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나무들과 꽃들은 내리쬐는 태양의 힘을 받아 점점 더 성숙해지고, 사람들의 옷이 많이 짧아지는 시기. 차가운 물을 모아 온몸을 담구며 땀을 닦아내는,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공놀이하는 계절. 한 번씩 길게 내리는 비를 모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더운, 여름. 태양의 힘이 더 커지는 시간. 네르크가. 커다란 가방을 옆에 둔 카즈마를 한 번씩 안아주며 부모는 인사를 건넸다. “학생들보다 2살이나 어리다고 기죽지 말고 잘 하렴. 여름인데 건강 조심하고, 바다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들어갈 때는 꼭 준비운동 하는 거 알지?” “예.”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하고 공부에 더 전념하고. 어리다고 까불면 혼내줘. 넌 그럴 만한 지식이 있으니까.” “응, 엄마.” 보헤즈하이스쿨 하복을 입은 아들을 보니 더 듬직한 느낌이 든다. “갈게요. 방학 때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잘 지내야 한다-!” 가방을 든 카즈마는 씩씩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빠르게 걸었다. 새로운 환경, 보헤즈하이스쿨 그리고 기숙사를 향해.
하지만 이런 “계절” 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하늘 위의 세상, 바로 천계. 벌컥, 우당탕! “카인!”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여성은 흘러내리는 안대도 잊고 집안을 살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있던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왼쪽 눈을 감고 기운을 살피기 시작했다. ‘불의 기운… 불의 기운….’ 일단 집 안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집밖으로 기운을 흘려보내보았다. 하지만 잡힌 것은 불이 아닌 바람의 기운이다. 라미네? 안대를 고쳐 쓴 그녀, 오스카는 집 밖으로 나와서 바람의 기운을 뿜고 있는 라미네를 반겼다. “어서 오렴.” “카인은 총사령관의 저택에 있어요, 오스카. 데려오라고 해서 왔어요. 제가 직접 봐야 알지 않겠어요?” “그렇구나. 가자.” “예.” 오스카는 현관문과 대문을 단속한 뒤 라미네와 함께 총사령관의 저택으로 향했다. 거실에 올라선 두 여성은 빈자리에 한 명씩 섰다. 여섯 명은 입을 모아 집합 완료를 알린다. “7천왕, 집합 완료.” 여섯 명 앞에서 가면을 쓰고 뒷짐 지고 선 사내가 말했다. “음. 대강의 소식은 들었다. 라미네, 공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예. 제 생각입니다만, 다시 태어나면서 기억을 모두 잃은 것 같습니다.” 사내의 싸늘한 눈초리가 가운데에 선 사내에게로 향했다. “카인. 이건 네 실수다.” “예. 전 환생인줄로만 알고 그랬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라미네, 미안하다.” 그래서 임무를 전하면서 쉬운 거라고 했다. 당연히 공간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을 거라고 여겼던 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적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사내, 카인은 고개를 숙여 반성의 태도를 보인다. 가면 쓴 사내 총사령관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성 라미네에게 건넸다. “라미네는 이것을 보라.” “사진입니까?” “음. 실종 직전에 찍은 공간의 지배자, 리오 로제엄의 모습이다. 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었지. 천신께서는 이왕 이렇게 된 것, 그의 후생을 찾아 공간의 지배자로 다시 키울 생각을 하고 계신다. 이와 닮은 사람을 최대한으로 찾도록. 10만 피어를 주겠다. 활동 자금으로 쓰도록.” 라미네는 행복한 미소를 가까스로 숨기며 총사령관이 건넨 10만 피어를 받았다. “부모한테서 용돈을 받고 더군다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왜 돈을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최대한 아껴 쓸 것을 명한다.” “예!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미네의 끄덕임을 본 총사령관은 용건 끝난 듯 뒷짐 진 손을 풀고 가면너머로 짧게 말했다. “음. 이상.” “7천왕, 해산.” 인사를 건넨 7천왕은 총사령관의 자택을 나와 각자 맡은 세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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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은 새로 생긴 이복동생 크리스와 친분을 쌓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 중 하나는 그녀에게 쿠키를 구워주는 것. 엄마도 아빠도 일 때문에 바빠서 집을 비우실 때마다 종종 반찬을 직접 만들어먹거나, 밀가루 반죽을 해서 오븐에 쿠키를 구워 먹었었기에, 요리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한마디로 4월이 돼서 새로이 바뀐 기숙사와 학교 분위기는 뒷전이었다. 어린 크리스에게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주었다고 판단한 뒤에 다시 돌아온 학교. 날짜 가는 것도 모르고 있던 윌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달력에 “기말고사” 라고 적힌 것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크헉. 공부 하나도 못 했는데 시험이야?” 연쇄살인사건 해결하고 간신히 공부할 수 있게 됐나 했더니, 증축과 더불어 엄마의 입양하고 싶다라는 의견 아래 생긴 이복동생과 친해지느라, 거의 학교에 안 오다 시피 했던 윌이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험기간 2주를 다른 일에 쏟아 부었으니 공부를 할 틈이나 있었으랴. “몰랐어요? 바로 내일부터인데.” 책상 의자에 앉아 공부하고 있던 카즈마의 확인사살에 윌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한 카즈마가 물었다. 사흘 만에 보는 선배지만 궁금증은 여동생한테 가 있다. “잘 봤어요? 몇 살이에요? 성별은요?” “7살이야. 여자앤데 뭐, 적당히 귀엽게 생겼어.” 무슨 소리야? 똑똑하단 소리를 듣는 카즈마가 알아듣는데 무리가 꽤나 있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음-.” 카즈마의 물음에 윌은 한참이나 고민했다. “마리엔이나 유미보다는 예쁘지 않아.” 그 둘은 또래다. 한창 클 때인 크리스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니, 윌? “근데 애가 아직 어린데요? 부모는요?” “죽었어. 지난 3월의 그 사건 때.” “아-. …그래서?” 따뜻하게 잘 대해줬냐는 말이 생략된 간단한 질문이었다. “고아가 총 3명이나 되더라. 친척들이 거두어가지 않을까 해서 신문에 광고도 실어놨는데 아직 연락이 없는 모양이야. 엄마가 셋 다 입양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걸, 아빠랑 나랑 달래느라 완전 진땀을 뺐어.” 동문서답이다. 입양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뷰츠 부인은 경찰서에 갔었고 고아 셋을 모두 데려왔던 것이다. 너무 놀라 기절 직전의 남편과 아들과 다시 말싸움 한 바탕 벌렸던 뷰츠 부인이 먼저 항복 선언을 해서 겨우 멈췄다. “리유와 레오날드는?” “리유 선배는 복사할 게 좀 있다면서 나갔고 레오날드 선배는 학교 구경하고 있을 거예요. 저녁은 먹었어요, 선배?” “응, 먹고 오는 길이야. 큰일났다~ 내일부터 시험인데 공부 하나도 못 했어.” “정말 못 했어요?” “응.” 고개를 끄덕인 윌은 기어이 훌쩍였고 카즈마는 측은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를 다독여주었다. 막 들어온 리유는 동생이 형을 달래는 기이한 현상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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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난 후 4월 7일 목요일.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다. 중요한 점은 중간고사와 비교해서 성적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가 나오기 때문에, 30등 이상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게 되어 있다. 더불어 레오날드와 카즈마를 비롯한 이번에 편입한 학생들은 시험을 치지 않는 면책을 받을 수 있었다. “하아.” ‘공부를 안 했다고는 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무려 30등이라니.’ 그래도 리유가 복사를 해온 시험 대비 노트를 잠깐이라도 봐서 그나마 나았다. 거기까지라고 한다면 윌이 이렇게 한숨을 내쉬지는 않는다.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다 같이 시험기간 1주를 그냥 허비했는데, 리유만 혼자 지난 중간고사 성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윌의 표정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근데 리유 넌 어째서 1등 유지인 거야.” “공부했으니까.” 이런! 하지만 리유를 향한 친구들의 반격은 끝나지 않았다. 마리엔과 유미도 성적표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같이 공부했거든?” “난 5등이나 떨어졌는데, 리유와 마리엔만 유지라니 이건 불공평해. 윌도 많이 떨어졌는데 말이야.” 흐엉~ 유미의 비수에 당한 윌은 입술을 삐죽였다. ‘꼭~ 저렇게 정곡을 찌른다니깐. 물론 이번에는 비수라고 하는 쪽이 옳겠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유미 너까지 그러기야? 너무 해.’ “그만 해.” “마리엔도 유지다.” 정곡에 이어 말 돌리기냐? 참으로 가지가지 하는구나. …응? 누구라고? 짜증스레 고개를 숙였던 윌은 고개를 들어 성적표를 다시 바라보았다. 마리엔은 3등, 급장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했다. “마리엔, 3등 축하해!” “축하해, 마리엔!” “리유도 1등 축하한다!” “와우~ 회장과 급장은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냐?” “아, 맞다! 리유 너 지난 3월에 있었던 살인사건 해결사라면서?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공부를 제대로 못 했을 텐데 1등을 유지하다니. 그치~” 주변에서 터지는 축하와 인사들은 리유의 얼굴을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지게 만들었다. 그가 먼저 돌아섰다. “윌. 가자.” “응. 에휴.” 카즈마와 레오날드는 교실에 있겠지? 그들이라도 몰라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윌과 리유는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학생들 틈 사이에 묻혀 있던 마리엔이 봤다. “윌.”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고민이 많나보다.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될까?’ 그리하여. 마리엔은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해서 나름 정성껏 만든 사과파이를 기숙사로 가지고 갔다. 특별히 윌을 위해서 만든 요리니까. “뭐? 날 위해서?” “응. 아까 성적 떨어진 것 때문에 기운이 없어보였거든. 그래서 내가 제일 잘 만드는 것으로 준비해봤어.” 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성적이야 2학기 때 다시 올리면 되는 걸. 