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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성지 순례와 걸음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염두에 둔 것은 딱 일곱 가지었다. 1). 성 이시돌 목장과 임피제이 신부님, 2).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표착지 용수, 3).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조천 함덕, 4).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 정난주와 대정 묘역과 추자도 황경환, 5).마라도 포르치운쿨라와 민성식 신부님. 6).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7) 사려니 숲과 한라산 털 철쭉 탐방.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결국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고 이어서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이 바로 생각과 결정의 수순이다. 그러나 팀의 일정이 나누어 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보니 고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직장인들의 월요 출근을 염두에 둬야 하고 일반인들의 일정이 구분되어야 하니 여간해서 딱 부러지게 결심을 내 세울 수 없었다. 양면성을 획일적 공유 감과 보편적 만족을 건져 올리기 위하여 재차 일정을 손질한 것은 출 행 전날이었다.
스케즐 수선이 아니라 대 수선이었다. 대 수선이라 함은 거의 집을 새러 짓는 것처럼 하는 방식인데... 첫날 사려니 숲 길, 걸음 여행을 오후로 밀어 내고 성지순례를 오전으로 당겼다. 그 이유는 동선의 편리함과 주제에 부합한 조치였다. 그리고 사려니 탐방 건과 관련하여 산림청에 대한 업무 협조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거의 새벽 시간인 5시 30분 경에 도착한 김포공항 국내선 2층, 한 무리의 관광객들의 소요로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복잡함 속에서 정동중의 마음을 잡으려니 여간해서 모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감고 일정을 스크린 하였다. 그렇게 근 1시간을 보내자 형제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발권을 받으며 짐을 탁송하고 그리고 탑승 수속을 마친 후 잠시 대기하다 탑승하였다. 그리고 연착 30분 가량 지난 후 제주 공항에 내렸다. 홍지영 라파엘 형제와 전화를 통화 후 서로 만나 반가운 조우, 그리고 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겨 버스에 올랐다. 비로서 순례와 걸음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순례와 걸음 여행의 테마는 평화를 중심에 두기로 하였으며 우리 순례단의 명칭도 참! 평화 성지순례단 이라 정하였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스케즐를 라파엘 형제에게 주면서 오늘 일정을 익히고 그 수순대로 차량 동선을 잡으라 일렀다.
우선 제주 최초의 천주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로 하였다. 우선 순교 선조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 봉헌한 김기량 성당을 찾아 하느님과 순교 선조 펠릭스 베드로님과 교감의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아직은 가건물 형태의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성전, 소박하다. 성모님을 모신 현무암 반석 틈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장미를 닮았다. 흰 장미 같은 모양이 시선을 끌어 모두 모여 방문 기념 촬영을 해 두었다. 성당에 계신 두 수녀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제주 답사지를 지도와 함께 만드신 안내 책자를 주셨다.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니들이 사랑을 알어? 그리고 작은 글씨로 부제의 성격이 담긴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사랑을 달라 기도해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주실까?
반복해서 읽고 읽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가늠해 보았다. 나의 개인적인 답은 물론 주신 다지만, 한편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에 곤욕스러웠다. 사랑은 양면,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데, 받으려 하는 것보다 주려는 마음이 앞서면 더 큰 사랑이 다가 온다 하였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들 형편이다. 삶의 중심은 늘 균형을 이루게해야 하는데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항상 편심만이 존재하니 걱정이다.
수녀님들과 인사를 나눈 후 황사평을 순례하기 위하여 차에 올랐다. 황사평으로 가는 길이 참 편치않다. 그것은 그 안에 담긴 역사성 때문이었다. 대원군 퇴진 이 후 박해도 수그러들고 한불조약으로 천주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의 오만함과 이를 묵인하고 교세에만 적극적이던 선교사들도 교난을 부추긴다. 아주 잘못된 처사였다. 이재수난을 생각하고 그가 봉기했던 연유에 대하여 골몰하게 생각하며 황사평에 도착하였다.
황사평은 조선 말에 발생된 뼈아픈 신축교란으로 생긴 의 역사의 산물이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수호 통상 조약 이후 천주교는 선교의 자유를 얻어 활발하게 조선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토착 신앙이 전통 종교이자 사상적, 정신적 토대였던 제주도에서는 1895년부터 전국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에 따른
충돌이 잦았다. 그중 가장 큰 종교적 충돌은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린 신축교란(辛丑敎難)이었다.
제주도에서는 1899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파견되고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하여, 1901년에는 무려
1,300~1,400명의 신도수를 기록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한 당시 제주도에는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정군수였던 채구석, 유림 오대현, 관노 출신 이재수 등이
상무사를 설립하고, 일본인 업자와 결탁하여 어로를 독점하고 있었다.
