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남선 (崔南善 ; 1890.4.26~1957.10.10) |
사학자, 문인으로서 친일파이다. 본관은 동주(東州:鐵原)이며 호는 육당(六堂)이다. 그리고 자는 공륙(公六)이며 아명은 창흥(昌興)이고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헌규(獻圭)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3살 연상의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쿄[東京]부립제일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 총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이며 후에 이 잡지가 창간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이때부터 친일 행각을 자행하였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즉, 그가 문학 방면에서 보여준 공적은 이광수와 더불어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1910년대 계몽주의 문학가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된다. 문학세계는 다음과 같이 대략 4가지로 나뉜다. 첫째, 《소년》·《청춘》을 통해 서양의 고전이나 시를 번역·번안하여 변혁기에 있던 한국 근대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했다. 특히 서양의 산문시 및 일본의 신체시와 창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식을 선보였는데, 《소년》에 발표한 《구작3편 (舊作三篇)〉(1909. 4)·《꼿두고》(1909. 5) 등의 신체시와 《가을 뜻》(1908. 11)·《소년대한》(1908. 12) 등의 창가, 《흑구자(黑軀子)의 노래》(1908. 11)·《맑은 물》(1909. 6) 등의 가사 및 시조 외에도,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조선유람가》 등의 장편 창가들를 창작·보급하는 데 힘썼다. 자신의 계몽주의 문학관을 드러낸 다양한 시가문학들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둘째, 외국문학의 수용과 이를 통한 근대 시문학의 활로를 모색하는 한편,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속》 등의 논문을 발표해 시조의 본질을 밝혔고, 고시조를 정리한 《시조유취》(1928)를 펴내 시조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힘썼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하여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시조집인 《백팔번뇌(百八煩惱)》(1926)를 펴냈다. 그의 시조 문학의 이론화 작업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된 계급주의 문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문학을 기초로 삼았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이병기·이은상 등과 함께 현대 시조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셋째, 수필을 통해 역사 연구로 확립한 '조선정신' 또는 '조선주의'라는 민족주의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25년 전국문화기행을 떠나 기행문인 《심춘순례》를 연재했고, 유물탐사반으로 백두산에 오른 감회를 쓴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는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백두산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1928년 금강산을 유람한 후에 《금강예찬》을 발표했고, 그밖에 《반순성기 (半巡城記)》 등의 기행수필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조선정신을 드러낸 모습이라 설명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수필문학 분야에서도 남다른 공적을 남겼다. 넷째, 한문투나 문어체를 우리말투로 바꾸는 문체변혁을 시도했다. 즉 《소년》 등의 잡지를 통해 새로운 문장을 소개하고 구어체 중심의 근대적인 신문장 운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청춘》에서는 근대 문학의 새로운 주체들을 찾기 위해 현상문예응모란을 마련하여 신진문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이와 함께 그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한국역사를 탐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일관되게 민족문화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했고, 전생애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초기의 계몽주의와 준비론으로 무장한 민족운동가에서 조선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공적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논문 그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한국역사를 탐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일관되게 민족문화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했고, 전생애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초기의 계몽주의와 준비론으로 무장한 민족운동가에서 조선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공적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논문 《불함문화론》을 통해 우리 문화의 사상적 기반을 '
둘째, 그는 옛 문헌이나 고전문학 작품을 출판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문화사업을 실천했다. 일찍이 신문관이라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입증했고, 민족문화의 위대함을 상기시키려 한 이런 노력은 1910년에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즉 조선광문회에서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1911)·《열하일기 (熱河日記)》(1912)·《삼국사기 (三國史記)》(1914) 등의 옛 문헌과, 《춘향전》·《사씨남정기》·《심청전》·《조웅전》 등의 고전문학 작품을 새롭게 정리하여 펴냈다. 출판을 통한 역사연구와 보급은 8·15해방 후에도 이어져 동명사를 통해 《조선독립운동사》·《조선상식문답 (朝鮮常識問答)》·《국민조선역사》 등을 펴냈다. 그의 옛 문헌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의 소생과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문화를 수립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된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