이번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아쉽지만 후회는 안 해. 근데 뭘 만들어왔는데?” “이거야.” 윌의 말에 마리엔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수건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빠져나오지 못 했던 연기가 위로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우와!” 마주 앉은 윌과 리유가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마리엔이 구워온 진갈색의 사과파이는 겉으로는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맛은? “윌, 어서 먹어봐! 다들 맛있다고 난리였어!” “응, 잘 먹을게!” 뜨끈뜨끈한 사과파이를 한 조각 뜯어서 한 입 베어 먹은 윌의 표정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 ‘이걸 한 마디로 무슨 맛이라고 해야 하지?’ 맵지도 짜지도 달지도 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맛있지도 않은. 잔뜩 들어간 게 느껴지는데도 특이하게 밋밋하다. 그렇다. 이건 한 마디로 환상적이다. 특별히 맛있는 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환상적이라고 말하겠다. “역설적”으로. “리유도 한 입 먹어볼래? 카즈마와 레오날드도.” ‘1등한 분풀이로 널 나와 같은 희생양으로 끌어들이겠다~!!’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선배.” 마리엔은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는 윌의 친구다. 친구한테 잘 보이면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래서 먹어도 된다고 말한 뒤에 한 입씩 먹어보는 리유와 카즈마, 레오날드의 표정은 또 왜 저런 것일까. “음-.” 리유는 한 조각을 모두 먹고도 판단이 제대로 안 되는 지 한 조각을 더 먹어보았다. 카즈마도 한 조각씩 더 먹어보았다. 네 남학생의 얼굴을 살피던 마리엔이 물었다. “윌, 어때? 내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거야.” “응? 으으응, 마, 맛있어.” “맛이……. 있네요.” 간신히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서툰지라 혀가 꼬부려지려고 한다. 카즈마는 떨떠름하게 변하려는 얼굴을 간신히 숨기며 말했다. 그 역시 거짓말은 서투르다. “음, 맛있어요!” 반면 레오날드만 맛있게 먹는 중이다. 캐츠라서 입맛이 특별한 건가. 조금 펴진 윌과 리유와 카즈마의 시선이 레오날드에게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정말? 그럼 또 만들어올게!” “!!” 환상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사과파이를, 원치 않는 손으로 한 조각 더 베어 먹던 윌과 리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니, 안 그래도 돼.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윌은 다시 꾸부려지려고 하는 혀를 펴면서 간신히 말했다. 환상적인 그 맛. 바꿔 말하면 “맛을 아예 느낄 수가 없다” 이다. 마리엔의 요리 실력은 정말 형편없지만 주변에서는 마리엔이 ‘예쁘니까’ 맛있다며 억지로 먹었고, 그녀 역시 그냥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이다. 정말 더럽게 맛이 없는 사과파이인데도 그걸 계기로 윌은 마리엔을 다시 보게 된다. 성적이 떨어져 기운 없어 하는 자신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는 마음이 예뻐 보였던 것이다. 물론 맛은 멋들어지게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 사람은 한 가지 단점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기말고사가 있은 뒤 이틀 후. 리유는 어느 전화 한 통을 받게 됐다. 다행히 쉬는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아, 실례합니다. 리유 바르데스 군 되십니까?” “예, 접니다만.” “전 보헤즈시장을 모시는 보좌관입니다. 전화 바꿔드릴 것이니 끊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상대의 차분한 말에 리유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잠깐만, 지금 누구라고 말한 거야? 보헤즈시장이라고? 맙소사 세상에. 황제도 모자라서 이제는 시장이야?’ 시장이라는 말에 조금 긴장한 리유는 PT를 들고 얼른 복도로 나왔다. 직후 시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리유 군?”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해결사인 자네의 조언을 구할까 해서 전화를 했다네. 아, 본론으로 들어가서.” 윌의 엄마가 고아를 입양했다는 소문이 하나 둘 퍼지기 시작하면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고아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도리어 아이들이 양부모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장의 입양허가증은 뷰츠 가정에게로만 내려왔다. 고의적인 선행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렇다고 두 아이를 계속 경찰서에 지내게 할 수도 없기에, 보헤즈시장은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국왕이 보낸 전언이 도착했다. -리유 군에게 협조 요청을 구해보게나. “리유? 설마 리유 바르데스를 말씀하시는 건가? 하지만 그는 지금 분명-” “학교에 있습니다.” 오른팔 격인 보좌관의 말이었다. 보좌관은 학교 일정을 알아 와서 그에게 보여주었고 이내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시장의 고민을 전해들은 리유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PT에 대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아이한테 부모를 선택하게 하는 건 어떨까 합니다. 고아를 만들기 위해서 또 다시 살인사건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물론 아이를 갖기 힘든 40대 이상의 어른들을 중심으로 해야겠지요.” “오, 그렇군! 조언 진심으로 고맙네!” 리유의 의견을 수렴한 시장은 PT를 뚝 끊어버렸고, 전화 예의를 국 끓어먹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리유는 PT를 살짝 흘겨보고는 교실로 향했다. 시장이라는 사람은 예의가 원래 없는 건가? …쯧. 교실 안으로 들어온 리유가 자리에 앉자 윌이 대표로 물었다. 짐짓 궁금한 눈치다. “누구야?” “아무 것도 아냐.” 받아친 리유의 표정은 그렇게 썩 좋지가 못 했다. 아무래도 연쇄살인사건 해결사 감사패를 대신 받게 된 게, 썩 좋은 방향으로의 적용은 아닌 것 같다.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리유였다.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감사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뒷줄 쪽으로 앉아 있는 카즈마와 레오날드는 서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기울이고 어깨를 으쓱이는 등 행동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며칠 후 4월 14일 목요일 아침. “음-.” “리유, 왜 그래? 아침부터.”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정말,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한 방 쓰고 있는 카즈마와 레오날드도 관심을 쏟는다. 리유는 어제부터인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음을 느꼈다. 가장 크게 들렸던 윌의 목소리가 절반 정도 떨어졌다. 그가 톤을 낮춘 건지 아니면 귀가 이상한 건지 둘 중 하나다. “목소리 줄였니?” 리유는 자신의 귀를 조금 만져보면서 물었고, 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왜 그래, 오늘 좀 이상한데?” “음-.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아. 제일 처음 너의 폭격에 당해서 병원에 갔을 때도 아무 소리 못 들었어.” “풋!” “그건 그래요.” 카즈마는 살짝 웃었고 레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2주 넘게 한 방 쓰고 있지만 윌과 카즈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그다. 병원 다녀온 게 두 달 정도 됐다. 리유는 연신 양 손가락으로 귀를 만지면서 대답했다. 귀 때문에 이상해하는 리유에게 윌이 제안을 하나 건넸다. “병원 가봐. 아니면 양호실.” “그 정도는 아닌데.” 그 날과 금요일 수업은 그런 대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만큼은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마침내 사건은 터졌다. “일어났네, 잘 잤어?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리유, 좋은 아침이에요-” 윌과 카즈마와 레오날드의 아침 인사인 건 입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긴 것 같다. “응? 뭐라고 했어?” “좋은 아침이라고.” “안 들려.” 라고 하는 리유 자신의 목소리조가 정확히 들리지를 않는다. 왜 이러지, 내 귀가? 갑자기 안 들리는 이유가 뭐냐고! “나 목청 크다면서 안 들린다고 하면 어떻게 해?” “뭐라고?” “상황 이상한데요?” “그러게요.” 안 들린다는 식으로 자꾸만 받아치는 리유. 카즈마와 레오날드 역시 미간을 살짝 좁히고서 리유의 상태를 살폈다. 윌은 짜증을 안으로 숨기고 PT를 꺼내 적었다. -나 목청 크다면서 안 들리면 어떻게 해? 정말 병원 한 번 가봐야겠다. 윌의 문자를 본 리유도 문자로 답했다. -수업은. -소리도 안 들린다면서 지금 수업이 문제야? 일단 병원부터 가봐. 무슨 문제인지 알아야 할 것 아냐. -응. 그럼 그리 할게. 그럼 나 먼저 준비할게. -아침은? -병원이 먼저야. PT를 책상 위에 올린 리유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나가고 나자 카즈마가 물었다. “선배, 리유 선배가 뭐래요?” “음, 병원 갔다 온대.” 레오날드의 질문도 연이어 떨어졌다. “아침은 어떻게 하고요?” “편의점에서 사먹겠대. 자.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네-.” 동시에 대답하는 카즈마와 레오날드지만 적응이 쉽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윌은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도 입으로는 웃었다. 셋이 나란히 내려온 식당. 마리엔과 유미는 이미 식당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면서도 2주가 지나도 둘과 같이 지내는 캐츠 두 명은 보지도 못 했다. 두 여학생은 넷 중 한 명이 안 보이자 궁금한 듯 물었다. “리유는?” “병원. 귀가 좀 안 좋은가봐.” “귀?” 마리엔과 유미는 되물으며 눈을 껌벅였다. 윌이 받아친다. “자세한 건 병원 다녀오면 알겠지.” 식판에 식사를 받아서 자리에 앉으며 레오날드가 물었다. “그쪽은 우리 캐츠 안 들어왔어요?” “들어왔는데 자기들끼리 놀아. 둘이서만.” “친한가봐.” 마리엔의 대답에 유미가 덧붙였다. “2주가 넘어가도 그 존칭은 여전하네.” “하핫. 두 사람이랑은 친해요?” “인사도 안 해.” 마리엔과 유미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윌과 카즈마, 레오날드는 그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인사도 안 한다는 건 좀 많이 심각하다.