1901년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세금 징수관 강봉헌이 프랑스 선교사, 천주교도들과 결탁하여 상무사 측에 대규모 잡세를
부과하고, 어로 독점에 제동을 걸면서 강봉헌 측과 상무사 측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강봉헌은 제주도민들에게
엄청난 잡세를 부과하여 도민들의 민중들의 삶은 더욱 어려웠다. 게다가 강봉헌은 잡세 징수에 천주교도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제주 도민들의 천주 교도들에 대한 적대감도 점차 싹터 갔다.
더구나 천주교도들은 마을 수호신으로 섬기던 성황당을 파괴하고 제주도 전래의 전통을 무시하는 등 프랑스 신부의 권력을
등에 업은 일부 천주교인들의 행패가 극심하였다. 이에 대정군에서는 천주교의 폐단을 고치라는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끝에 천주교인들과 주민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프랑스 신부와 교인들이 총기를 사용하면서 사건은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도민들이 제주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천주교도들과 제주
관청은 성문을 닫아 걸고 저항하였지만, 5월 28일 제주성이 함락되었고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봉기군을 진압하고 강봉헌, 채구석, 이재수 등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한편, 프랑스 신부들은 뮈텔 주교를 통해 프랑스 함대의 개입을 요청하였는데, 프랑스
함대는 난이 진압된 후에 도착하였다.
프랑스는 신부들의 피해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이유로 서울로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는 이재수 등에게 교수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하였으며,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프랑스는 또한 죽은 천주교도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하여, 1903년 말 사라봉 아래 황사평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덕비에 서서 추모해 드리고
제주 초대 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님를 추모한 후
주교회의에 몸 담으며 신구약 복음서를 번역한 제주 한림이 고향인 임승필 요셉 신부님을 추모하였다.
화초는 사람들이 키우지만 들에서 자라는 초목과 야생화는 하느님께서 키워 주신다. 신분과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들은 남은 가족들에게 신앙적 긍지와 모범이 되고 애뜻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이름과 신분조차 지워지고 이름 또한 잊혀진 무명 순교자들은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으로 보호되고 관리된다. 그래서 우린 더 소중한 마음으로 참례하게 된다.
역사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다. 하느님의 땅에 묻힌 사실은 소중한 결과다.
잠시 외연으로 벗어나 정리하는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길고 긴 박해의 시간 안에서 겪은 상상할 수 없는 고초는 분명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한계점을 넘어 버렸었다. 가산을 잃고 삶의 터전 조차 버리고 깊은 산 중으로 숨어 들어 교우들과 교우촌을 형성하고 들꽃처럼 살아가다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어 신앙인으로서의 신분 보장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한순간에 펼쳐졌을 것이다. 고난으로부터 해방, 자유 분망한 행위에서 토출 된 사려 깊지 못한 것들이 끼어들면서 생긴 우려들, 끝내 교난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새삼 겸손의 의미가 강하게 다가 왔다.
무명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며 바람과 빛과 숲이 된 기분으로 사진기의 누름 장치를 눌렀다. 사진, 사~ 진, 그렇다.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 사진인 것처럼 신앙이라는 그 바탕은 진리를 내포한 사랑과 자비심이 그릇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건져 올려 공유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일인데 그 구현이 정말 쉽지 않다. 욕심이라는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황사평 정문에서 걸어 들어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성 가정의 표본 상, 모든 참례를 마치고 걸어 나올 때 등만 보이는 모습이 순례자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게 해 준다. 오히려 동쪽 방향으로 보고 계신다면 ..... 그래서 시선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제주 특유의 억새 풀이 자라 덮어 버린 사라 봉 기슭, 하느님의 정원 황사평 묘원, 돌 담에 기대 서서 바라 보았다. 쓸쓸함 보다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 왔다. 다음 일정을 위하여 부지런히 걸어 황사평을 떠났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그는 1816년 제주 조천 함덕 중인 집안 출신이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상인이었다. 1857년 2월 18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항해중 풍랑을 만나
표류끝에 3월 26일 서해 광동해역에서 영국 선박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 처주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다. 제주인으로서 최초 신자가 된 것이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펠릭스 베드로는 1년 2개월만에 고향 제주로 귀향한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가족과 배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1859년 봄 육지로 나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는 시기 박하유를 팔러 조선수군 본부가 있는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에서 체포되어 통영 관아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지만 굳세게 신앙을 지킨다. 함께 투옥된 4명의 신자들에게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르라 권면한다. 혹독한 매질에도 죽지 않고 버티던 다섯명의 신자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펠릭스 베드로에게는 가슴에 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 나지 못하도록 한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51살이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리스 베드로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제주도 조천 함덕 출신 김기량, 조그마한 장사꾼, 중국 광동해역 부근에서 풍랑에 의해 난파 극적으로 영국 상선에 구조되어 홍콩으로 보내지고 당시 그곳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한국 신학생의 도움과 극동지역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있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제주 출신으로 첫 영세자가 되어 돌아와 전교에 힘을 다 한다. 내포의 이존창, 전주의 유항검이 떠 오르고 모방신부의 선발로 최초의 신학생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이 떠 오르고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내에 있었던 한국신학생 신학교와 부제품을 받은 만주 소팔가자 성당도 오버랩 된다.
