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상 디오니시오 신부
대림 12월 22일
1사무엘기 1,24-28 루카 1,46-56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에 마리아의 노래로 응답합니다.
정말 기쁨에 넘쳐서 하느님을 찬양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을 잉태하셨습니다. 너무도 두려워서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성모님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 행동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있습니까? 괜히 웃음이 나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 반가움을 감출 수가 있습니까?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여서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묵주를 건 차를 몰고 난폭운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믿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너그러움,
용서와 화해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모님이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지,
혹은 믿는 척 하는지, 혹은 안 믿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대구대교구 김문상 디오니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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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규봉 가브리엘 신부
대림 12월 22일
1사무엘기 1,24-28 루카 1,46-56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자식이 없어 브닌나로부터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이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느님께 도로 바친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 : 2,21).
한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복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한평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
사무엘의 봉헌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니라 영원한 봉헌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욥 1,21),
하느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함을 깨닫고 있었다(시편 15,4).
그리하여 그녀는 모성애를 뛰어넘는 헌신적인 결단을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어여삐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으므로, 그녀도 하느님께 사무엘을 봉헌한다.
한나는 참으로 믿음 깊은 여인이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께 간구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신앙은 결코 실망하지도, 성급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신앙은 곧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신앙은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기력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탄생과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가 은총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사도 바울로의 권고대로 살아간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을진대 어찌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앙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힘이요 은총임을 알면서
어찌 자신을 봉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삶의 일부인 시간을 봉헌하고, 노력의 대가를 봉헌하고,
자신의 삶 전체,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신앙이다.
한나는 참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사무엘을 낳기 전에도 그를 온전히 봉헌하기로 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서 젖을 떼자마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서 고난을 당할 때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은 후에도 결코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달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참 신앙인이었다.
이처럼 믿음 깊은 한나는 곧 예수님을 강생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성모님을 보여주시는
예표이다. 한나와 성모님처럼 믿음 깊은 여인이 곧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참 신앙인임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자신을 아는 겸손한 신앙인,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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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민 가스발 신부
대림 12월 22일
1사무엘기 1,24-28 루카 1,46-56
마니피캇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교회의 가장 오래된 노래 하나를 소개 해 주고 있습니다.
‘마니피캇’ 또는 ‘마리아의 노래’ 라 불리는 이 노래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찬미가로서
오늘날까지 성직자, 수도자들의 성무일도 저녁기도에, 레지오 단원들의
까떼나 찬미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노래는 우리의 ‘아리랑’처럼 교회가 가장 사랑하고 애창해 왔던 대표적인 노래라
할 수 있죠.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이 교회의 노래가 불려지게 함으로써
마리아를 교회의 표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이 내세울 것 없는 비천한 신세임을 알고 있었고,
온 백성이 우러러 볼만한 위대한 일이 성취됨도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똑똑하고 능력 있다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부족함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설 땅을 잃어 갑니다.
이른바 가진 자들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내어놓지 않으면서 세상을 위하여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앞다투어 남의 탓을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없도록 독선적인 논리로 여론을 호도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양심 앞에 솔직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처럼 비천한 종의 신분임을 자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노래는 이들의 교만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들,
부요한 자들의 교만을 내치시는 분이며 정직한 이와 거짓을 일삼는 자들을 가려내어
심판하리라는 점을 강도 높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노래는 세상의 모든 양심과 정의의 외침을 대변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세상을 모른 척 하지 않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리라는 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몇몇 영웅이나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힘없고 가나하지만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하는
CF의 노래가 마음에 드는 것은 이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수사님으로부터 한 장의 카드를 받았습니다.
카드의 표지에는 늙고 깡마른 한 수녀, 마더 데레사의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그 배경에는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이 그려져 있는 카드였습니다.
여러분은 마더 데레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늙고 힘없어 보이는 할머니 수녀님이
무슨 힘으로 그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의 힘은 가난한 이를 향한 끝없는 사랑이었을 겁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돌보듯이 자기 자신이 아픈지 배고픈지 힘든지도 잊은 채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자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 그것이 그녀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스스로가 비천한 여종임을 자각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께 대한 신뢰 하나로 하느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의 겸손은 비굴함이나 자신의 비하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존재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하나됨으로써 세상과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위대한 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의 일생은 물론이요,
진리 앞에 의연히 살아온 의인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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