한편. “헛.”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온 리유는 허탈하게 웃으며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두 번 다시 그깟 일로 난리치며 병원까지 쫓아오는 일 없을 거라 다심하면서. “아우, 민망해! … 이제 어쩌지?” 특별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안 들린다고 심각하게 굴었으니. 그렇다고 거짓말과 친분이 아주 두둑해서 자연스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리유는 학교를 향해 걸으며 문자를 하나 보냈다. -밥 다 먹었어? -응. 다 먹고 휴게실 올라왔어. 그래서, 병원에서는 뭐래? -그건……. 가서 얘기할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병원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휴.” 화끈화끈 낯 뜨거운 게 보통이 아니다. 휴게실. “뭐어어어어?” “귀이이지이이이이?” 윌 방의 셋과 마리엔과 유미가 차례로 어이없다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세상에 귀지라니……. 리유를 보는 윌과 카즈마의 시선이 조금 달라 있다. 어처구니없어 할 말도 잃은 그들이다. “허허허허허.” 레오날드만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간호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간 리유는 그녀가 툭툭 두드리는 의자에 앉았고, 의사소통이 안 될 그를 대신하여 간호사가 대신 의사에게 리유의 병에 대해 알렸다. “선생님, 소리가 아예 안 들린다고 하는데요.” “음? 아니, 일전에 고막이 무사한지 알고 싶다면서 찾아온 그 학생 아닌가. 일단 귀를 좀 봐야겠어.” “?” 의사의 말이 안 들리는 리유는 자리에 앉아서 멀뚱히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아-! 그 때 그 선생님!” “음. 날세.” 대답한 의사는 직접 손을 뻗어 리유가 앉은 의자를 180도 돌렸다. 마주 앉은 상태로 진료를 어떻게 하나. 코나 눈이 아파서 온 것도 아닌데. 리유의 두 귓속을 모두 살핀 의사는 꽤나 떫은 표정을 지으면서 간호사에게 말했다. “귀이개와 화장지 서 너 장, 넉넉히 준비 좀 하고.” “면봉으로요?” “그걸로 파지냐? 얘는 귀이개가 아주 필요해.” ‘아주’ 를 특히 강조하는 의사였다. “예, 알겠습니다.” “?” 리유는 여전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의사와 간호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의사를 지시를 들은 간호사는 진료실을 나가서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하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좀 전에 나랑 같이 진료 2실로 들어간 남학생 있지? 귀가 안 들린다고 해서 진료를 했는데, 선생님이 귀이개랑 화장지 좀 갖고 오라 하셔.” 진료실에서 나온 간호사의 말에 동료는 어이없어 했다. “뭐어어? 어머, 그럼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귀지를 쌓아뒀다는 말이야? 세상에!” “안 그래도 일전에 왔을 때 선생님이 저 학생 귀지가 절반 정도 쌓여서, 귀를 좀 파야한다고 말했는데 그걸 못 들었던 모양이야.” “와하하하하하!” 두 간호사는 잠시 동안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 간호사가 귀이개와 화장지 몇 장을 뜯어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챙겨왔어요, 선생님.” “음.” 의사는 리유의 귀가 책상 위쪽으로 올 수 있게 그의 의자를 돌리고, 그 아래에 화장지를 깔고서 귀이개로 리유의 귀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장지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귀지들은 삼각산을 쌓으며 몰렸다. 간호사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입을 헤- 벌리는 반면 리유는 표정이 점점 환해진다. 귀 한 쪽당 거의 5분을 파고 나자 챙겨온 화장지 5장이 두툼하게 쌓였다. “이건 아무래도 박물관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겨우 17년 인생을 산 젊은 청년의 양 귀에서 이렇게 많은 량의 귀지가 나온 건 기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귀가 뻥- 하고 뚫린 리유는 밀려오는 아픔을 애써 삼키며 꽤나 신기한 듯 물었다. 귓속이 고통을 호소하는 통에 만져보고 싶어도 그러지도 못 하고 있다. 와- 엄청 잘 들려~!! 하지만 아파. “박물관이요?” “음. 소리가 안 들린 건 네 귀를 가로막은 이 귀지 때문이다. 귀지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음-. 설명 부탁드려도 되나요?” ‘뭐어?’ 리유의 부탁어린 어조에 의사는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소리는 공기 중에 움직이면서 먼지를 운반하지. 그 먼지들이 쌓이고 쌓여서 귀지가 되는 거라네. 사람들은 대개 귀가 가렵다 싶으면 귀이개나 면봉으로 귓속을 긁어서, 귀지를 파내어 귀를 청소하지만. 흐음- 앞으로는 3주나 4주에 한 번 정도는 귀청소를 해주게나. 그리 해야만 또 소리가 안 들리는 이상 증세를 피할 수 있을 테니. 진료 끝났어. 가 봐.” “예. 감사합니다.” 리유는 아픈 귀를 떠안고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병원을 나왔다. 덤으로 귀지는 받아내지 못 했다. 의사는 정말로 박물관에 넘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보헤즈기념박물관은 어느 이상한 기념품을 받게 되었다. 소포를 통해 기념품을 받은 입구의 직원은 그것을 학예사에게 전했다. “학예사님!” “?” “소포가 하나 도착했는데요.” 쪼그마한 소포의 받는 사람은 박물관 앞이었다. 허나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박물관 내의 누가 받건, 그건 상관없는 듯했다. 소포를 받은 학예사는 궁금증이 올라와서 소포를 직접 뜯어 직원과 함께 확인했다. “으!” “아, 뭐야!” “조사대를 직접 편성해서라도, 이걸 누가 보냈는지 확인하세요. 얼른!” “예!” 학예사는 그 소포를 그냥 휴지통에 처박았다. 편지도 같이 있었지만 기념품이 뭔지를 확인한 학예사의 눈살은 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못 볼 것을 본 얼굴의 그녀는 인상을 쓴 채 중얼거린다. “어떤 미친놈이야, 도대체.”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귀지였다. 물론 리유는 자신의 귀지가 의사의 손을 거쳐 박물관에 갔다가, 빛을 보지도 못 하고 휴지통에 처박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리유의 설명이 끝난 뒤. “어휴.” 귀지 때문에 그 난리를 쳤단 말인가. 윌과 카즈마, 레오날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마리엔과 유미 얼굴도 화끈거리고 있었다. 4월 10일 이른 아침. “후-.” “왜 나까지…….” 죽도를 들고 텔레텔레 기숙사 건물로 올라오는 검도부 부원들. 그들 중에는 어깨가 축 쳐진 윌도 보인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 리유 옆에는 윌이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뻗은 레오날드는 고양이로 변신해, 같은 방에서 지내는 윌의 품에 안겨 오는 중이다. 레오날드의 죽도는 리유가 들고 있다. 편입과 동시에 특별활동 가입서를 받았던 카즈마와 레오날드는 얼떨결에 같은 방을 쓰는 윌과 리유의 특별활동을 따라서 하게 되었다. 카즈마는 윌 따라서 합기도를, 레오날드는 리유 따라서 검도를. 하지만 그것은 수난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종에 불과했다. 가이넥스 대륙에서는 1년에 두 번 검도대회를 각 시마다 펼친다. 우승이나 준우승, 또는 검도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학생들은 하이스쿨 졸업 후 곧장 왕국 소속의 기사단, 장군단으로 가거나, 국왕이나 왕비 등 웃전들의 호위무사로 가게 된다. 국왕의 눈에 띄어 유니버시티를 가지 않고 큰 불편함 없이 탄탄대로의 장래를 걷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합기도도 마찬가지인데 검도를 더 우선시하는 이유는, 검도는 공격성이 큰 반면 합기도는 방어성이 큰 호신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에 두 번 있는 검도대회 중 첫 번째 대회가 다음 달 초, 5월 1일 일요일로 일정이 잡혔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일요일인 오늘도 아침부터 검도 훈련에 들어갔고, 리유와 레오날드는 부원이라서 갔지만, 샌드위치가 되어버린 윌은 무슨 일인가. 사건의 경위는 바로 어제 저녁 때다. 일정이 잡혔다면서 가이넥스 대륙 총 통치자 황제에게서 PT로 직통으로 연락이 온 곳이다. -윌 군은 5월 1일 일요일에 있을 보헤즈시 검도 대회에 필히 참가하도록 하라. “……! 이게 뭐야?” 얼굴이 싹 굳어지는 윌. 방에 같이 있던 리유와 카즈마, 레오날드는 뭔가 싶어 옆에서 같이 문자를 읽는다. 윌이 받은 그 문자는 거기서 끝이었다. 같이 읽은 리유가 물었다. “너도 왔니?” 그의 말에 윌이 휙 고개를 돌려 친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그럼 리유 너도?” “난 너보다 더 했어.” 대답한 리유는 PT를 꺼내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문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조금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황제의 문자를 받고 마음이 심히 괴로운 듯. -리유 군은 5월 1일 일요일에 있을 보헤즈시 검도 대회에 반드시 참가하도록 하자. 가지 않으면 기사단이 학교로 출동할 것이다. “무서워요, 선배.” 문자를 같이 읽던 카즈마의 말이었다. 레오날드 역시 침을 꿀꺽 삼키는 게 긴장한 듯 보였다. “기사단이 출동한대요. 만약에 출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리유? 문자가 더 없어요?” 레오날드의 물음에 리유는 아래 단추를 조금 눌러서 문자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리유 군을 강제로 훈련시킬 지도 모를 일이네. 난 자네와 윌 군, 두 사람이 하이스쿨을 졸업하면 곧장 내가 있는 궁으로 불러들이고 싶거든. 문자를 본 레오날드는 덜덜덜 떨었다. “더 무섭네요, 선배.” 윌이 고개를 돌려 정곡을 찌르는 카즈마를 바라봤다. ‘얘가 유미랑 며칠 붙어 다니더니 정곡 찌르는 법을 배웠나? 아니다. 생각해보니 원래 좀 건방진 녀석이었어.’ 다시 일요일. 방으로 온 리유가 카드키로 문을 열었고 윌이 먼저 품의 레오날드와 함께 들어갔다. 푸욱-! 예외인 카즈마는 2층에서 자다가 방안을 급습하는 땀 냄새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3명이 한꺼번에 방에 들어서자 푹 쩔은 냄새가 순식간에 방안을 에워쌌다. 자다 깬 카즈마는 코를 막고 내려와 커튼을 한쪽으로 밀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너무 놀라 안경도 쓰지 않은 채다. “으억, 뭐야!! 선배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윌, 얼른 들어와.” 카즈마의 외침에 동문서답한 리유는 옷가지를 챙겨 먼저 화장실로 가고, 고양이 모습의 레오날드를 2층 침대에 눕힌 윌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닫히고 땀 냄새가 조금 수그러들기는 했으나, 침대에서 뻗듯이 잠이 든 레오날드 때문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층에 선 카즈마는 선배들의 달력을 살폈다. 리유의 달력에만 『일요일-검도부 종일 훈련, 윌과 레오날드도 함께』 “아.” ‘저거 때문이구나. 그럼 어제 봤던 문자 때문에 오늘부터 훈련에 들어가는 건가.’ “후아암-” 하품을 크게 한 카즈마는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어 잠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을 닫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윌 선배, 옷을 안 챙겨가던데?” 중얼거리며 눈을 껌벅인 카즈마는 윌의 옷장에서 수건 한 장과 함께 상, 하의를 꺼내어 들고서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윌 선배~ 옷 안 챙겼어요~” 하지만. “아퍼, 아퍼, 아퍼, 아퍼!” “조금만 참아 봐~ 윌 너 많이 나온다?” “리유 너어어? 너 나중에 두고 봐.” “쿠쿡.”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만 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카즈마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리유가 들고 들어갔던 옷과 수건은 4층짜리 조금 큰 열린 옷장의 맨 위에 있고, 땀에 쩔은 냄새를 폭폭하니 풍기는 옷가지는 바로 아래층에 윌의 옷과 함께 놓여 있었다. “윌 선배- 리유 선배-” “카즈마?” 이구동성이 들리고, 이어 쳐져 있던 흰색 커튼이 살짝 열리며 리유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 “윌 선배 옷 챙겨왔어요, 선배.” “2층에 놔줘.” 리유는 대답과 함께 커튼 안으로 고개를 당긴 뒤 커튼을 닫았다. 물 뿌리는 차악- 소리와 윌의 물기 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여전히 사이가 좋다고 생각한 카즈마는 부럽다는 눈빛을 담아 바라보면서 화장실 문을 닫았다.