바닷길을 통해 떠났던 그는 의주를 통해 귀국 길에 올라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주변 배 사람들을 우선 전교시킨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명쾌하다. 인연이 만들어지면 신앙의 꽃을 피운다. 그것도 활짝 피는 화려한 꽃으로, 신앙의 확산을 막으려 칼을 들어 신자들을 처형했지만 순교의 혈은 오히려 조선의 반도 곳곳으로 튀어 신앙의 씨앗이 되어 개화로 연결되어 갔다. 박해는 오히려 신앙 확산의 촉매제가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진작 이런 말씀으로 우리들을 위로하고 계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명쾌하신 말씀이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위의 복음 내용을 생각하며 외우고 반추하며 김기량 발자취를 따르며 동적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사려(思慮)니 숲을 걷는 것이 오후 일정이다. 신령이 머물고 있다는 뜻이 깃든 숲, 그 안에 오름이 있다. 제주도 섬에 있는 오름의 종착지는 바로 분화구다. 분화구로 가는 길이 바로 오름이다. 사려니 숲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숲이다. 붉은 오름을 기점으로 남쪽은 산림청에서 관리하고 있고 북쪽은 제주도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1년에 단 한번 5월 후반에서 6월 초순 길을 열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통행이 제한 된다. 산림청 관리 지역은 사전 입산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루 300명만 입산을 허가할 정도로 남방계 식물 보호 지역이다. 여러 차례 방문 시간을 수정하여 담당자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사려니 삼나무 숲
바람이 스치고 오름으로 달아 났다.
빛을 품은 숲
각 혼이 깃든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 영혼이 자리 잡으니
비로서 숲은 창조적 질서의 혜안이 보인다.
하나의 점을 주셨는데
사람은 임의의 선을 긋고 면을 만들었다.
그것은 외로움을 벗어나려 한 일이다.
사람은 그것으로 부족하였는지
다시 임의로 선을 구부려
공간을 완성한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합치었고
혼돈을 불러 왔다. .
혼돈을 잠재우고 평화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의 수습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질서의 흩어짐을 모으는 것이
창조적인 질서를 찾는 일이다.
6월, 사려니 숲 삼나무 밭에서 severino
사려니 오름은 지 척, 시간이 없었다. 늦은 시간에 방문한 결과다. 오래토록 머물러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숲 향을 마음에 담으려면 오래 시간 마음을 열고 그곳에 있는 것이 좋다. 도시인들의 분주한 마음의 치유는 자연이 좋다. 인위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환경 안에서 사람은 어느 기계의 부품처럼 소용 되고 소모되는 것 같은 우울함을 겪어야 한다.
토막 시간에 불과하였지만 삼나무 숲은 아름다운 배려를 마음에 심어 주었다. 상쾌하도록~~^^
참! 평화 성지순례와 걸음 여행을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자매님, 체칠리아, 수산나~~ 언제 보아도 마음이 곱다. 선함이 깃들어 있으니 평화는 그들의 것이다. 다른 자매님들도 그러하지만 .....
심히 불안한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다. 그네를 붙잡고 있는 양 줄, 버티는 힘이 위태하기 때문이었다. 사려니 숲을 빠져 나오면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당신의 인도와 사랑으로서 하루 일정이 닫혀 가고 있나 이다. 숙소로 방향을 잡으라 하고 눈을 감았다.
2017. 06.17. 오늘은 마라도 가는 날이다.
마라도 가는 선 편은 두 개의 선사가 운영한다.
하나는 삼양 해운, 따른 하나는 토착민들이 세운 회사, 마라도 가는 여객선이다. 이중에 마라도 가는 여객선을 선택하였다.
