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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는 것은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구설에 자꾸 오르내리는 것은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울한 누명을 쓸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억울한 일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정도를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 왕의 말만 믿고 다윗을 패역한 부랑자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나발은 다윗이 도움을 청했을 때에 “다윗이 누구냐.”고 조롱하며 그의 청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기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는 법인데 다윗은 그 정도가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몰려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안 믿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으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뛰어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라고 탄원하고 있으며, 11절에서는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리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결백함을 토해내며,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사방으로 뛰어다녔을 텐데 다윗은 그런 헛된 수고를 전혀 하지 않고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성도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어려움에 빠지든지, 완전함이라는 고귀한 목표를 잃어버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랬기에 그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기에 완전함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함
그럼,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첫째로,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다윗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았으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린다면 크게 요동을 쳤을 것입니다. 요동을 쳐도 웬만한 요동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흔들어놓을 정도로 요동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도 요동을 치지 않고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어려움에 처하면 처할수록 다윗은 믿음이 요동을 치고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견고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호흡이 몹시 가빠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감당하기 힘든 누명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요동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 일이 큰일이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봤을 때는 그 일은 지극히 작은 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별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작게 보이는 것이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아주 작은 일들도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도 우리의 영혼을 좌우할 만큼 큰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작은 일만 생기면 요동을 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믿음이 견고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을 만나도 큰일이 났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렸을 때에도 보다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함 가운데 우뚝 서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면 모든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요동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인들을 멀리함
둘째로,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여전히 주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한 자들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완전함 가운데 우뚝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3~5절 말씀에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강점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한 자들을 멀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강점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강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한 자들을 멀리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며,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며, “악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면 지혜가 생기고 꿈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 어떻게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악한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열매가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매를 몽땅 다 날려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우리 스스로 멀리했으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주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인들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인자와 진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인들과는 자리조차도 함께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에 보다 완전함 가운데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보다 완전함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힘들고 지쳐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인들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완전함 가운데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힘씀
셋째로,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여전히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다 완전함 가운데 우뚝 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 6~8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렸을 때에도 조금도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 악인으로 몰렸을 때도 여느 때와 똑같이 손을 씻고 주의 단으로 달려가서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찬양하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신 집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을 사랑하는 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까지 충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과 그 믿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해서 잠시 잠간동안이라도 뒤로 물러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넘쳐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차오르고 있는데, 어떻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렸다고 해서 예배에 뒷걸음질을 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보다 완전함 가운데서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인으로 몰렸을 때에도 완전함 가운데 서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의 전을 사랑하고 주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힘써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기쁘고 충만해 있을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도 그 못된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며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에는 내 마음에 주의 전을 사랑하고 주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지 먼저 살펴보시고 그 마음이 들어 있다면 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날의 예배는 여러분의 평생에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고 올려드림
마지막으로,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고 올려 드렸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는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최고의 명약인 것입니다.
본문 9~12절 말씀에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때는 여기 나오는 다윗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만나서 하소연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억울한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께 나아가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나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때에도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며 신원해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포함해서 가장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높으신 분께 부탁을 해야 쉽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억울한 일을 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완전함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는데 어떻게 해서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며,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도 주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행하며 악인들을 멀리했기 때문이며,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힘썼기 때문이며,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고 올려 드렸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습니까? 그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