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
단편 소설
- 저자
임철우
- 발표매체
민족과문학
- 발표일
1983.가을
줄거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밖에는 갓난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내리고 있다. 그는 공연히 어깨를 떨어 보며 오른편 유리창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쪽 대합실과 접해 있는 이를테면 매표구라고 불리는 곳이다. 역장은 유리를 통해 대합실 안을 대충 휘둘러본다. 지금 대합실에는 모두 다섯 명이 있다. 한가운데 톱밥 난로가 놓여져 있고 그 주위로 세 사람이 달라붙어 있다. 난로가에 모여 있는 셋 중 한 사람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것도 힘이 드는지 등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반쯤 기댄 자세이다. 그는 오래 앓아 오던 병이 부쩍 심해져서 가까운 도회지의 병원에 가는 길이라는 것을 역장도 잘 알고 있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건장한 사람은 그의 아들이다.
그 곁에서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는 싸구려 털모자에 구식 오바를 걸치고 있는데 무척 음울해 보였다. 그 셋 말고도 저만치에 있는 긴 의자에는 잠바차림의 청년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청년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미친 여자가 의자 위에 벌렁 누워 있다. 역장은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톱밥이 부족한 지를 보기 위해 난로를 슬쩍 쳐다본다.
노인은 기차가 영 오지 않을 모양이라고 그의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아들은 전에도 노인에게 병원에 가 보자고 했지만, 고집으로 버텨 오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늘같이 눈 오는 날에 아버지는 병원에 간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다. 농부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황황히 깨물며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그들 부자 곁에 서서 등을 돌린 중년 사내는 노인의 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놀라는 시늉을 한다. 기침소리를 들으면 그는 감방장인 허씨가 떠오른다. 사내가 출감하던 날, 허씨는 고참 무기수답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며 사내의 손을 오래 잡고 있었다. 대합실 안은 조용하다. 이윽고 청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로 다가가다 말고 누워 있는 미친 여자 쪽을 근심스레 살핀다. 그는 대학생이다. 적어도 보름 전까지는 말이다. 청년은 제적 처분되었다는 사실을 학교로부터 통고를 받았었다. 그는 실감이 나지 않아 여느때 하듯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친구들이 그를 에워싸고는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지도 교수는 눈물겨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아 주었었다. 그는 늦게 까지 교정에 있다 뱃속에 있는 오물을 모조리 토하고야 말았다. 대합실 출입문이 열리며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네 사람의 여자들이다. 몸집이 큰 중년여자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처녀, 그리고 나머지 둘은 큼지막한 보따리를 이고 있는 행상꾼 아낙네들이었다. 그네들은 기차가 떠나지는 않았는지를 걱정하며 난로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난로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은 일곱으로 불어났다.
한동안 추위 속을 걸어온 여자들은 한 마디씩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덕분에 대합실에 활기가 넘친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기차가 떠나지 않은 것을 알고 안심을 하고 있는데 뚱뚱이 여자가 안심하기 이르다고 받아친다. 행상꾼 아낙네들이 그녀의 비싼 옷과 반지들을 보며 말하는 것을 주저하자, 뚱뚱이 서울 여자는 말할 상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그 여인은 맞은 편에 있는 바바리 코트 아가씨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여인은 그녀에게서 불결감을 읽어 낸다.
바바리 코트 처녀는 고개를 갸웃 숙이며 중년 여자의 시선을 모른 척한다. 처녀의 이름은 춘심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은 질색이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 못지 않은 용감한 여자인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뚱뚱이 여자가 자기를 여전히 뻔뻔스레 훑고 있음을 확인한다. 춘심이는 고향에 내려왔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길이다.
중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어느 날 밤 무작정 상경한 후로 삼 년만에 처음 찾아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귀향은 여러 친척들의 선물과 얼마의 돈으로 환영을 받았다. 닷새간의 옥자역은 끝이나고 그녀는 다시 춘심이가 되기 위해 고향집을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취직자리를 부탁하던 여동생이 떠올라 코끝이 시큰하다.
