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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4년 여름호
【김남주 읽기 · 2】
김남주는 해방전사다
대담 : 박석삼(정치학 박사) | 맹문재(시인)
일시 : 2024년 5월 11일
장소 : 푸른사상 서울사무소
사진 : 장우원(시인)
유튜브 : 박이정(시인)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올해가 김남주 시인께서 타계한 지 30년이 되어요. 더 늦기 전에 김남주 시인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을 모셨어요. 앞으로 김남주 시인과 함께했던 분들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들으려고 해요. 김남주 시인과 인연이 깊은 박석률 선생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귀한 말씀을 많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크네요. 그래도 김남주, 박석률 두 분과 함께한 박석삼 선생님께서 계시니 다행이지요. 따라서 오늘 대담의 앞부분은 김남주 시인과 관계된 박석삼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뒷부분에서는 김남주 시인과 박석률 선생님의 관계를 듣도록 할게요. 그리고 박석삼 선생님의 저서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으며 마무리 짓지요.
선생님 저서들에 소개된 약력을 보니 윤한봉과 이강의 사랑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인연이 궁금하네요. 또한 1978년 함평 고구마투쟁에 앞장섰다고 밝히고 있네요. 황광우가 엮은 『그 시절, 광주 사람들』(심미안, 2022)에 수록된 「박석삼의 회고」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소개를 부탁드려요.
[함평 고구마 투쟁]
박석삼 : 어찌 보면 저는 좀 행운아였다고 생각합니다. 윤한봉 형하고 박석률 형은 중학교 동창이에요. 광주서중학교 동기로서 서로 신뢰가 있었어요. 민청학련 사건에도 함께 연루되어 징역을 살았지요. 그리고 이강 형과 김남주 형은 해남중학교 동창이에요. 윤한봉, 이강, 박석률 형은 1947년생이어서 저보다 8살 많고, 김남주 형은 1946년생이에요. 이렇다 보니 제가 박석률 형의 동생이어서 자연스럽게 형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지요. 윤한봉 형은 따르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저를 많이 가르쳐주려고 애썼어요. 저도 친형처럼 의지했어요.
김남주 형의 시에도 나오는데, ‘만년 노트’라는 것이 있었어요. 청바지나 짙은 군청색 천으로 판자를 뒤집어씌운 다음 안티프라민 같은 연고를 발라놓고 그 위에 투명한 비닐을 덮어놓은 것이에요. 거기에 나무젓가락을 눌러 쓰면 글자가 보였어요. 그 비닐을 들면 글자가 지워지지요. 윤한봉 형은 미국 정보부가 500미터 밖에서도 도청할 수 있으니 우리의 대화가 들키지 않도록 항상 만년 노트로 대화를 했어요. 그만큼 철저했지요.
이강 형은 농민과 소비자를 잇는 직영 매장인 소위 ‘꼬마시장’이라는 간판을 걸고 운영했는데, 대중운동의 진정한 지도자였고 혁명가였어요. 저는 가톨릭농민회 서경원 회장, 노금노 총무 등과 함평 고구마 투쟁을 기획할 때 시중을 들었어요. 이강 형이 북동성당의 지휘부에 있을 때, 저는 마당에서 사다리 데모를 이끄는 선봉장이었습니다. 정보과 형사들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었지요. 저는 밤에는 담을 넘어 해남의 황석영 형에게 가서 선언문을 받아 오기도 했지요.