오후 12시 조금 넘어서, 카페. “한 달, 하고도 2주가 더 걸려서 죄송합니다. 그만큼 재미는 보장하지요. 여느 때처럼 70%.” “예, 70%! 예?” 카즈마와 마주 앉아 있던 양복 차림의 사내들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여느 때처럼 70%라니, 이전에는 80%를 웃돌았던 그인데. “어쩐 일이십니까, 10%나 내리시고?”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받아친 카즈마는 말에 잠깐의 틈을 놓고 바깥의 풀숲을 잠시 바라봤다. 풀숲 너머에 있던 선글라스의 사내들은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몸을 얼른 숙였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있는 자들이니 풀숲으로 숨기는 건 아무리 해도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들킨 건가?” “제길, 눈치하고는. 역시 카즈마 네르크. 아이렌트 혈통의 명문인 네르크 가문의 자제이며 PT를 발명한 천재 프로그래머. 잠시 모습이 안 보이더니 다시 보였어. 최초 목격된 곳이 보헤즈하이스쿨 앞이던가?” “음, 그 앞이 맞아.” “어떻게 할까? 우리끼리는 무리야, 너도 알잖아.” “…….” 사내 A의 말에 바로 옆 사내 B는 묵묵부답으로 답을 대신했다. 주시를 계속하던 B가 물었다. “3월 급식비 도난사건의 해결사가 바로 저 녀석이야. 사건을 저지른 자는 분명 그 놈이라고. 그 녀석은 단지 학교 급식비를 되찾기 위해 나온 것뿐이야.” “프로그래머인 만큼 어느 정도 이름값이 있는 녀석인데.” “가장 큰 문제점은 네르크 가문의 자제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 집에서 우리가 했다는 것을 알아봐. 우리를 가만히 놔두겠어?” “당연히 안 그러지.” 사내 B의 말에 사내 A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눈치가 장난이 아니야. 우리가 있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 우리를 이상하게 보고 있다고~” 너희는 애초에 이상한 자들이잖아. “어쩌지, 어쩌지, 어떻게 하지?” “글- 쎄. 아무리 해도 우리끼리는 무리라는 것을 난 아주 잘 알아. 그리고 말이야, 신문을 보니까 캐츠가 일으킨 살인사건의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저 녀석의 학교 선배래. 우리끼리는 무리라니까. 살인은 꿈도 못 꾸잖아.”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난 피가 무섭단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네가 해!” “싫어! 피가 무섭다니깐! 죽어달라고 요청할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희 조직폭력배 맞니? “아! 다크 블러드(Dark Blood)에게 의뢰해볼까?” “그건 더 나쁜 짓이야!” “그런가? 우~ 저 녀석 계속 우리를 보고 있어!” “제길.” 사내 A와 B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더 숙였지만 카즈마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풀숲을 주시했다. ‘역시 그 사건 때문인가.’ 카즈마는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면서 회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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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정오. 보헤즈미들스쿨에서는 이번 3월 식비를 통째로 도둑맞았기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나 있었다. 총무가 짝이라서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졸지에 용의자가 된 카즈마. 하지만 그는 차분하게, 자신이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용의자라는 의심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런 뒤 그는 지금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4시간 동안 교직원을 포함한 전교생의 사물함과, 가방, 책상 서랍을 수색했지만 각 반에서 사라진 급식비는 나오질 않았다. “범인은 내부인이자 외부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카즈마?” 담임의 물음에 카즈마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얘기를 꺼냈다. “학교를 졸업했거나 전근을 가서 우리 학교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저지른 범행일 확률이 높아요. 지금이 식비를 걷는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전교생의 식비를 모두 훔치는 건 힘들어요. 그리고 반 열쇄를 모두 확인한 결과 지문이 묻어 있지 않았고, 교무실 문이 부서진 건 이전에 누군가가 강제로 문을 억지로 열었음을 의미하죠. 즉, 계획범행이라는 겁니다. 졸업생이나 전근을 간 교직원 중에 한 명인.” 논리를 바탕으로 둔 추리다. 타당하고 허점이 없었기에 모두 카즈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범인은?” “…….” 카즈마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짧게 묻는 총무를 바라봤다. “범인을 알 것 같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당장 경찰서 쫓아갔지. 난 방금 내부인이자 외부인이라고 했어. 그 얘기는 용의선상이 학교를 벗어났다는 뜻이 되지. 그 선이 정확히 잡히지 않으면 범인이 누군지 확정을 못 지을 거야. 선생님, 일단 점심은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전 지금 평소 이상으로 배고프거든요.” 아침부터 여기 저기 뛰어다녔다. 게다가 오늘은 어머니가 야근을 하고 아침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신 덕에 아침도 못 먹었다. 평소 이상으로 배가 고픈 게 이상하지 않다. “아! 자, 다들 식사하러 가자꾸나. 카즈마, 용의선상이 잡히면 범인을 잡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르면 오늘 안으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카즈마의 말에 담임과 총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제 밤에 돈을 훔쳤고 계좌에 넣는다고 해도 어제는 일요일이니까 불가능하죠. 그리고 오늘 아침 4시간의 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면 금방 들킬 거라는 것쯤은 범인도 알고 있을 테니, 얼마씩 나눠서 은행에 묶어둘 겁니다. 계좌가 많으면 적은 금액으로 분산이 될 거고, 그렇지 않다면 얼마씩 한 계좌에 넣어두겠죠. 가능성은 여러 가지, 주변 은행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여야겠죠.” 고개를 끄덕인 담임이 교실을 나가려는데 카즈마가 그를 붙잡았다. “계좌를 새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도 배제할 수는 없어요. 입출금이 아닌 적금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죠.” “어, 알았어. 형사님~” 담임은 형사를 찾으며 복도를 누볐다. 그를 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접지 않은 채, 카즈마는 손을 서너 번 쥐었다 폈다. 밥 먹으러 가도 되는 거겠지? 배를 움켜쥐고 울상을 짓는 카즈마를 본 급장이 눈치를 채고 통솔을 하여 그들은 식당으로 갈 수 있었다. 점심시간 때 카즈마는 처음으로 밥을 세 공기나 먹어보았다. 그리고 20분 뒤. “형사님! 보헨은행에서 수상한 남자가 적금통장을 3개나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놈이다, 가서 추적해!” “예!” 경찰관 넷과 형사, 그리고 뒤를 카즈마가 이었다. ‘아싸~~ 내 추리가 통했다! 후후후후. 이대로 미제사건들을 해결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리고 해결하면 경찰 아찌들도 까무러칠 테고. 우히히히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카즈마이었다. “앞을 제대로 보고 뛰셔야죠, 형사님. 제 추리가 맞아서 다행이네요.” “꼬맹이! 지금 어디 가나?” “제가 가설을 세운대로 해서 범인이 잡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 검거 현장을 직접 보고 싶은데요. 범인이 훔쳐간 돈도 되찾아야 하고요.” “훗. 꼬맹이, 너무 거만한 거 아닌가?” “제 이름은 카즈마 네르크입니다. 천잰데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죠.” “오~ 15살 천재 프로그래머가 바로 꼬맹이 자네였군!” 카즈마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 를 그려보였다. 잠시 후 도착한 보헨은행. 형사는 3개의 적금통장을 만들었다는 단서를 바탕으로 범인 추적에 성공, 이윽고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범인은 카즈마가 추리한 대로 내부인이자 외부인, 전근을 간 어느 남자 선생이었다. 그리고 형사는 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통장을 모두 해지하고 안의 돈을 한 데 모았다. “자. 학교 급식비. 그리고 이거는 우리가 주는 감사상금인 20만케시라네.” “고맙습니다~” 카즈마는 씩 웃으며 급식비와 감사상금 모두를 받았다. 하지만 범인은 경찰과 같이 가면서 카즈마를 보고 이를 갈았다. 전근을 갔고 학교를 옮긴 건 바깥으로의 행동이다. 암흑의 길로 빠진 남자는 조직폭력배로서의 활동도 겸하고 있었다. 절대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잡힌 것이다. ‘꼬맹이…… 가만두지 않겠어.’ 학교에서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조직폭력배로서의 이름도 바닥에 떨어졌다. 걸리지만 않았다면 승승장구의 앞길이었는데 몽땅 망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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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을 끝낸 카즈마는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카즈마 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예. 그럼.” 카즈마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왔다. 서둘러 돌아온 학교.