선택 후 승선 명단을 만들어 미리 제출하여 마라도 가는 당일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여 놓았다. 승선 신고서는 승선자 이름, 생년월일, 남,여 구분 명시하고 연락처를 삽입해야 한다. 섬에서 섬으로 가는 길, 바다 길이 상당히 거칠다. 가파도 보다 파고도 높고 바람도 거센 편이다. 여유로운 시간이 있어 송악산 배경과 해안선을 중심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탑승 시간 임박, 더 지체를 요구할 수 없다. 일행에게 서두르라 이르고 마지막 줄에 섰다.
부릉 부르릉~~ 선박이 내는 특유의 앤진 소리, 스크류가 강하게 도는 소리가 들리더니 접 안에서 멀어져 간다. 회전, 뱃 길을 잡는 중인가 하는 순간 해안에서 멀어져 간다. 형제 섬이 스친다.
한라산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산방산도 멀어져 간다. 운무 속으로 숨은 한라산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어진다는 것은 이별이고 잊혀 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놓지 않는다면 다시 곧 만나게 되지만 마음에서 풀어 놓는다면 다시 만나기 쉽지 않다. 종교에서도 기도가 사라지고 회개가 무뎌진다면 믿음의 정체성도 이슬처럼 사라진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이고 회개는 믿는 자의 분별력이다. 대화의 중심은 복음적 소통이고 회개는 실천으로 가는 일과 진정성, 진리의 중심을 마음에 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선박에 몸을 싣고 항해를 하면서 경계해야 할 일은 뜨거운 태양과 해풍이다. 강렬함에 피부가 손상될 수 있다. 풍경을 마음에 많이 담으려는 욕심이 난간에 기대게 하고 선상에 머물게 한다. 부질 없는 짓이다. 넘치면 오히려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다. 보일 듯 말듯 하는 것이 서정성이듯 담은 듯 말듯 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마음에 든 것이다. 그래야 오래토록 풍경이 살아 있게 된다. 선실을 선택한 이유다. 야무진 묵상은 아니더라도 섬으로 가는 이유와 도착하여 할, 마음 일에 대하여 정리해 두는 시간이 바로 순례자로서 합당한 일이다. 그새 배는 거친 해류를 밀어내고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배 머리가 요동치는 가운데 도착한 마라도, 국토 최 남단이란 이유 하나 만으로 찾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땅끝은 전남 해남지방에 있지만 바다에서 유인도로 끝은 마라도 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포르치운쿨라를 방문하기 위함이다. 참 평화 순례 단으로 참석한 순례자 종교적 신원은 전부 천주 교인이다. 그중에 좀 더 주님에 대하여 다른 갈망과 시선으로 다가 가기 위하여 준비하고 노력 끝에 종신 서약을 받은 프란치스칸이 90%다. 마침 6월 종신 서약을 받은 두 자매님도 동행하였다.
도착한 선착 장, 천혜의 장소다. 좁고 비탈이지만 올라서면 펼쳐진 너른 들, 곳곳에 핀 야생화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해녀 동상과 마라도 분교 돌담에서 촬영을 끝낸 후 마라도 허리를 가로질러 등대 아래를 찾았다. 풀 사이로 난 흙 길을 넘으며 마음에 요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볕이 따갑고 바람이 거세다. 옥 빛 바다가 마라도 전체를 울타리로 감싼 모습이 절해 고도를 느끼게 한다. 한 시간 정도면 마라도 속 속을 전부 헤집고 다닐 수 있다. 선사와 협의하여 섬에서 나가는 시간을 조절하려 하였다가 접었다. 과한 욕심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흰 빛 등대가 반긴다. 고동 소리와 같은 나팔과 야간 번쩍 뱃 길을 안내하는 빛을 내는 등대가 고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낮엔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얀 등대 집. 서늘할 정도로 강렬한 흰 빛이 옥색 빛 바다 물과 대비되어 등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포르치운쿨라!, 마라도에서 나는 수산물 형상으로 지은 건물이다. 문어, 전복, 조개, 소라, 고동이 포르치운쿨라의 건축 자재다. 전복으로 체적을 만들고 남향으로 종탑을 세웠는데 종탑은 문어 머리다. 미끈한 모습이 태풍마저도 쉽게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유선형이다. 그리고 전복 지붕위로 문어가 다리를 걸쳤는데 빨판이 바로 채광 창이다. 그 숫자는 다섯 개, 빛은 전부 제대 고상으로 향해 있다. 절묘한 각이다. 라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으신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오상을 뜻하는 표현물이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포르치운쿨라에 대하여 다시 짚어 보자. ~~~ 영원하신 사부 사랑합니다.~~*
사부께서는 천국은 지상 어느 곳이거나 건설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은총이 어디에서 나 믿는 이들에게 내린다고 믿고 있었지만,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는 보다 풍부한 은총으로 가득 차 있고 거룩한 성령이 자주 내려 온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어, 자주 형제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내 아들이여 이곳을 절대 버리지 않도록 하시오. 만일 여러분이 한 쪽 문으로 밀려나거든 다른 쪽 문으로 들어 오십시오. 왜냐하면 여기는 정말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완덕의 거울 83)
포르치운쿨라는 성인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고 손수 수리한 성당 중 세 번째 성당이지만 무엇보다도 라자로 이르아르떼 형제가 말하는 회개의 세 번째 과정에서 즉 더욱 더 깊이 있게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평생을 바쳐 하느님께 봉헌할 생활 양식을 발견한 장소이다. 성인께서 어느 날 포르치운쿨라에서 미사에 참여하게 되어 거기서 루가 복음 10,1-9에 나오는 파견 복음을 듣게 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하시면서 양과 같이 양순 하고 돈이나 자루 없이 다니고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주는 음식을 먹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라는 내용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성인께서는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것이다.