투쟁의 마지막 날에는 이강 형의 지시로 담을 넘어 윤한봉 형이 주선한 학생들 대표를 충장로 중국집에서 만나 농민들 지지 데모를 계획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제가 선봉에 서서 구호를 외치며 충장로 4가에서 3가 쪽으로 나아갔어요. 두 명의 학생이 경찰에게 잡히는 것을 보고, 제가 경찰을 발로 차버렸어요. 학생들은 도망갔고 저는 붙들렸어요. 저는 영장을 기다리게 되었지만, 다행히 협상이 타결되어 풀려났습니다. 함평 고구마 투쟁은 유신시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리한 대중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다리 데모’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박석삼 : 북동성당 마당에 앉아 농민들이 농성하고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어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농성을 알릴 필요가 있었어요. 그런데 농민들이 성당 앞 도로로 나가려고 하면 기동대들이 정문 양쪽에서 끊고 들어와 농민들을 체포했어요. 그래서 그 대안으로 고안해낸 것이 사다리 데모였어요. 기동대나 정보과 형사들이 성당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긴 사다리를 2개 준비했어요. 그래서 대오의 양쪽에서 농민들이 사다리의 칸마다 어깨를 끼고 외치면서 성당 밖으로 나가는 것이에요. 농민들이 사다리의 칸에 들어 있으니 경찰들이 끌어낼 수 없었어요. 그렇게 사다리를 끼고 절반만큼 도로로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했어요. 모두 쥐죽은 듯이 있는 유신시대의 백주대낮에 누구 물러가라, 보상하라 등으로 외치면서 데모를 한 것이기에 엄청난 사건으로 볼 수 있지요.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
맹문재 : 『그 시절, 광주 사람들』에 실린 2019년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이강 선생님과 박석삼 선생님께서 나눈 대담을 읽어보니 함평 고구마 투쟁은 1977년 4월 말 승리로 끝났네요. 또한 박석삼 선생님의 약력에는 박기순 등과 함께 학생운동과 야학운동에 관여했고,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수배되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이 궁금하네요.
박석삼 : 함평 고구마 투쟁 뒤 윤한봉 형이 얻어준 계림동의 아지트에서 박기순 동지와 함께 야학 준비팀의 세미나를 꾸렸어요. 1970년대에 들어 의식 있는 학생들이 노동 현장을 조사하고 야학도 만들고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함께 고민하고 세미나를 열고 했지요. 저는 조봉훈 동지가 가져온 동일방직 유인물을 전남대 등교 시간에 뿌리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이 일어났어요. 유신 정권이 교육의 지표로 내세운 국민교육헌장이 인간의 자유 정신과 민주 시민의 양심, 사랑과 정의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반민주적이고 집단주의의 강요라고 여기고 교수님들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지요. 원래는 서울의 성내운 교수님 등과 함께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광주에서 먼저 발표하게 된 것이에요.
민주교육지표를 선언한 송기숙 교수님 댁에서 농성을 하려다가 제가 학생들을 계림동 아지트로 이끌고 가서 대책회의를 했어요. 12명 정도 모였는데, 절반은 야학 준비팀 사람들이었고, 절반은 전남대 학생들이었어요. 토론 끝에 노동 현장에 남을 노동팀과 데모에 나설 학생운동팀으로 역할을 분배했어요. 저는 박기순과 함께 데모를 꾸리고 뒷바라지 역할을 했습니다. 유인물은 누가 준비하고, 선동은 누가 하고, 전반적인 기획은 누가 하고 등의 역할을 조정한 것이지요. 전남대 앞 시위를 선동한 뒤 거기서 깨지면 한국은행 앞으로 모이게 하고, 거기서 깨지면 다시 광천동 터미널로 모이라는 ‘택’을 만들어 데모 속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했어요. 박기순 열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택’은 ‘tactic(전술)’의 은어예요. 그와 같은 시위는 ‘예고 데모’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데모가 한 번에 해산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이지요. 광주항쟁 때 전남대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해산되지 않고 시내로 진출한 것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데모의 마지막 날 윤한봉 형이 시켜서 고은 선생님, 백낙청 선생님 등을 서울에 가서 만나 광주의 상황을 전해드리고 답을 받아왔어요. 광주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누가 붙들더니 윤한봉 형이 보내서 왔다며 바로 피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도 못 보고 광주를 떴습니다. 그때가 1978년 6월 말이었어요.
