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마을에 울산시장이 나타났다. 지난 11월 20일 오후, 온양읍 내고산마을 입구에 울산광역시장 명의의 <조선시대 통신사 이종실> 공적비 제막식에 참석하러 오신 것이다. 이 공적비의 주인공인 이종실(李宗實)은 충숙공 이예(李藝, 1373-1445)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대일 통신사로 활약했다. 추정컨대 아버지의 40여회 사행 길 중 다수에 걸쳐 동행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종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1459년(세조5) 8월 23일에 통신부사로 임명되어 정사 송처검과 함께 국서를 받들고 길을 떠났다. 동년 10월 8일에 부산을 출항하여 대마도 인근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조난당했다. 일행 100여 명 중 단 한 명만 생존하고 모두 희생당했다. 조정은 예관을 보내 희생자들에게 초혼장을 치러주었다. 일본국왕이 보낸 국서에서 말하기를, “천룡선사에 명하여 수륙대재회를 베풀어 정사와 부사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조선 초 대일 외교사의 중심에 이예가 있다. 왜구들의 준동이 계속되자 기해동정(1419)을 통해 왜구들의 소굴이던 대마도를 진압했고, 계해약조(1443)를 통해 선린정책을 폈다. 1459년의 불운한 조난사는 조정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150여 년간이나 조선통신사의 뱃길이 끊어졌다. 조선 초에 통신사 파견이 10차례나 있었고, 이런 조난사가 있었음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러함에도 이를 간과하고 임란 이후 12차례의 통신사 파견만 부각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통신사 이종실은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초혼장을 치렀던 묘실은 왜란과 호란 등을 거치면서 실묘하고, ‘수사등’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었다. 다만 <학성지>나 <영남읍지>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3품 수군절도사였다’고 기록하였을 뿐이다. 길고 긴 세월이 지나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24(갑자)년에 온양 내고산 수사등 근처에서 치성을 드려가며 탐색을 하던 후손들이 공의 지석을 발견한 것이다.
선대 어른들은 서둘러 현창 사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설단 터와 이를 수호할 재실을 마련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마침내 1925(을축)년 시월 보름날에 설단 고유제를 올리니 온 집안사람들이 산지사방에서 몰려들어 참례하였다. 필자는 5년 전 한식날에 제례를 드리러 갔다가 고유제를 지낼 당시에 작성했던 자료 일부를 재실에서 열람하게 되었다. 시도기(時到記)와 재성록(齋誠錄)에서 종고조부와 조부를 비롯한 눈에 익은 휘를 대하니 무척 반가웠다.
다시 세월이 흘러 2009년 10월 8일에 교토 천룡사에서 위령제가 열렸다. 550년 전인 1459년 10월 8일에 조난당했던 조선통신사 일행들의 희생을 추념하는 행사였다. 일본 임제종 본산인 천룡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통 사찰로서, 조난 당시 바다와 육지를 떠도는 고혼들을 위무했던 장소여서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이종실 공이 필자의 19대조이시니 성손 50여 분과 한일 관계사학자 등 60여 분이 함께했는데, 참례 시간 내내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외교는 상호 선린(善隣)이 기본 바탕이다. 조선조 태종은 교린이신(交隣以信)을 강조했고, 세종은 교린이성(交隣以誠)을 강조하니 양 선조님은 이에 신의와 성심으로 진력하셨을 것이다. 울산시장 이름으로 선조님을 현창하게 되면서 <조선 통신사 이종실 선양회>가 발족되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부자(父子) 통신사이시던 조상님이 이제는 울산 시민, 나아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함께하면 좋겠다.
이를 계기로 공의 재실인 ‘고산재’도 거듭날 것이다. 회당 장석영이 찬한 기문과 문암 손후익이 찬한 상량문을 편액으로 볼 수 있게 준비 중이다. 재명(齋名) 또한 기문에 나타난 표현처럼 ‘고산정사(高山精舍)’로 바꾼다. 아울러 백년에 가까운 이 재실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울산광역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다면 통신사 이종실 공의 영혼도 기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