이 때가 회개 생활을 시작 한지 3년 되던 시기였다. 그 말씀을 듣고 회개 생활의 공적인 표시로 입었던 회개 자의 옷을 벗고 띠로 매는 간단한 투니카(수도복)를 입고 맨발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설교하기 한다. 아멘
Severino와 성향이 비슷한 사제가 계셨다. 산을 좋아하고, 여행 또한 즐겼다. 그리고 성직으로 나감을 늘 고민하고 살았으며(젊은 날에) 책을 애독하고 글쓰기를 좋아 한 사람이었다. 또한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순례를 하고 돌아와 들려 주는 이야기를 보면 함께 현장을 함께 다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고향이 인천 송도였는데 부산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 한다.
나! 민성기 요셉.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 대학교를 가지 못했다. 당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에 재학 중이니 신학 대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부산 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던 시절, 봄 날 중간고사 준비 목적으로 혼자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리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 AFKN 테이프와 책자 외판원, 나는 지금 외판 일로 당신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개신교 신자로서 아프리카로 선교 떠나는 것이 꿈이다. 넓은 공간에서 혼자 공부하는 모습을 지나다 우연히 본 순간 내 머리 속에 웬 카톨릭 사제가 앉아 있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그냥 지나치려다 실례를 무릅쓰고 다가 왔다.
참 묘한 만남, 지금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나의 성소를 생각할 적 마다 그가 떠 오른다. 그 때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빠트리지 않는다. 그가 내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갈 수 있도록 기도에 동참하였다. 그를 만난 이 후 대학생이라도 졸업 후 신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졸업 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학한 첫 사람이 되었다. 대학교를 다니며 대연동 성당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고 부산지역 대학생을 중심으로 의식화 동아리를 꾸려 나갈 때 대연동 공동체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사님이 생활하고 계셨고 동아리를 지도해 주고 있어 그 인연으로 입회하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청년을 대표하여 평신도 사도직과 시노드 종교 교육분과 위원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많은 부산교구 신부님과 교분이 깊었는데 수도회에 가려는 나의 의지를 격려하면서도 부산교구 소속으로 신학교에 가는 권유를 자주 받게 된다. 당시 많이 흔들렸다. 교구? 수도회? 이 때 내가 맡고 있던 고등부 학생회 여학생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 준다. " 어제 밤 꿈 속에서 길을 가는데 고등부 회장이 거지하고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가만 살펴보니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수도회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나 민성기는 나의 인생에 있어 수호 천사 1,2를 만나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제1 수호 천사는 사제 성소의 기회를 주었고 제 2의 수호 천사는 수도 성소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나는 포르치운쿨라 경당 기획자, 시공자, 봉헌자, 민성기 신부님을 떠 올리며 참 평화 성지순례단, 프란치스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기도문이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열고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린 후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순례단 각자의 정성 어린 봉헌금을 모아 관리자 형제에게 드려 봉헌함에 함께 넣었다. 그런데 기도 내 내 눈물이 비오 듯 나의 얼굴을 적셨다. 눈물의 은사였을까?
신부님은 포르치운쿨라를 봉헌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홀연히 선종을 하신다. 그것도 하늘에서... 기회가 오는 날, 순례 단원들에게 설명해 드리려 한다.
포르치운 쿨라는 1998년 8월 1일에 시작하여 2000년 8월2일 봉헌된다. 포르치운쿨라 축제 기간 내에 시작하여 축제 기간 내에 봉헌된 것이다. 그리고 2006년 제주 교구로 관리권이 재 봉헌 된다.