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야 카즈마는 한숨을 살짝 쉬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휴-.”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주시를 한 덕에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위험했다. 만약 학교를 옮긴 것까지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3월에도 미행이 느껴져 안절부절못하던 중에 특별 전형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부에 집중해서 편입에 성공, 보헤즈하이스쿨의 기숙사로 들어와서 간신히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식당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얼른 기숙사로 올라오자 윌과 리유, 레오날드 모두 침대에 누워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게 보였다. 가방을 내려두고 손을 잠시 씻은 뒤, 카즈마는 윌과 리유, 레오날드를 모두 깨웠다. “선배들~” 잠시 후. “왜 그래-! 4교시 시작했어?” “아니, 아직 안 됐어. 이제 40분이잖아.” 윌의 말에 리유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시계를 보고 대답했다. 뒤이어 레오날드 역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왜 깨운 거예요, 카즈마?” “할 얘기가 있어요. 세 분 모두 잘 들어줘요.” “뭔데.” “음?” 눈가를 비비며 아직 잠이 덜 깬 윌, 리유, 레오날드의 귀에 대고 카즈마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는다. “저, 노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고?” 동시에 되묻는 세 명의 선배들. 잠이 번쩍 깼다. 그제야 집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들을 한 명씩 돌아보며 카즈마가 상황 설명을 조금 멀리부터 해야 했다. “지난 3월 13일에, 제가 다니던 보헤즈미들스쿨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어요. 그 때 추리를 해서 용의선상을 떠올린 사람이 저에요. 검거 장면을 보고 급식비 전부를 돌려받은 것도요. 근데 그 때 그 범인인 전직 선생님이 저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어요. 괜찮겠지 했는데, 목요일부터인가 누가 절 따라오는 거예요.” “! 미행을 당했단 말이야?” 미간을 살짝 좁히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리유의 물음에 카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 주 일요일에 특별전형시험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때부터 프로그램 제작하는 것도 접고 미친 듯이 공부에 전념했죠. 미들스쿨에서 배우는 것과 다르게 하이스쿨에서 배우는 것까지요. 근데 하다 보니 암기도 잘 되고 쉽게 잘 풀려서 시험 이틀 전에는 대학 입시 문제까지 풀고 있었어요. 그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죠. 윌 선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이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편입에 성공했고, 보헤즈하이스쿨로 왔죠. 그 동안은 몰랐어요. 기숙사생활도 처음이고 하이스쿨 정규 수업을 듣는 것도 처음이고, 무엇보다 외출할 일이 없다보니 기숙사와 본관만 왕복했죠. 토요일에는 특별활동도 한 번씩 해주고요.” “응, 계속해보세요.” “그랬다가 오늘 나갈 일이 있었어요. 시험 전부터 하던 프로그램을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제작해서 간신히 어제 완성했어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프로그램을 넘겨주었는데, 학교를 나간 직후부터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더라고요. 번화가 사이로 실랑이를 벌이면서 절 쫓아오는 사내들이 있었죠. 그들은 제가 보는 것도 모르고 말싸움을 하느라 바쁘더라고요. 미행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니까요?” 카즈마의 말에 윌과 리유, 레오날드는 표정 관리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행하는 녀석들이 실랑이 하는 것은 웃긴데 미행당하는 카즈마 입장은 상당히 심각하니까. 이거… 웃어야 하는 거야, 울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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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 7천왕의 숙소. 총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천계로 왔을 때, 그들 7천왕은 라미네가 없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고, 이윽고 총사령관에 의해 그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었다. …아주 잔인한 결정으로. “!!” 충격에 빠진 7천왕의 얼굴. 특히 라미네를 친동생처럼 아꼈던, 빛의 지배자 레디아와 물의 지배자 오스카의 경악은 더 했다. 둘은 분노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려 애쓰지 않았고, 떨리는 주먹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결정을….” 부르르 떨며 오스카는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천신이면 답니까? 신이면 다에요? 신에게 사람의 마음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요? 이건 우리 모두를 배신하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털썩. 총사령관을 포함한 7천왕의 시선은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작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은 레디아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헛웃음과 뒤섞인 한탄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다고는 하지만, 천신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치실 줄은 몰랐네요. 라미네가 갖고 있는 신안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라도, 아직 21살밖에 안 된 아이를 갖고 놀다니. 천신, 한편으로는 대단하네요.” 레디아의 그 마지막 말은 비꼬고 있음이 분명했다. 가만히 서 있던 땅의 지배자 에디가 물었다. “카인, 천신을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후-.” 하지만 불의 지배자 카인은 담배만 묵묵히 필뿐이었다. 그 담배가 모두 타들어갔을 때 쯤 그가 입을 연다. “우리는 천신의 말을 따르는 게 전부다. 복종을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반발? 있을 수 없다.” 그의 말을 들어버린 어둠의 지배자 히어로는 눈을 잠시 감고 결정을 내렸다. 퍼억! 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어로는 굳게 쥔 주먹을 카인의 얼굴을 향해 날렸고, 카인은 묵묵히 그의 주먹을 맞고 담배와 같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 따위로 입을 놀릴 거라면 통솔자 자리 당장 때려치워! 너 같은 지도자는 필요 없어! 뭐가 어쩌고 어째? 다른 녀석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을 지껄일 줄은 몰랐어! 그래, 우린 인형이야! 지배자라는 허울만 있을 뿐인 천신의 인형! 물론 우리는 진짜 인형이 아니라, 생각을 할 줄 알고,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는 인간이야! 신이면 다야? 갖고 노는 것도 적당히 하라 그래! 총사령관, 천신에게 가서 분명히 전하세요. 라미네가 바람의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알게 되면, 난 이 어둠의 힘을 갖고 잠적할 겁니다. 힘을 숨기는 법도 알고 있겠다, 망설여지는 것도 없잖아요?” 히어로는 할 말 다 한 듯 그대로 돌아서서 숙소를 나갔다. 대낮. 빛이 존재하는 지금, 그는 잠이 가장 필요한 시기다. 쉽게 말하면 야행성이다. 물론 어둠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다가 호출 받아서 반강제로 불려와 짜증이 치밀었던 것도, 그의 험악한 분위기에 일조를 한 건지도 모른다. “총사령관, 저도 잠적할 거라고 분명히 전하세요. 히어로와 함께 실종될 겁니다.”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린 오스카 역시 히어로의 뒤를 이어 숙소를 나갔다. 그 때까지 기절한 듯 뻗어있던 카인은 슬며시 일어나 입가를 스윽 닦아 혈흔을 지웠다. “총사령관. 저도 포함해주세요. 그럼.” “저도요.” 에디에 이어 레디아도 말을 남기고 숙소를 나갔다. 혼자 남은 카인은 묵묵히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탈탈 털었다. 약간의 주름도 있어서는 안 된다. 담배 하나를 다시 입에 무는 카인을 보며 총사령관이 가면 너머로 물었다. “자네는 어찌할 텐가?” “이렇게 되면 저라도 남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모두의 의견과 같다고 전해주십시오. 가보겠습니다.” 카인은 7천왕의 통솔자답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한 뒤에 숙소를 나갔다. 그가 나가면서 문을 닫는 것을 본 총사령관은 슬쩍 웃었다. “훗.” 뒤늦게 음료수를 챙겨서 거실로 나오던 가사도우미는 총사령관이 웃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지금 이게 기분 좋으세요, 총사령관님?” “음? 아아. 뭐, 일단은 합격인 셈이죠.” “?” 여전히 알아듣지 못 해서 물음표가 머릿속을 춤추는 가사도우미에게, 총사령관은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음료를 마신 뒤 정황을 설명했다. “다들 개인적인 임무로 인하여 많이 바쁘잖아요? 활동시간도 다 다르고. 그래서 천신께서는 7천왕의 호흡이 잘 맞는 지를 알아보고 싶다고, 저를 통해 몇 가지 시험을 하게 하셨지요. 그 첫 번째가 ‘라미네가 가진 지배의 힘을 회수하겠다고 했을 때의 단합에 대해 알아보라’ 였는데, 전원 잠적하겠다는 대답을 남겼으니 첫 번째 관문은 통과라고 할 수 있죠. 내일이나 모레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할 겁니다. 아줌마, 조용히 모르는 척 해주실 수 있으시죠?” 총사령관의 물음에 가사도우미는 ‘호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왠지 두근거리는데요? 앞으로의 시험 결과가 무척 궁금하네요.” 즐기고 있다! 7천왕을 보고, 또 놀려먹는 기회가 흔치 않은 가사도우미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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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여자기숙사 101호실. 오늘도 같이 들어온 캐츠 둘은 그들끼리 이미 외출을 나간 뒤다. “…….” 책상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마리엔은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오스카를 강제로 협박하다 시피하며 받아낸 사진이다. 사진 속의 날짜는 천계의 시간으로 약 80년 전. 50년 남짓한 짧은 시간을 후배들과 지낸 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라진 공간의 지배자, 리오 로제엄. 