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기시감들 ― 가상의 실재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2017, 문학동네) 읽기
왜 하루키 소설을 읽는가? 무엇보다도 하루키는 페이지터너라는 명성에 걸맞게 재미있는 소설을 써낸다. 또한 이 세상의 다양한 서사들은 재미와 쾌락만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정서적 필요에 부응한다. 인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왔다. 이야기들은 더 많은 현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시간을 유한에서 무한으로 연장하고 초생명적 비약의 도약대가 된다. 하루키 소설은 좋은 드라마나 영화들이 그렇듯이 과거의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상상 속의 질서’나 ‘상상의 공동체’의 토대인 협력망을 만드는 매뉴얼로 작동한다.
하루키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 1, 2권이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다는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1권 ‘이데아’ 편과 2권 ‘메타포’ 편을 합치면 1200쪽인데, 단숨에 읽혔다. 옷과 자동차 브랜드의 세밀한 묘사에서 엿보이는 패션 감각이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식견들을 포함한 이 소설의 첫 느낌은 ‘하루키 월드의 총체적 집약!’이라는 것! 하루키 최고의 소설들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를 꼽을 수 있는데, 여기에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태야 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흡인력은 ‘하루키 코드들’의 종합판이라 할 만큼 익숙한 것의 혼재를 통한 미학의 구현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키는 대중에게 가장 잘 통했던 모든 요소들을 가동시킨다. 현실과 비현실의 혼합, 갑작스런 관계의 파탄, 작중인물의 혼란과 긴 여행, 성애의 장면들, 고급스런 기호와 취향, 뜻밖의 조력자 등장 따위는 하루키 소설의 코드들이다. 이 소설이 앞선 작품들에 대한 기시감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양’과 ‘일각수’와 ‘리틀 피플’의 상징들을 거쳐, ‘노르웨이 숲’과 ‘국경의 남쪽’을 경유하고, ‘불확실한 벽’들로 둘러싸인 ‘세계의 끝’을 넘어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뜨는 세계’를 지나서 도착한 지점이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 즉 무(無)의 장소, 바로 ‘기사단장 죽이기’의 세계이다. ‘나’는 30대 중반의 초상화가로 결혼 6년 차 아내에게서 갑작스럽게 결별 통고와 이혼 선언을 듣는다. 그 길로 집을 나서 일본 열도를 헤맨다. 이것은 ‘노르웨이 숲’의 작중화자가 일본 열도를 방랑하는 것과 겹쳐진다. ‘나’는 인생 전환점에서 오지(奧地)의 서식처를 구하는 15만 년 전 원시 인류와 같이 긴 여로 속에서 암중모색하며 떠돈다. ‘나’는 미술대학 동창의 아버지인 화가 도모히코의 집에서 은둔하며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다락방에 방치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과 마주친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수수께끼를 품은 그림과 함께 불가사의한 경험 속으로 빨려든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 잡목림에 뚫린 구덩이 속 기묘한 방울 소리,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이데아’,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를 타는 중년남자. 골짜기 맞은편의 불가사의한 백발의 인물. 미스테리는 또 다른 미스테리로 연결된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들의 연쇄 속에서 나날들이 흘러간다. ‘나’는 무의 장소에서 ‘무의 제작’에 열중하는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의 미스테리와 조우하면서 평온한 삶은 사라진다. 삶의 방향이 뒤틀리고 현실의 질서들이 깨지면서 ‘나’는 무시로 역전(逆轉)과 전복(顚覆)의 흐름으로 빨려 들어간다.
비밀에 감싸인 이웃 남자가 찾아와 초상화를 의뢰하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기사단장의 형태를 취한 ‘이데아’의 방문을 받는다. 우연과 우연들이 겹치면서 생긴 카오스 속에서 ‘나’는 ‘운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혼란과 마주친다. 초상화를 의뢰한 멘시키가 골짜기의 대저택에서 건너편 집 소녀를 관찰하는 장면은 어딘지 익숙하다. 이 기시감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해협 저 건너편에 있는 데이지 집의 녹색 불빛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미스테리들이 연속으로 발생하고, 예측 불가능의 카오스 상태 속에서 우연한 만남들, 낯선 여자와의 성애 같은 코드들의 반복, 앞선 것에 대한 오마주의 흔적들이 산포되어 있다.
‘나’는 한 음식점 화장실의 세면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자문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내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나는 대체 어디로 와버렸을까? 여긴 대체 어디일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대체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에 대해 묻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자신에게서 구할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지 30만년이 넘었지만 인류는 여전히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전전긍긍한다. 삶을 감싸는 세계의 흐름이 어느 순간 통제할 수 없게 바뀌지만 ‘나’는 그 흐름이 왜 바뀌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세계의 흐름이 바뀌면서 ‘나’는 미스테리를 떠안고 카오스로 말려든다.
‘나’의 혼란 속에는 부재와 상실의 경험이 원체험으로 숨어 있다. 이 소설에선 12세 여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나’는 카오스 상태에서 그 환영을 뒤좇는다. ‘나’는 현실과 비현실, 지상(의식)과 지하(무의식), 실재의 세계와 판타지 세계, 두 극단의 세계가 뒤엉키면서 카오스로 내몰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오스를 “탄생과 소멸의 무한 속도”라고 정의한다. 카오스는 속도의 무한 속에서 나타나는 무질서의 한 양태다. 카오스는 질서의 극한이 불러오는 무질서이고, 무질서를 삼킨 혼돈 그 자체이다. 무질서의 극한에서 생성이 발생한다. 모든 것이 카오스에서 발생하고, 이 발생들은 다시 카오스에 삼켜진다. 카오스는 무의 무, 무의 무의 무, 무의 무의 무의 무이다.
우주는 카오스 그 자체이고, 인간은 그 카오스의 소용돌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입자다. 생이라는 것의 실체는 이 카오스를 카오스로 겪어내는 시간-경험에 다름아니다.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카오스를 카오스로 겪는 시간-경험을, 하루키의 용어로 바꾸자면, ‘구덩이 파기’인 삶의 미스테리를 그린다. 어쩌면 이것은 “목적이 없는 행위, 진보가 없는 노력, 아무데도 다다르지 않는 보행(步行)”(‘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제30장.)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카오스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자명한 세계 너머의 수수께끼 같은 저편과 마주치면서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는 이 우연의 운명을 겪어낸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우리가 개별자로 겪는 ‘구덩이 파기’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일 테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