기도를 끝낸 후 관리 형제님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해풍 덕분에 눈물도 말랐다. 여유시간은 30분, 포르치운쿨라와 등대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 시간을 가졌다. 한국 최남단 마라도에 프란치스코회 1회 민성기 신부님이 세우신 포르치운쿨라가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기쁨인데 확실하게 드러난 창조적 질서가 간직한 아름다운 풍광 속으로 침잠하는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걸어 나오면서 등을 돌려 포르치운쿨라를 다시 보았다. 의식이 남달랐던 사제, 민성기 요셉, 신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요셉신부님! 부른 후, 푸른 창공을 올려 보았다. 하늘에서 하늘로 날아 오른 마지막 순간, 사제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돋자리 총회의 시작점. 포르치운쿨라도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바다를 사이에 둔 풀밭이 있어 종신 자매를 초대하여 사진을 만들었다. 곡선인 풀밭과 직선인 수평선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모슬포로 돌아 오자 데레사 자매님 친구분이 일행을 기다렸다.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이미 식당을 예약한 후라 승낙 할 수 없었다. 대신 아이스커피를 대접 받았다. 어디를 가나 귀한 친구들이 꼭 있는 데레사 자매님, 친화력이 좋아 생긴 우정들이다.
점심을 챙긴 후 지역 본당 모슬포 성당을 찾았다. 참례, 당연한 일이다.
성지순례 걸음마다 순교 정신을 새기고 기도 중에 신앙 선조들과 함께 하게 사오니 우리들의 순례와 걸음 여행에 당신의 사랑과 축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 드렸다. 다음 행선은 추사 김정희 유배지다.
제주에서 나 볼 수 있는 현무암, 물도 쑹, 바람도 쑹 들고 나는 소통의 돌이다. 현무암질 암석은 지구 전체 표면의 2/3를 차지하고 두께 약 5~10km애 이르는 해양지각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성분이다. 맨틀의 상승부인 해령에서 흘러나온 마그마가 바다에서 급속도로 냉각되어서 가는 입자의 현무암질 암석이 된 것이다. 추사 유배지의 긴 현무암 돌담, 높고 긴 모습이 압도 한다.
긴 유배기간을 앞두고 한양을 떠난 추사는 대흥사 일지암으로 초의 선사를 찾아 하루를 묵는다. 동갑내기 친구 초의는 차를 끓여 친구를 대접하며 초연하게 대한다.
추사 관은 추사가 대정현에서 머물며 완성한 세한도 안의 집을 본떠 지은 관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龍宮里)에 秋史의 고택이 있다. 추사는 1786년 6월 정조 10년에 조선조 세도가 집안인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인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인 김한신은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에게 장가를 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짐으로써 종척(宗戚)이 된다. 또 할아버지(김이주)와 10촌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영조의 계비가 되어 겹친 종척 가문이 되었다. 이로써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기 전, 추사 가문인 경주 김씨가 세도를 누리게 된다. 추사의 큰아버지인 예조참판 김노영이 후사가 없어 추사가 그에게 양자로 입적되니 월성위 궁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초의와 처음 만남은 수락산 학림사였다. 초의는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추사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다.
속성은 張씨, 법명은 의순(意恂)이다. 다섯 살 때 물에 빠진 것을 어느 스님이 구해준 것이 속세를 떠나게 된 동기가 되었다. 15세(1800년)에 나주군 茶道面의 운흥사에서 벽봉(碧峰)스님께 의지하여 중이 되었다. 20세(1805년)에 대둔사의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21세때 大敎를 수료하였다. 草衣는 완호 스님이 준 그의 법호이다. 초의는 해남에 정주하면서도 한양에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한양으로 와 수락산 학림사에 머물 때 추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학유와도 교분을 맺고 정조의 사위 홍현주를 비롯하여 당파를 초월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추사의 고택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토비코의 고향 여사울 건너편에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약용에 대하여 알고 있기를 유학자로서 실학에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며 자산어보의 저자 약전의 동생이고 천주교로 인하여 박해 당시 아들 철상과 함께순교한 약종의 동생이라 알고 있다. 또한 강진 유배 시 초의를 만나 교분을 나눔하는데 약용은 초의에게 유교를 가르치고 초의는 다도를 약용과 초의는 추사에게 글씨 즉 서예를 배웠다고 알고 있다. 각자 조예가 남다른 분야를 갖고 있었는데 서슴없이 서로에게 가르치며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초의는 동다송의 저자이고 약용은 목민심서외 500여권의 저자로 이름을 날리며 추사는 자신의 내면을 그려낸 세한도의 작가로 유명세를 달리 한다. 각별하게 약 10년 년배인 약용을 존경하며 우정을 나눈 초의와 추사는 약용이 해배 후 마재 여유당에 머물다 타게 후 약용의 자식 학연과 헉유와 인연을 이어 간다. 그리고 정재원은 남씨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얻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약현이다.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약용의 누이는 정재원이 처 남씨가 세상을 떠나자 두번 째 부인으로 맺은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약현은 이벽의 누이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정난주다. 정난주는 황사영과 혼인하여 황경환을 낳지만 남편은 황사영백서로 인하여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 가솔들은 노비가 되어 거제도, 추자도, 제주도로 유배된다.
