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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사도행전 16장 11-15절
<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 >
해외여행이나 선교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암담한 상황을 만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막막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길을 잘못 들어서거나 잘못된 차를 타서 죽도록 고생합니다. 때로는 강가를 따라 힘들게 걸어야 하고, 때로는 끔찍한 화장실에 들어가 볼 일을 봐야 하고, 때로는 먹기 힘든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때로는 극심한 추위에 떨면서 “내가 왜 여기를 왔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쩌다 한국인 한 사람만 만나면 모든 고통과 고독과 불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처럼 느껴집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동족이나 동행자를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큰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있어서 그런 행복한 만남의 대상이 되십시오.
몇 년 전에 구정 때 대만의 화련이란 곳을 갔습니다. 3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명절 교통전쟁으로 아침에 출발에서 오후 4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거의 구경도 못하고 곧 타이베이로 돌아오는데 너무 길이 막혀서 지도상의 한 도로로 무작정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바로 엄청난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그곳이 바로 대만의 최고 관광지인 타이루꺼라는 관광지였습니다.
약 30분 정도 웅장한 절경에 탄성을 내면서 그 지역을 통과했지만 곧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면서 점차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길을 잘 선택했다고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잘못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 도로는 3천 미터 이상의 도로가 죽 펼쳐져서 아시아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고 험난한 도로로 대만 사람들이 낮에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 ‘중부횡관공로’라는 길이였습니다.
그 도로는 양의 창자처럼 작은 길이 꼬불꼬불 펼쳐졌다고 해서 ‘양장소로’란 명칭이 붙을 정도로 꼬불꼬불했습니다. 지도상으로 볼 때 아무리 많이 걸려도 3-4시간이면 충분히 갈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워낙 길이 험해서 낮에도 시속 약 20킬로미터로 달려서 대개 8-10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 길을 지도에 길이 있는 것만 보고 밤에 들어섰으니 간이 너무 부어서 배 밖으로 나올만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빨리 숙소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려고 엄청나게 자동차를 밟았습니다. 처음에는 끊임없이 자동차가 올라갔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바로 옆의 천 길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뵈는 게 없으니까 엄청나게 속도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도상 1시간쯤 달리면 보여야 할 작은 도시가 2시간 가까이 달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을 짐작하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마침내 저녁 9시가 넘어 산골짜기의 한 작은 소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주유소를 찾았지만 열린 주유소가 없었습니다. 점점 초조해져서 닫지 않은 주유소를 찾으려고 자동차를 더 무섭게 밟았습니다. 그렇게 맹렬히 달려가는데 산지 외딴 곳에서 농부가 사과를 파는 곳을 밤늦게 발견했습니다. 노숙하는 한이 있어도 사과를 먹고 가자고 생각하고 차를 세웠습니다. 사과가 꿀맛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과 같았습니다.
곧 다시 자동차를 타고 무섭게 달렸습니다. 마침내 밤 11시 30분에 일란이란 지역에서 열린 주유소를 발견해 기름을 넣었습니다. 낮에 10시간 걸리는 거리를 밤에 5시간 만에 통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의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고지의 소도시에서 길을 물을 때 만났던 친절한 고지 처녀들, 속이 탔을 때 먹었던 꿀맛 사과, 그리고 일란에서 서툰 영어로 주유소를 안내해주었던 친절한 청년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살면서 힘들고 절박한 순간에 가지는 잠시의 좋은 만남과 휴식은 오랜 기억을 남깁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서 고독이 사라지고, 큰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고 일어설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만남의 대상이 되십시오. 그래서 지치고 고독한 사람이 가는 길에서 기쁨과 위안과 휴식을 줄 수 있는 거룩한 휴식처와 통로가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누군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일입니다.