[남민전 사건 : 김남주, 박석률, 박석삼]
맹문재 : 방금 언급하신 조봉훈 선생님을 찾아보니 “1978년 6월 교육지표 사건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고, 이후 서울로 올라가 도피 생활을 하던 중 1978년 7월 박석률을 만나 민투에 가입하였다.”라고 『그 시절, 광주 사람들』(295쪽)에 소개하고 있네요. 또한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1978년 6월 27일 전남대에서 김득진·김정수·김현곤·명노근·배영남·송기숙·안진오·이석연·이방기·이홍길·홍승기 등 교수 11명이 민주교육 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한 것을 말한다. 당시 교수들은 인간 존중의 교육, 교육자의 양심에 의한 교육, 외부간섭 배제, 구속학생 석방, 3·1정신과 4·19 정신 계승 전파 등을 다짐했다. 교수 11명은 모두 해직됐으며 이 사건과 관련, 송기숙 교수와 연세대 성내운 교수가 구속됐다.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 시민단체 관계자 등도 다수 연루돼 유죄를 선고받았다.”(『연합뉴스』, 2013년 2월 5일)라고 기록하고 있네요. 이 사건에 연루된 9명에 대한 재심에서 35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박석삼 선생님이 김남주 시인, 박석률 선생님과 함께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79년 11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된 상황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네요. 김남주 시인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요?
박석삼 :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이후 전국에 데모가 없었어요. 대학생들도 학도호국단으로 편입되어 세상은 고요했어요. 그러던 1977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어요. 도청 바로 앞에 있는 광주 YWCA에서 무슨 강연 행사가 열렸어요. 서울에서 함석헌 선생이 온다고 했고, 김남주 형이 시를 낭송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저도 구경 갔는데, 강당이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어요. 물론 정보과 형사들도 나와 있었지요. 그런데 김남주 형이 시 낭송할 순서에서 시를 읽지 않고 노래나 한 곡 부르겠다고 하면서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를 부르는 것이었어요.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라는 노래였어요. 김남주 형의 십팔 번 곡이었지요. 사람들이 김남주의 시 낭송을 기대했는데 그냥 노래를 한 곡 부르고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저는 괴짜라고, 키는 크지 않지만 배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곤색 콤비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시커먼 안경을 끼었어요. 그것이 김남주 형에 대한 첫인상이었어요.
제가 서울로 올라갔더니, 석률 형이 장위동에서 김남주 형과 함께 살고 있었어요. 김남주 형은 광주 녹두서점에서 전남대 후배들에게 『파리코뮌』을 강독하다가 문제가 되었어요. 1978년 2월 중앙정보부가 피습했는데, 다행히 김남주 형은 피신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김남주 형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과 함께한 활동에 대해 궁금하네요. 남민전에서는 어떠한 활동을 하셨는지요?
박석삼 : 저는 김남주 형과 함께 혜성대(彗星隊)의 대원이었습니다. 장기 피신자를 ‘까마귀’라고 불렀는데, 이재문 선생님, 신항식 선생님, 광주에서 올라온 김남주 형, 그리고 제가 그 까마귀에 속한 것이지요. 그래서 남민전의 장기 피신자 팀을 혜성대로 만든 것이에요. 남민전에는 민투(한국민주투쟁위원회)라는 조직도 있어 유인물 및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만들어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남민전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는 등 생업이 있었지만, 장기 피신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매일 만나 일을 했어요. 유인물을 만든다든지, 유인물을 뿌린다든지, 몸으로 때우는 일을 당연하게 한 것이에요.
맹문재 : 남민전 활동을 하면서 피신 장소를 많이 옮겼을 텐데, 검거 상황이 궁금하네요.
박석삼 : 김남주, 차성환, 이수일, 박석삼, 그리고 이문희 동지는 이재문 선생님의 잠실 아파트에 피신하고 있었어요. 13평 아파트인데 방이 2개이고 거실이 있었어요. 바깥에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면 안 되니까 그야말로 쥐죽은 듯이 지냈어요. 숨소리도 안 내고, 쓰레기도 많이 생기지 않게 살았어요. 그 안에서 하루 세끼 밥 먹고, 공부하면서 보냈어요. 이수일 선생은 당시 교사였으니 출퇴근했고, 이재문 이문희 선생만 외출했을 뿐 공개수배 중이던 김남주, 차성환, 그리고 저는 그 방에만 있었어요. 1979년 10월 4일 이재문, 이문희, 이수일, 김남주, 차성환이 잡혔어요. 추석 전날이었어요.