나주 정씨 집안과 인연이 대를 이어나간 추사 김정희, 그리고 추사가 제주 대정현에 유배 당시 대정현을 찾아 오래 머물며 추사를 위로했던 초의, 그를 통하여 다도가 자리를 잡게 된다. 그 현장을 찾는 것은 천주교 박해사 중심에 있는 나주 정씨의 발자취를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배지 초입에 서 있는 대나무 숲~ 상징성이 깊이 베여 있는 나무다. 추사는 추사체란 글씨를 남겼고 세한도라는 걸출한 그림을 남겼다. 그림이든 글씨든 필(筆)이 있어야 한다. 필은 자루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루를 만드는 나무가 바로 竹이다. 글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모함하는 상서를 만들어 정적을 죽이는 던 곳이 바로 이조시대 관료들의 행태였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도 안동 김씨 세력들이 만들어낸 일들이었다. 추사는 아버지의 상을 끝낸 후 1840년 헌종 6년, 6월에 헌종에 의하여 동지부사에 임명된다. 아버지가 떠날 당시 추사가 따라갔던 길이이었다. 이젠 본인이 가니 얼마나 설랬을까? 그러나 당시 권력을 틀어지기 시작한 안동 김씨가 재 부상하는 경주 김씨 추사를 가만 둘리 만무했다. 북경행 대신 돌아 온 것은 지독한 고문이었다. 순조가 어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할 당시 경주 김씨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순조가 직접 정사를 챙기면서 장인 김조순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을 휘두르지만 순조가 병이 심해지자 효명세자는 안동김씨에 대항 하고자 경주 김씨 추사 아버지 김노경을 발탁한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다시 친국을 하기 시작한 순조를 앞세워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잡는다. 이후 세자를 옹위하던 세력들을 축출하는데 추사 아버지 김노경이 심하게 당한다. 윤상도 부자의 상소문 초안을 추사가 잡았다면 추사를 얽어 넣어 결국 1840년 헌종 6년 9월 4일 제주돌로 유배 된다. 허위진술이 밝혀 지고 그 원인은 안동 김씨 세력안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만 소용 없었다. 추사의 친한 벗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극형은 면하고 목숨을 건졌다. 추사의 친한 벗 권돈인이 형조판서였지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였다. 죄도 없는데 길고 긴 시간 동안 유배된 심정, 세한도에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추사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마음의 위로자였던 초의가 보고 싶으면 차를 핑개로 심하게 투정을 부렸던 추사, 너무 뛰어난 인재였기에 시샘을 받아야 했던 일은 참으로 큰 국가의 손실이었다. 대나무 숲에 머물며 잠시 사념에 빠졌다. 그리고 혼자 길고 긴 검은 현무암 담을 끼고 주차장으로 걸어 갔다. 추사가 머물렀던 갇힌 단절의 시간들이 검은 현무암 돌 성곽같은 돌담이 대변하고 있었다. 서울 할망 정나주를 만나기 위하여 자리를 옮겼다.