<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 >
본문에는 바울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한 여인이 나옵니다. 바로 루디아입니다. 그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마음이 형통해야 합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소아시아(터키)의 끝 부분인 무시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선교 전략을 짜고 소아시아 북동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이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행 16:7). 할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유럽의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중에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대로 곧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그 결정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결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 유럽 대륙 선교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살다 보면 계획한 길이 막힐 때가 있지만 신기하게도 한 쪽 길이 막히면 꼭 다른 쪽 길이 열립니다. 영어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Men's disappointment is often God's appointment(사람의 실망은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사람의 길이 막히면 그때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 바울을 유럽으로 보내셨습니까? 아시아 지역은 종교적 영성이 강하고, 유럽 지역은 철학적 이성이 강한 곳입니다. 아무리 종교적 영성의 콘텐츠가 좋아도 철학적 이성의 시스템이 없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성의 내용은 변질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요체인 ‘신앙’이라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보존하는 ‘신학’이라는 틀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인도와 티벳과 중국을 거치면서 그 원래의 내용이 토착신앙과 혼합되어 많이 변했습니다. 그처럼 기독교가 한국까지 전파될 때 유럽과 서구 대륙을 거쳐 전파되면 ‘신학’이란 틀을 입고 원래의 복음이 그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많은데, 인도와 중국이라는 거대한 종교의 바다를 거쳐 전파되면 복음이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두니아로 가려는 사도 바울의 길을 막고 복음을 유럽으로 넘기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길이 막힐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사가 형통한 것’보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마음이 형통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 사람이 아니라 때로 만사가 불통이라도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허용하셨다고 믿고 넉넉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형통한 마음을 가지면 큰 실패조차 더 큰 성공을 불러오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2, 주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하고 며칠 후에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회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민 가면 먼저 교회부터 세웁니다. 그처럼 유대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남자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으면 대개 강가나 바닷가의 기도처에 모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회당 대신에 기도처가 있는가 해서 강가로 나가보았습니다.
그때 강가에서 몇 명의 여자가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여자가 그녀가 바로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였던 루디아였습니다. 그날 복음을 전하는 플러스(+) 극과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이너스(-) 극이 만나 유럽에 엄청난 영적인 불꽃이 점화되었습니다.
루디아란 이름은 오늘날로 말하면 ‘부산댁, 목포댁’이란 별칭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출신지인 두아디라가 속한 지역이 바로 리디아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루디아’라고 불렀는데, 아마 본명은 유오디아나 순두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빌 4:2). 어떤 학자는 바울이 빌립보서 4장 3절에서 언급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한 표현을 두고 루디아가 나중에 바울과 결혼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당시 두아디라 지역은 직조와 염료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생산한 자주 옷감을 유럽 지역에 대는 총판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색 옷은 왕족이나 귀족만 입을 수 있는 비싼 옷이었기에 자주 장사를 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루디아는 남편이 없는 생활력이 강한 여성재력가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루디아가 유럽 최초의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려고 바울이 기도처를 찾아 강가로 나갔고, 루디아도 강가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구별하신 날을 지키려는 열심들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만남과 루디아의 축복은 우연이 아니었고, 안식일을 지키려는 열심이 빚어낸 필연이었습니다. 그처럼 주일을 잘 지키고 힘들 때도 예배 시간까지 철저히 지킬 때 하나님은 그의 축복도 힘써 지켜주실 것입니다.
3.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강가의 기도처를 찾았을 때 아마 루디아 일행도 그곳을 기도처로 삼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런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목자 없이 지내는 저희들의 형편을 아시지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좋은 목자를 보내주소서!”
하나님이 그 기도 모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안타깝게 보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베풀어주셔서 바울에게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시고, 바울 일행이 루디아 일행을 찾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기도는 사람의 진로를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때 바울은 배를 타고 빌립보로 오면서 계속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환상에서 보인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다가 안식일에 강가의 기도처를 찾아 루디아를 본 순간, 루디아가 비록 남자는 아니었지만 여장부와 같은 루디아를 보고 바로 “환상에서 본 사람이 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직감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운 만남입니까? 그 만남도 결국 기도의 열매입니다.
루디아는 돈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예배와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안식일마다 강변 기도모임을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부자였지만 기도하는 부자였습니다. 그처럼 어떤 경우에도 기도의 줄을 놓지 마십시오. 기도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겨준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부요한 자는 루디아처럼 사업과 인생 전체에서도 부요한 자가 될 것입니다.
