겠다고 했다. 나는 한 번만 더 이런 곳에 나를 데려오면 가만 안 둔다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동시에 깔깔 웃었다. 글 조승리(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비에이 '크리스마스트리 나무의 야경'.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걸음으로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로이 맞이하는 12월은
보람된 일들로 행복하시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