마리엔은 지금, 그를 찾으라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사진을 보며 심각하게 고민 중인 마리엔은 열심히 자신이 본 사람들의 머리색과 얼굴형을 떠올렸다. 흑색, 금색, 청색, 적색, 보라색, 녹색 등 많은 색의 사람들을 보고 지나쳤지만, 그 중에 은색은 없었다. ‘없어. 그리고 이 학교에도 없어. 보헤즈에는 없나.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다고 해도 지금은 학교에 얽매인 몸이라서 쉬이 나갈 수도 없고. 자는 집안을 살펴보면서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고. 대륙이 너무 넓어서 멀리 갈수도 없어.’ 그렇게 막 돌아다니는 동안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 갈 뻔 한 전적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바람의 지배자의 자리를 비울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한 마디로 압축하면 진퇴양난이다. 점점 장기로 길어지는 임무 때문에 생각에 빠져 머릿속이 복잡한 그녀와는 달리, 그녀 생각 밖의 세계는 지금 상당히 시끄럽다. “그만 좀 가~~ 마리엔은 싫다잖아~~” “넌 마리엔이 아니잖아~~ 마리엔~~ 우리 마음을 받아줘~~” “마리엔~~ 선물 갖고 왔어~~ 향수야~~~” “고급 목걸이 준비 했어~~” 101호실 문 앞에선 방 안의 유미가, 방 밖에 몰려 온갖 선물을 손에 들고 마리엔에게 주기 위해 용 쓰는 남학생들을 말리는 중이다. “마리에에에에엔~” “우리 좀 봐주라~~~” “플룻 연주를 들려줘~~ 파이를 만들어줘~~” 남정네(?)들의 아우성을 기어이 들어버린 마리엔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끄러. 집중이 안 돼, 제발 좀 보내버려.” “그게 안 되고 있어~! 어떻게 하지, 마리엔?” 여자의 몸으로 예닐곱의 남학생들을 상대로 문을 잠그고 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간신히 받아친 유미의 몸이 문 때문에 흔들리던 중에, 치마 주머니에 있던 PT가 흔들리다가 마침내 방위로 훌렁 떨어졌다. 일전에 PT가 망가진 윌처럼 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내 PT!” “!” 우뚝. 방 안에서 들린 유미의 외침에 남학생들은 일시 정지로 들어갔고, 이내 “우와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고쳐내라고 할 것이 분명하기에 튄 것이다. 허나 급히 PT를 살펴본 유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멀쩡해.” 하지만 마리엔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여전히 문 앞에 붙어 서 있는 유미는 황급히 다가와서 문 앞에 서는 몇 개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앞서 겪은 바가 있는 유미는 그들이 마리엔의 선물을 들고 온 것이라 착각하고 소리를 찔렀다. “니네는 질리지도 않아? 마리엔이 싫다잖아!” 이제 보니 경호원이다. 하지만 문 너머의 목소리는 전혀 뜻밖이었다. “유미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카즈마?” 여전히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상태의 마리엔은 유미와 함께 되물으면서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고, 동시에 유미가 문을 열어 윌과 리유, 카즈마와 레오날드는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들?” “마리엔도 내려와 앉아 봐. 할 얘기가 있어.” 윌의 말에 마리엔은 사진을 잘 넣어두고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왔다. 마리엔 옆에 앉으며 유미가 물었다. “근데 너희, 검도 연습은?” “안 갈 거야.” “안 가? 안 가면 대회는?” 리유의 대답으로는 만족이 다 안 됐는지 마리엔이 재차 질문을 던진다. 윌이 씩 웃으며 잠시 샛길로 빠질 준비를 했다. “그게 말이지.”
지금으로부터 5분 전. “근데 어떻게 하지? 나와 리유는 대회 연습 때문에.” 그것은 도와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꼭 가야 해요?” “당연하지.” 레오날드의 물음에 윌과 리유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우린 검도부 부원이니까 당연하잖아? “그것 참 이상하네요.” “응?” “PT를 다시 꺼내볼래요, 두 선배?” 카즈마의 말에 윌과 리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도 PT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카즈마는 황제폐하에게서 온 문자를 찾아서 열어 직접 보여주었다. -윌 군은 5월 1일 일요일에 있을 보헤즈시 검도 대회에 필히 참가하도록 하라. -리유 군은 5월 1일 일요일에 있을 보헤즈시 검도 대회에 반드시 참가하도록 하라. 가지 않으면 기사단이 학교로 출동할 것이다. 하지만 문자를 보고도 윌과 리유는 카즈마가 뭘 말하고 있는 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게 왜?” “자세히 보세요. 참가하라고만 되어 있지, 우승까지 해야 한다는 말은 없잖아요?” “!” “!” 카즈마의 설명에 윌과 리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참가하라는 말만 있지, 우승하라는 말은 없다. 참가해서 중간에 탈락해도 뭐라 하지 않겠다는 뜻. 참가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참가만. 굳이 열 내서 훈련에 임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리유는 학생회 임원이 아니던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역시 뒤늦게 그 점을 알아차린 레오날드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확실히 그렇군요. 역시, 도난사건을 해결해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데요?” 윌과 리유는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연쇄살인사건 해결사를 옆에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뭐, 레오날드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 윌과 리유다. 어쨌든 검도 연습은 토요일에만 하기로 결정을 내린 윌과 리유, 레오날드는 카즈마를 뒤쫓는 자들에 대해 조사하기로 하고, 이를 마리엔과 유미에게 도와달라고 할 참이었다. 미인계를 이용할 예정이다. 윌과 리유, 그리고 레오날드를 통해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유미가 씩씩하게 기합을 넣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후배가 위험에 처했는데 모른 척 할 수 없지. 기꺼이 도와줄게! 뭘 하면 돼?” 설명을 모두 들은 마리엔은 또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보헤즈시를 벗어나는 건가. 이는 좀 더 리오의 후생에 대해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나도 갈게!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죄는 왜 엉뚱한 곳에 덮어씌우려고 하는 거야? 이왕 하는 거 미행하는 놈들의 일당까지 족치자고!” 족치자니…. 마리엔, 말이 너무 심하다-.
불쑥. 교문 안으로 몸을 숨기고 고개만 하나가 맨 아래에 나왔다. 그리고 층을 쌓듯 위로 하나 둘 나왔다. 고개의 수는 총 여섯, 사람의 수도 여섯이다. 하지만 맨 아래의 안경 쓴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든 듯 말을 이었다. “저기요…… 너무 누르지 말지요? 그리고 목도는 어떻게 좀 하는 게 어때요? 쿡쿡 쑤시는데?” 아직 어린 그 혼자의 무게로는 위로 올라탔다시피 한 5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맨 밑의 그의 웅얼대자 맨 위의 윌이 씨익 웃으며 내려왔다. 이로써 카즈마는 윌이 허리에 찬 목도가 쿡쿡 쑤시는 작은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어 마리엔과 유미, 레오날드와 리유도 카즈마의 등에서 내려왔고 카즈마는 그제야 허리를 펴며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훔친 카즈마는 미리 계획한 작전 대로 움직이고자 먼저 나섰고 윌과 마리엔이 같이 움직였다. 마리엔은 햇빛 가리개용으로 쓰고 나온 모자의 챙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짜증을 살짝 토해냈다.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 쪽이 불룩하다. 달라붙는 반바지를 입고 그 속에 숨겨놓아서 아직은 알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기를 든 사람은 카즈마와 윌이다. 토요일 특별활동 때 잠시 합기도를 배운 카즈마는 목도만을, 합기도와 검도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윌은 허리에는 목도를 등에는 죽도를 차고 나왔다. 카즈마를 미행하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아우, 더워~ 모자가 답답하지만 벗을 수가 없어.” “난 죽도까지 챙겨 와서 더 하다고.” 오후 1시가 넘은 시각.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시작된 여름이고 온도가 높고 햇빛이 가장 강한 만큼 한창 더울 시각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왔으니 어쩔 수는 없지만. 카즈마와 마리엔, 윌이 먼저 가고 교문 안쪽으로는 리유와 레오날드, 유미가 남았다. 사람들 사이로 카즈마를 미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1분의 거리를 두고 출발할 셈이다. 어차피 목표는 보헤즈 동문 너머의 뾰족 바위이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외길이니 보헤즈를 벗어나면 상황은 끝난다. 덤으로 길 양옆으로는 녹색의 잎사귀가 풍성해지기 시작한 숲. 높이 치솟은 나무와 그 사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꽃들과 풀들은 갈 곳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다. 교문 안에서 시간을 확인 중이던 리유가, 유미가 손에 들고 있는 조금 긴 물체를 보며 물었다. “유미, 그건 뭐야?” “피리야! 합창부에서 쓰는 거야.” “불 줄은 알아요, 유미?” “당연하지~ 윌의 목청보다는 못하지만 쓰러지게 만들 정도의 고음을 내지.” 유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물었던 리유와 레오날드 역시 죽도를 챙겨 나온 상태다. 오후 1시가 넘었지만 일요일이라는 것에 걸맞게 보헤즈시는 인파로 인해 상당히 북적대고 있었다. 이게 바로 뾰족바위를 목표로 삼은 이유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잘 보인다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이용한 외길 위에서 결판을 낼 생각인 그들인 것이다. 물론 17세 소년들이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을 때려잡을 수 있을 지는 후의 의문으로 남겨두겠다. 1분 후 리유와 유미, 그리고 레오날드도 교문을 나와 동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교문을 나온 셋은 곧장 첫 번째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이제 4시간 동안 줄기차게 걸어야 한다. 그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각자의 취향으로 골라서 PT에 담아놓은, 음악을 듣고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 듣기를 가동시킨다. 물론 시선으로는 수상한 자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열심히 살피고 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서 쉽지가 않다. 같은 시각. 