정난주는 나주 정씨 정재원의 장남 정약현과 이벽의 누이 경주 이씨 사이에 1773년 영조(45년) 태어났다. 작은 아버지 약전에게 서학을 배우고 고모부 이승훈에게 마리아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황사영은 17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약종의 제자였다. 어린 사영에게 정조는 비단을 손목에 감아주며 훗날 다시 찾아와 나를 도우라 한다. 평생 정조가 감아준 비단을 풀지 않았다는.... 작은 아버지들과 주변의 주선으로 난주는 사영과 결혼하여 경헌을 낳는다. 주문모신부를 통하여 세례를 받은 사영은 1801년 (순조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거나 유배를 가자 황사영은 제천 토굴 배론으로 피신하고 정난주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마재로 피난한다. 황사영은 배론 토굴에서 약 60cm 비단에 글을 적은 황사영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사전에 발각된다. 백서의 내용을 파악한 조정에서는 국가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취지에서 국사범으로 다루기 시작하여 사영은 능지처참형으로 벌하고 시어머니 이윤혜는 노비신세로 거제도로 유배되고 난주는 제주도로 노비 신분으로 유배된다. 가는 길에 난주는 패물을 내 놓고 관리들을 설득하여 아들 경헌을 추자도 예초리 바위에 내려 놓고 떠난다. 당시 혼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비 신세로 제주에 도착한 난주는 다시 대정현 관아로 이송되어 머물게 되지만 부담스러운 난주를 한 때 별감이었으며 자문 역활을 하던 김석구에게 보낸다. 동헌 뒤에 살던 김석구는 난주를 보살피고 난주는 김석구의 두 아들을 양자처럼 키운다. 그리고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동네 사람들을 교화시키며 존경 받으며 살다. 66세로 타계한다. 난주가 죽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은 모슬봉 아래 한귤왓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추자도에 인편으로 부고를 보냈지만 아들 경헌은 올 수 없었다. 사영의 백서는 나주 정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약종과 그의 아들 철상은 서대문 밖에서 순교하고, 약전과 약용은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다. 천주를 믿지 않고 살았다면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가문이었지만 이를 포기한 신앙적 삶,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을 겪어야 했던 어머니로서의 모정,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 난 후 경헌의 심정을 헤아려 보다 바로 접었다. 대신 이 마음 하나로 정리하였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다른 끝까지 거침없이 퍼져 나가 만물을 보기 좋게 정돈 한다 ( Attingit a fine usque ad finem forrtiter et disponit omnia suaviter) 일행보다 조금 뒤쳐져 빠져 나오면서 등을 돌려 보았다. 서울 할망 가겠습니다. 다시 또 순례 단원들과 와서 오늘 못한 이야기 듣지 못한 이야기 듣고 말하고 가리라~~^^ 샬롬.
슬픈 감정은 속히 씻어내는 것이 좋다. 숙소로 가는 길에 조금 걷기로 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해풍에 마음을 맡기니 밝아졌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일행들 표착지 용수 성지
성 김대건 신부(1822- 1846) 표착 기념관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 조선으로 항해 하던 중 풍랑을 만나 28일간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에 포착한 것을 기념한 것과 동시에 제주 지역에서 한국 신부 최초 미사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원한 생명이 저에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기념관 1층은 김대건 신부 유해 공경실과 각종 형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전시설로 김대건 신부관, 제주 교회 역사관, 선종사제관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지금은 리모텔링 중이다.
라파엘호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에서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8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교우 11명과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온 배 이름이다. 상해를 출발하면서 토비아의 길을 인도하였다는 여행자들의 주보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배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라파엘호는 표류하게 되어 상해를 출발한지 28일만인 9월 28일 제주도 해안 용수에 도착하였다. 배를 다시 정비한 후 10월 12일 전북 익산 황산포 나바위에 하게 된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라파엘호와 생사를 같이한 시간은 5개월 12일간이었다.
용수 성지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시간이었다. 마라도 포르치운쿨라를 다녀 온 후 모슬포 성당 참례, 추사 유배지, 정난주 묘역, 해안 길 걸음여행, 그리고 용수성지 순례, 무척 분주했던 하루였다. 성당에서 묵상과 기도를 끝낸 후 기념관 1층으로 자리를 옮겨 안드레아 신부님 유해공경실에 들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2층 전시실은 리모텔링 중이라 참관 할 수 없어 옥상으로 올라 가 대신 주변 풍광을 조망하는 시간을 갖었다. 반파된 라파엘호에 온 몸을 맡기고 서해를 넘어 조국으로 돌와 오는 신부님의 심정은 오즉하였을까.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더니 어느 순간 하늘에 별이 총총... 바다의 별을 보게 되신다. 바다의 별 그 별은 지금 용산 신학교 시절 성당 입구 문설주 위에 있다. 성모님의 자비가 한국의 첫 자제 안드레아 신부를 조국으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선바ㅏㄱ인 라파엘호를 고증에 의하여 복원 한 후 성모님 옆에 전시를 하고 있다. 일행들을 선박으로 올라 가 라파엘호에 대한 탑승을 경험하라 한 후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리고 걸어서 숙소로 향하였다.
하루의 빛이 살아져 가는 시간 무렵 숙소에 차려진 저녁을 먹으며 함께 하며 감사 기도를 드린 후 해안 가 산책을 즐기고 깊은 잠을 청하였다. 은혜로이 내려 주신 하루 감사 드리나이다. 당신 안에서 시작하고 당신 안에서 쉬는 시간 또한 감사 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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