4.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루디아 일행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특별히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가 마음을 열고 바울의 말을 청종했습니다. “청종했다”는 말은 “말씀을 들은 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루디아는 주저하지 않고 곧 바로 바울을 집으로 초청해서 모든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15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입니까? 사람을 성공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도 우유부단입니다. 결단할 줄 모르면 성공할 수도 없고 신앙이 자랄 수도 없습니다. 선한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선한 결단을 자꾸 미루면 밀리는 인생이 되고, 선한 결단을 빨리 내리면 앞서는 인생이 됩니다. 그처럼 말씀을 듣고 감동이 있을 때 바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5. 자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루디아는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의 힘든 형편을 알고 자신의 집에 그들을 모십니다. 모실 때도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강하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해서 선교사의 체면을 세워줍니다. 그리고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어놓아서 그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고(행 16:40),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떠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바울의 선교 사역에 최대한 후원을 했습니다.
사람이 선교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게다가 선교를 많이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만나면서 자기가 큰 재산을 모으고 큰 집에 살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내게 이런 축복을 주셨구나!” 그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축복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이제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헌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를 통해서 어디선가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소원하십시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헌신하는 한 사람의 힘은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큰 것’입니다. 진심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면 누구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존재합니까? 무엇보다 축복의 통로가 되려고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도 훌륭하지만 바울을 뒤에서 도운 루디아도 훌륭합니다. 루디아는 기도와 물질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많이 후원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뜨겁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자주 장사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영원히 잊지 못할 선교의 평생 동역자였습니다.
그때 루디아는 바울의 뒤에서 조용히 후원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저도 전방 선교사가 되어야 하지만 그 대신에 저는 열심히 저의 이 사업체를 통해서 뒤에서 선교를 돕는 후방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이 사업체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사업체가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귀한 통로가 되게 하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결국 루디아를 통해서 유럽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많은 것이 변합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에 유럽으로 타고 간 배에는 유럽 문명이 실려 있었다고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축복의 통로가 되면 나라와 민족이 바뀌고, 한 대륙이 바뀌는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강가의 기도처에서 만난 여인 한 명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럽에 아무 기반도 없고 배경도 없었던 사도 바울에게 루디아의 헌신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때 사도 바울은 루디아를 만나고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루디아를 동역자로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루디아 같은 은밀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루디아를 찾습니다 >
1991년, 제가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출신 목회자로 귀국할 때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적극 반대했습니다. “왜 상당히 복음화 된 한국으로 가려느냐? 아무런 배경도 없이 한국에서 어떻게 목회하려고 하느냐?” 아주 현실적이고 당연한 충고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 배경도 없는 모국으로 들어갑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 선교연맹’을 잘 모릅니다. 그처럼 배경은 없지만 유럽으로 건너간 사도 바울에게 루디아를 예비하신 것처럼 저도 루디아를 만나게 하소서!”
결국 저는 살 집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귀국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며칠 만에 루디아를 만나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외롭고 서러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장로교로 교단을 옮기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몇 명 안 되는 우리 기독교 선교연맹 출신 목사들은 대부분 장로교로 이적했습니다. 저 자신이 청년 때 장로교에 있었고 장로교 스타일의 목회를 하니까 장로교로 옮기는 것은 거의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미국에 가서 신비한 하나님의 인도로 기독교 선교연맹 교단 소속의 얼라이언스 신학교로 가게 된 상황을 기억했습니다. 결국 한국 목회가 힘들어도 그냥 있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도 많았고, 물질 문제로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하나님이 루디아를 예비해주심으로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런 루디아가 없었다면 저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전파와 선교를 위해 자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후원할 이 시대의 루디아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 하는 일에 성공하십시오. 선교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성공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공으로 선교를 위해 사용하고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꿈꾸십시오. 물론 성공한 사람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관심이 있으면 어느 누구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드릴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드릴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찾아보면 드릴 것이 의외로 많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우리의 기도가 없으면 그 힘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놀기만 해도 몇 주 이상 지낼 수 없는 오지에 가서 매일 살아야 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루디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틀 전, 저희 선교회가 속한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본부에서 임병철 선교사님의 협력자로 몽골로 파송한 리사 리버다(Lisa Liberda)란 백인 여자 선교사님이 발목 골절로 급히 한국으로 수송되어 왔습니다. 선교사님은 8살, 7살, 5살, 2살의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3일 전 오전에 선교사 사역을 마친 후 꼬마들을 찾으러 유치원에 갔다가 넘어져서 발목의 뼈 3개가 한꺼번에 골절된 것입니다.