먼저 출발한 카즈마와 마리엔, 그리고 윌은 열심히 뒤를 밟고 있는 사내들을 알아차렸다. 뒤통수가 따끈따끈하니 알아차리지 못 하면 바보인 셈. 특히 마리엔은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를 찾느라 시선이 더 확대된 상태다. 삐삐삑. “!” 깜짝 놀란 마리엔은 급히 오른손으로 왼손 시계를 가렸다. 순간적인 식은땀이 햇빛에 의해 피부를 뚫고 나온 땀과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삐삐삑, 다시 한 번 신호가 터지자 마리엔은 재차 긴장하며 오른쪽의 카즈마와 윌의 반응을 살폈다. 카즈마를 가운데에 두고 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오른쪽은 윌이 왼쪽은 마리엔이 선 것이다. ‘하필 이럴 때 호출 신호가 터지다니! 어쩌지? 어떻게 하지? 난…… 어쩌면 좋지?’ 7천왕의 호출을 받고 가자니 카즈마와 윌의 눈을 속일 방법이 떠오르질 않고, 7천왕의 호출을 무시하자니 그에 상응하게 될 벌이 감당이 되지를 않는다. ‘어느 쪽… 어느 쪽…….’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마리엔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돈다. 그녀는 카즈마와 윌의 눈치를 보면서 시계 한쪽 단추를 꾹꾹 눌렀다. 상황이 안 좋아서 호출에 응할 수가 없다는 신호 안에 임무 수행 중이라는 신호가 더 담겨 그들에게 갈 것이다. ‘나중에 떨어질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호출에 응하지 못 해서 죄송하네요.’ 마음으로 사죄를 한 마리엔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은색 머리카락을 찾기에 바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윌의 물음이 귀를 타고 들어왔다. “뭐 해?” “엉? …아무 것도 아니야.” 마리엔은 당황한 기색을 간신히 숨기고 대답했다. 윌은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 한 ‘척’ 대답했다. “화장실 급하면 얘기해, 두 사람 다.” “응-.” “네-.” 동시에 대답하는 카즈마와 마리엔이었다. 하지만 윌은 마리엔의 숨긴 기색을 순간적으로 눈치 챘다. 그녀의 시선이 분산되어 있음을 알고 불렀던 것이다. 놈들은 바로 뒤에서 조용히 쫓아오고 있는데, 시선이 분산되는 게 이상한 그다. ‘뭔가 찾고 있는 거라도 있나?’ 아직까지는 거기까지만 미치는 게 전부다. 한편. “뭐야, 오늘은 사람이 늘었네?” “게다가 우리를 쫓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기척은 도대체 뭐냐고~” 사내 B가 투덜대자 옆에서 같이 쫓던 A가 중얼거렸다. “놈들이 머리를 굴린 모양인데?” “음? 무슨 소리야, 너?” “카즈마 녀석 옆에 있는 저 금발 머리 있지? 모르긴 몰라도 윌.R.뷰츠라는 녀석일 걸?” “뭐라고? 세상에.” 사내 A의 말에 B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17세 소년이라고는 하지만 머리 굴리는 건 결코 17세 소년이 아닌 그다. 연쇄살인사건의 실제 해결사가 그라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하지만 돌아설 수는 없었다. 뒤에 쫓아오는 녀석들이 있는 것도 그랬지만. “으흐흐흐흐흐흐.” 음산한 웃음을 내뱉는 그들의 시선은 한 번씩 돌아보는 마리엔에게 가 있었다. 눈빛이 변했다. 음탕하게. 조직에 몸담은 지 어언 4년, 여자 구경 한 지가 언제인 지 기억도 안 나는 그들이다. “놈들 처리하면……. 좀 놀아볼까.” “그럼 그럴까. 뒤에도 여자 하나가 오고 있는데 말이야.” “좋지. 으흐흐흐흐흐.” 계속 음산하게 웃는 사내 둘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 쫘아악- 사내들의 야릇한 시선에 놀란 마리엔은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알 수 있었다. 미간을 살짝 좁힌 그녀는 주먹을 꾹 쥐며 생각에 잡혔다. ‘돌풍을 일으켜 휩쓸까? 아니야.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나중에 확실히 처리할 때가 올 테니 기다리자.’ “후-.” 생각을 정리한 마리엔은 땀을 훔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윌이 살짝 쳐다보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땀을 닦았다. “더워서.” “음.” “어후.” 카즈마까지 한숨을 쉬며 가세했다. 줄기차게 걷기를 3시간. 한참을 가던 사내들은 가는 길이 동문으로 나가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를 아는 사내 A와 B는 거의 동시에 혀를 찼다. “제길. 끝을 보겠다는 건가.” “뭐, 상관없지 않나?” “그렇군.” 사내 B의 말에 A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 머리 소년이 등과 허리에 각각 목도와 죽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니 거의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다. 카즈마 네르크를 잡아오라는. 그들로서는 그 명을 이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야 한다. 카즈마 네르크의 발이 설 때까지. 그렇다 해도 조금씩 올라가는 초조함은 어떻게 하지를 못 했다. 카즈마와 마리엔과 윌의 인도(앞으로 이끄는 것)는 동문으로 향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질수록 뒤에서 쫓아오는 발길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되는 사내들이었다. 이거 완전… 샌드위치로구먼. 그리고 총 4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동문 관문소 앞에 선 카즈마와 마리엔, 윌은 학생증을 내밀며 뾰족바위 관람 허가를 받았다. 물론 외길 양옆의 숲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받은 뒤에야 동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카즈마를 미행하던 사내 A와 B, 그리고 리유 일행도 같은 방법으로 동문을 통과했다. 먼저 갔던 윌은 동문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왔다고 여겨질 때쯤 리유에게 PT 문자로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받은 리유 역시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에 선 사내 A와 B, 그리고 앞뒤에 있는 윌과 리유와의 거리, 똑같이 1엔티(=1m)가 되었다고 여긴 윌과 리유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각자의 죽도를 뽑아 기합을 내면서 가운데에 선 사내 A와 B에게 달려들었다. 맑고 청아한 리유의 기합과 높고 굵은 윌의 기합은 확실히 달랐다. “하아아아앗!” “이야아아아압!” 사내 둘과 닿을 때까지 한 발자국이 남았을 때 공중으로 부웅 뜨는 리유와 윌은 그 위치에서 뽑아든 죽도를 내리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서면서 옆구리를 죽도로 크게 쳤다. 사내들은 놀랄 겨를도 없이 정수리로 죽도를 맞았고, 반쯤 잃어가는 의식과 함께 옆구리를 강타하는 죽도의 느낌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습게도 조직폭력배라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둘은 겨우 17세 청년 둘이 휘두른 죽도에 머리와 옆구리를 얻어맞고 뻗은 것이다. 기절한 사내 A와 B가 엎어지자 리유와 윌은 각자의 죽도를 허리와 등에 찼고, 레오날드가 등의 가방에 넣어온 밧줄로 마무리를 했다. 남학생 셋은 각자의 손바닥을 부딪치며 하이파이브를 해댔다. “아싸~ 해냈다~” 작전 종료. 시계는 어느새 5시를 넘어섰다. 사내 둘을 외길 위에 올려놓은 일행은 돌아서서 동문을 나왔다. 들어간 절차의 반대 절차를 밟은 윌 일행 여섯은 동문을 넘어 보헤즈시로 들어왔다. “선배들, 저녁 먹고 들어가는 게 어때요?” “음.” 카즈마의 제안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학교까지 용 써서 간다고 해도 도착하면 9시가 넘는다. 자전거를 빌리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반납을 하려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카즈마의 마차를 타고 온 게 아닌 만큼 마차가 오는데도 시간이 조금은 걸릴 터. …마차? 같은 생각을 한 듯 카즈마를 뺀 모두는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도보에서 자전거로, 다시 마차로 옮겨간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다섯의 시선이 반짝 반짝 빛을 내는 게 장난이 아니다. 카즈마는 입꼬리를 올려 간신히 웃으면서 물었다. “선배들, 설마…….” “응!” 다섯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즈마를 꼬시는 첫 타는 윌이 날렸다. “카즈마 후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침에 엄청나게 굴렀잖아? 그리고 엄청나게 걸었잖아?” “식사 따위 먹고 가든 가서 먹든 상관은 없으니, 마차만 좀 불러주면 안 될까?” “우리 여섯 명은 충분히 타잖아요?” 리유에 이어 레오날드까지 합세를 했다. 마리엔과 유미 역시 빠지지 않는다. “이 누나들도 힘들잖아.” “가는 길은 편하게 가고 싶은데.” 넷 타 마리엔과 다섯 타 유미의 말에 카즈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를게요. 샌드위치 안 먹을래요? 답례를 좀 해야 하는데 말이죠. 배도 고프고.” “아니야. 샌드위치는 내가 살 테니까 카즈마는 마차를 부탁해.” 유미의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서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엔은 아무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문을 통해 돌아오기 직전에 사내들 주변에 준비해놓은 절차가 이 손가락을 튕기는 작은 행동 하나에 움직이는 것이다. 동문 안 뾰족바위 가는 길.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맑은 하늘과 조용한 대기. 허나 그런 외길 위에서 갑작스레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중심에 있는 건 사내 A와 B. 날카로움을 가진 돌풍을 사내 둘을 도륙한 뒤 멈췄다. 바람의 지배자 라미네 카운의 돌풍 발동이었다. ‘흠. 플롯을 쓸 일은 없었네.’ 마리엔은 반바지의 오른쪽으로 조금 불룩한 곳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건 취미로 연주하는 플롯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일행. 윌이 대표로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그 사이 카즈마는 PT를 꺼내 집사를 통해 마차를 불렀다. 집사의 대답에 카즈마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한 40분 걸린대요.” 그 정도 걸릴 거라 생각한 윌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샌드위치 먹고 다시 한 번 뾰족바위로 가보지 않을래요? 그 사람들 아무리 미행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두고 온 건 신경이 좀 쓰이네요.” 레오날드의 제안이었다. 마리엔은 어깨를 들썩이며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스스로 지배자라고 자백하는 꼴이 될 테니까. 윌이 가려고 할까? “음, 그럼 그러자.” 윌의 끄덕임이었다. 리유와 유미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그들 역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마리엔은 자리에 가시가 박힌 것만 같았다. 이내 나오는 샌드위치를 하나 둘 집어먹는데 몇몇 학생들이 웬 종이와 펜을 갖고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저기-.” “?” 일행은 샌드위치 먹으며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봤다. 