이윽고, 멀리서 기적 소리가 울려왔다. 사람들은 문을 열어제치고 플랫폼 쪽으로 몰려갔지만 기차는 그들을 지나쳐 가고 말았다. 역장이 나와서는 그것은 특급열차라고 설명을 하자, 사람들은 다시 역 안으로 들어왔다. 역장도 난로 곁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중년 사내에게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았는지를 묻는다. 사내가 대답하기를 꺼려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를 않는다. 사내는 기차를 타기 전, 서울역 앞에서 굴비 한 두름을 샀었다. 언젠가 감방에서 허씨는 흰쌀밥에서 굴비를 먹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는, 홀로 사는 허씨의 노모에게 줄 굴비를 샀던 것이다. 하지만 허씨의 노모는 죽어 묻힌 지가 오 연도 넘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내는 허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역장은 시계를 본다. 그러다가 역장은 저만치서 서성이고 있는 청년을 발견한다. 그는 지명 수배자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역장은 청년을 난로 가까이로 불러들인다. 그러자, 청년은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역장은 곧, 그가 대학에 다닌다던 오씨네 큰아들임을 알아본다. 역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꼭 성공하라고 격려를 한다.
청년은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평생을 농사만을 해 오셨고, 판사아들을 두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또한 청년에게는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청년은 그의 집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밝아 올 새벽이었다. 그런 부모와 형제들 앞에서 끝내 퇴학을 당했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그는 다시 거대한 도시를 향해 집을 나섰다. 역장과 청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춘심은 입을 삐죽였다. 그녀가 살고 있는 민들레집 근방 일대엔 서너 개의 대학이 몰려 있었으므로, 허구헌 날 보는게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공부를 하는 줄을 모르겠다고 그녀는 늘 의아해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입을 비쭉여 대긴 해도 대학생은 부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머지않아 회사에 다니고 그럴싸하게 살 것이라는 뻔한 사실 때문이었다. 행상꾼 아낙네 중 한 명이 북어 한 마리를 꺼내 난로 위에 올려놓는다. 사람들은 모두 한 오라기씩 들고는 우물거리고 있다. 젊은 아낙이 뚱뚱이 여자에게 아는 사람을 찾아 왔느냐고 말한다. 뚱뚱이 여자는 다 그 몹쓸 년 때문이지 뭐야, 하려다가 입을 오므리고 만다. 뚱뚱이 여자는 이 날 아침 버스로 사평에 도착했다. 그
녀는 사평댁을 만나면 그 동안 쌓인 분풀이를 톡톡히 할 참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몇 달 전만 해도 사평댁은 주방에서 일을 했었다. 그녀는 사평댁을 믿고 의지했다. 어느 날 그녀는 사평댁에게 가게를 맡기고 단풍놀이를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사평댁은 돈을 챙겨 넣은 채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평댁을 찾아 사평으로 내려온 거였다. 금방 주저앉을 듯한 초가 사립을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등등하던 기세가 사그라져 버리고 없었다. 문을 열자, 송장같이 헬쓱한 사평댁과 영양실조로 낯빛이 눌룰한 아이들이 그녀를 맞았다. 뚱뚱한 여자는 한사코 마다하는 사평댁의 손에 몸에 지닌 몇 푼의 돈까지 쓸어모아 쥐어 준 채 황황히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흐유, 산다는 것이 대체 뭣이간디……」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사람들은 각자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중년 사내에게는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래도 흙과 일뿐이다.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는 음식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조리 돈으로 보인다. 춘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무엇이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그네들이 팔고 있는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여겨본다. 청년은 그들의 얼굴에서 평화스러움을 찾아내고는 새삼 놀라고 만다. 사평역을 경유하는 야간 완행 열차는 두 시간을 연착한 후에야 도착했다. 막상 열차가 도착했을 때, 승객들은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늙은 역장은 눈을 맞으며 깃발을 흔들어 출발 신호를 보냈다. 역장은 기차가 떠나자, 눈을 털어 내며 대합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기차를 타지 않은 미친 여자가 혼자서 난로를 독차지한 채 누워 있었다. 역장은 문득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역장은 김씨를 깨우러 가기 전에 톱밥을 더 가져다가 난로에 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눈은 밤새 내내 내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