너무 발목 부상이 심해서 몽골에서는 치료하기 힘들다고 해서 한국으로 급히 수송해왔습니다. 송명희 선교사님과 왔는데 비행기에서 너무 고통이 심해서 내내 울면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세브란스의 외국인 진료소에 예약을 했는데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보험도 없는 상황에서 치료비가 약 2만 불 가까이 들 것 같다고 해서 다시 급히 분당의 나우병원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래도 세브란스의 절반 정도의 비용은 들 것 같습니다.
이제 부은 것이 가라앉으면 이번 수요일에 접합수술을 합니다. 수술이 잘 되고 병원비 문제도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우리 C&MA 선교사들은 대부분 최소한의 비용으로 선교를 합니다. 재정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와 수술비를 갑자기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때에 루디아처럼 헌신해줄 분이 필요합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이틀 전에 나우병원 작은 병실에서 저와 리사 선교사님, 송명희 선교사님 3명이 간절히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셋이 찬송가 ‘All the way my Savior leads me‘을 목 놓아 부르고, 이사야 41장 9-16절 말씀을 읽고 간단히 말씀을 전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영어로 인도하는 예배였지만 성령님이 예배의 전 과정을 도와주셨습니다. 눈물과 암울함이 사라지고 3명의 심령에 기쁨과 소망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번 선교사님을 보면서 제가 옛날 외국생활을 할 때 막막한 상황에 처할 때가 생각났습니다. 왜 선교사님이 비행기에서 내내 울면서 왔을까요? 몸의 고통도 있었겠지만 마음도 힘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몽골에 두고 온 아이들 4명은 매일 울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게다가 미국도 아니고 한국이고, 한국 보험도 없는 상황이니까 얼마나 외롭고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이때 선교사님에게 드리는 우리의 정성은 선교사님이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영적 연료가 될 것입니다.
리버다 선교사님은 1988년에 저와 얼라이언스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녔습니다. 오지에서 선교하다가 큰 부상을 당해 한국의 분당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곳에 자기 동창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외국에 가서 절망적인 환경에 처할 때 그곳 사정을 아는 한국인을 우연히 만났을 때 느끼는 기쁨과 안도감과 위로가 선교사님의 마음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선교사님이 한국으로 올 때 너무 급하게 와서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읽을 영어책을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급히 한국어로 번역하려고 했던 우리 C&MA 출신의 세계적인 영성설교가인 토저(Tozer) 목사님의 책 몇 권을 가져다드렸습니다. 그 책은 또한 송명희 선교사님이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 저에게 번역해 출판하라고 보내준 책입니다. 신기하게 그 책도 이때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책인 줄 믿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사람 하나도 그냥 있게 하시지 않고 적재적소에 있게 하셔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고, 또한 작은 책 한 권도 적재적소에 있게 하셔서 축복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가 오묘합니까? 그처럼 이 세상의 어떤 만남도 우연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인터넷 상의 만남도 우연이 아닌 줄 믿습니다. 그 만남을 하나님이 주신 만남으로 알고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감사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멋진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누군가의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줄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줄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줄 수는 있습니다. 요새 ‘인터넷(internet)’이 발달했지만 성도에게는 ‘인터세션(intercession,중보기도)’가 더 발달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우리도 루디아처럼 멋진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시대의 루디아를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를 내어드림으로 루디아와 같은 축복의 통로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