학생들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리유를 향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리유 오빠 맞죠? 사인해주세요!” 그리 좋지 못 한 일을 계기로 사인을 만들었던 리유다. 그런 그가 지금 와서 사인을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는 받은 수대로 일일이 사인을 해줬고 여학생들은 좋아라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자리를 떴다. 작게 수군거린다고는 하는데 왜 다 들리는 것일까. “하프엘프라서 집에서 갇혀 살았다고 하더니 진짜였나 봐.” “근데 왜? 혼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연쇄살인사건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실제 해결사는 윌 뷰츠라는 소문도 있어. 시상식 때 못 가서 대신 받아왔다는 얘기도 있더라.” 정녕 수군거린 게 맞단 말인가. 윌 일행은 그 대화를 들으며 한참 동안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만 있었다. 정적이 지나가고 샌드위치를 먹던 중에 리유가 바로 옆의 친구를 부른다. “윌.” “음?” 친구가 돌아보자 리유는 입 안의 샌드위치를 삼키고 약한 차가움이 깃든 보라색 눈동자로 그를 보며 물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후후후.” 윌은 작게 웃기만 했다. 결국 리유는 당한 것이다. 한창 샌드위치를 먹던 유미가 물었다. “무슨 얘기야, 지금?” 대표로 유미가 물었고 그녀를 포함한 마리엔과 카즈마, 레오날드 모두가 윌과 리유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의 전말은 3월 중순에서 말로 넘어가는 시점의 연쇄살인사건 시상식 때다. 이 때 윌은 본가에 일어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학교를 비우고 대타로 리유를 내보낸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혼혈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나오질 않고, 사람들을 멀리하던 그의 버릇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함” 이라는 일종의 계략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가 시상식 감사패 아래에 깔아둔 계략은 이후 현실이 되어 나타났고, 리유는 학교에서도 중간 중간 연쇄살인사건 해결해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카즈마는 여지없이 웃었다. “오~! 역시 윌 선배에요. 잔머리가 의외로 잘 굴러가는데요? 쿠쿡.” “카즈마도 참. 웃지 말아요. 리유, 화 안 나요?” “음, 화 안 나.” 레오날드의 물음에 리유는 살짝 웃기까지 했다. 실제로 시상식을 계기로 리유는 한 발짝 더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걸 알아차렸기에 오히려 윌에게 감사한 그다. “윌, 고마워.” “별로.” 윌은 싱긋 웃으며 샌드위치만 먹었다. 반면 마리엔은 주변을 살피며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용을 썼다. 한두 명 있기는 하지만 가진 단서와는 달랐다. 이 세계의 시간으로 17년 전에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가 윌이나 리유 또래이어야 한다. 하지만 중간 중간 봤던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30대나 40대 어른들이었고 가장 어린 사람이 20대 중, 후반 사람들이었다. 방금 다녀간 여학생 중의 한 명이 은색 머리카락이지만 올해 나이 14세, 윌보다 3살이나 어리다. ‘어렵다, 정말.’ 마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20분 동안 서둘러 샌드위치를 모두 먹은 윌 일행은 다시 뾰족바위로 가는 동문을 넘었다. “어?” 사내 A와 B를 기절시켜 밧줄로 묶은 지점에 왔지만 사내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들이 입은 옷과 밧줄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여러 개의 조각뿐이었다. 윌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조각들을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카즈마!” 카즈마는 윌이 건넨 조각들을 몇 개 받으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숲 안에 커다란 괴수가 산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럼 설마 그 괴수에게 먹혔다는?” 레오날드가 받아쳤다. 하지만 리유와 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만약 그렇다면 이런 조각이 나온다는 게 이해가 안 가. 카즈마가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괴수의 흔적은 없어.” “나도 리유의 생각에 동의해. 괴수의 짓이 아니야.” 동의한 윌은 조각을 들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마리엔은 조바심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가자. 괴수가 나올 지도 모르잖아. 마부 아저씨도 기다리실 거고.” 으르렁- 바로 그 때 어느 울음소리가 가장 가까운 왼쪽 숲에서 들려왔다. 여섯의 남녀 학생들은 일제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빙글 돌아 동문을 향해 일제히 뛰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동문을 넘은 그들은 마부도 잊고 한참을 뛰었다. 그들의 머리색을 통해 카즈마를 알아본 마부는 급히 말을 모아 일행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일행의 달리기를 추월하여 거리를 두고 그들을 멈추게 하는데 도왔다. 끼이이이이익-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갑자기 당겨졌을 때나 날 법 한 소리가 달리던 여섯 남녀의 발밑에서 동시에 났다. 윌 일행은 앞을 막고 서는 마차 때문에 급정거를 해야 했다. 6명이 길게 한 줄처럼 서서 뛴 덕에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상자도 없지만 아주 다친 건 아니었다. 여섯 모두 발바닥에 무게중심을 치중하고 멈췄기에 발바닥에서는 뜨끈뜨끈 열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튀는 방식’ 으로 멈춘 건 윌뿐이다. 몸을 숙여 손바닥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섰기에 발바닥과 손바닥에 옅은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1분가량 달린 여섯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차에서 내리는 마부를 바라보았다. 카즈마가 대표로 외쳤다. “집사!” “모두 타시지요. 학교로 돌아가셔서 쉬시기 바랍니다.” 마부의 말에 일행은 이마의 땀을 손으로 훔치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안에 탄 사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난간 위로 천을 걷어 올려진 상태다. 이윽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일행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와~ 시원하다!” 카즈마와 레오날드, 마리엔과 유미는 머릿결에 묻은 땀을 털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햇빛가리개로 쓰고 나온 모자는 일행의 손에 들린 후다. “좀 더 빨리 달려줄 수는 없어요?” 모처럼 마리엔이 적극적이다. 안으로 쌓인 고민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기분에 젖고 싶은 그녀다. 하지만 마부는 듣지 못 한 듯 대답이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말들 역시 달리면서도 땀을 바람에 식힌다. “욱.” 갑작스러운 상황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레오날드였다. 그는 다시금 속에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웁.” “레오날드!” 유미와 마리엔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하지만 레오날드는 괴로운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펴지를 못 했다. 멀미였다. 카즈마가 급히 레오날드의 등을 두드려주기 위해 주먹 쥔 손을 들었다. 헌데 그 손을 저지하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카즈마는 즉각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마리엔 선배.” “두드리지 마. 지금은 두드리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야. 40분이나 갈 건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 카즈마는 머리를 잠시 굴렸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작은 비닐 봉투가 떠올랐다. 가방을 내려 그 안을 뒤적인 카즈마는 이내 봉투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그것을 레오날드에게 건넸다. 하지만 레오날드는 봉투를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참아볼 기색이다. “…….” 하지만 바람을 맞아도, 그 소동이 벌어지는데도 미동이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윌과 리유다. 그들은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도 팔짱을 끼고 조금씩 들썩이기만 할 뿐 큰 움직임은 없었다. 바람에 조금씩 균형을 잃어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카즈마가 먼저 운을 뗐다. “선배들, 무슨 생각을 해요?” “음, 아까의 상황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뭐?” 리유의 말에 되묻는 마리엔은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애써 참아야했다. 이미 뭔가 있음을 알아차린 리유와 윌이었다.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할 때부터 이미 두 사람의 추리력은 굉장할 거라고 여겼지만. ‘설마?’ 마리엔의 머릿속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이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닐까- 하는. 뭐, 기억을 잃어버렸으니 차라리 후계자를 찾는 게 빠를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이미 갖고 있는 마리엔, 아니, 7천왕 중의 한 명인 바람의 지배자, 라미네 카운이었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보헤즈하이스쿨. 레오날드는 곧장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고, 남은 일행은 마부에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넸다. 마부는 답례를 하면서 마차를 몰고 네르크 본가로 향했다. 기숙사로 온 마리엔은 유미가 샤워를 하는 사이 시계로 7천왕 중 한 명과의 교신을 시도했다. “누군가.” “접니다, 히어로. 라미네입니다.” “음. 신호는 받았네. 임무 수행은 어떤가?” 상대 7천왕 중 한 명인 히어로 팬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공간의 지배자 리오 로제엄을 찾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어른이거나 아직 어른 미들스쿨의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