그 무렵 박석률 형은 이해경 선생님의 어머니인 전수진 여사의 집에 피신해 있었어요. 경기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어요. 우리는 잠실의 아파트에서 계속 지내기 어렵다고 생각해 제가 사건 며칠 전인 9월 말 구로동 쪽에 있는 벌집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방을 하나 얻어 나왔어요. 그런데 마침 추석 무렵이라 그 안에서 빈둥거리면 남들이 의심할 수 있기에 박석률 형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전수진 어머님과 이호덕 아버님도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지요. 그날 12시에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이재문 선생님이 연락이 안 되었어요. 약속된 시간에서 10분이 넘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모두 그 집에서 떠났어요. 그렇게 해서 박석률, 박석삼, 이해경은 10월 4일 체포되지 않고 피했어요. 우리는 도망 다니다가 한 달 뒤인 11월 3일 잡혔어요. 박정희가 땅속에 묻히던 날이었지요.
맹문재 : 참으로 긴박했던 상황이 눈에 선하네요. 잠실의 아파트에서 김남주 시인과 함께 지낼 때 인상에 남는 일이 있는지요?
박석삼 : 김남주 형은 영어도 잘하고 일어도 잘했어요. 인상적인 모습은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었어요. 우리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일어났어요. 일어나서 요가를 했는데, 물구나무서기 등 잘했어요. 요가가 끝나면 새벽에 들어온 신문을 다 읽었어요. 그전에는 못 느꼈는데, 생활이 굉장히 바지런하셨어요. 겉으로는 안 드러냈는데 뭔가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지구상의 어떤 시인도 소설가도 자신의 글보다 훌륭하게 행동하는 글쟁이는 없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김남주 형은 언행일치를 이루려고 한 분이셨어요.
김남주라는 분을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시인으로, 어떤 사람은 혁명가로, 어떤 사람은 시인이자 혁명가로 여기겠지요. 저한테는 친형보다 가까운 형이기도 했지만, 그냥 전사로 여겨져요. 본인도 시에서 해방 전사, 혁명 전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잖아요. 전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모범이 되려고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어요. 김남주 형은 제 앞에서 시를 쓰거나 시에 관한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에게 김남주 형은 그냥 전사예요. 저는 그 점을 높게 평가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김남주 시인의 「전사 1」이 떠오르네요. 전문을 옮겨볼게요. 김남주 시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시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상황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 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 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 김남주, 「전사 1」 전문
박석삼 : 김남주 형은 10월 4일 잡혀서 11월 20일 경찰로 넘겨졌으니 45일 이상 고문을 당한 것이지요. 대공분실 쪽에서 알아내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막 두드려 패고, 물고문, 전기고문, 칠성판에 묶고 등등 정말 왜놈들이 독립지사들을 고문했던 수준으로 가했어요. 대공분실은 남영동뿐만 아니라 옥인동에도 있었고, 나중에 대방동 군수용소로 옮겨졌어요. 서울구치소에서는 남민전 관련자가 많으니까 사동마다 두 방이나 세 방을 건너 수용했어요. 재판이 끝나 대부분 광주교도소로 갔는데, 대전교도소로 간 분들도 있었어요. 좀 있으니 5·18광주항쟁으로 또 많은 분들이 교도소에 들어왔어요. 저는 김남주 형과 특별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어요. 방을 지나가다가 말을 걸기도 했고, 운동하다가 말을 걸기도 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사동 끝에 부챗살 모양으로 된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이 운동했어요. 하루 1시간 정도 운동을 했어요. 햇볕도 쬐고, 땅 탁구 경기도 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은 감옥에 있었던 때라고 생각해요. 그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았고,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저는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어요. 재소자 대중까지 조직해서 교도소의 폭력에 반대하였고, 처우 개선 투쟁을 했습니다. 단식투쟁을 수없이 했고, 강제급식도 가장 많이 당했어요. 통닭구이를 당하기도 했지요. 싸울지 말지의 갈림길에서 저는 항상 맨 앞에 서게 되었어요. 투쟁에 앞장서고 책임을 져야 할 때 번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저는 그 속에서 단련되고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교도소와 싸우는 바람에 밟혔고, 그때마다 다른 교도소로 보내졌어요. 그렇게 돌아다닌 교도소가 여섯 군데나 되네요.
맹문재 : 참으로 놀랍네요. 남민전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한계에 대해서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박석률 선생님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대하여」(『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풀빛, 1989)라는 글로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밝히셨지요.
박석삼 : 남민전의 문제는 남민전의 주장이나 실천이 당시의 대중적 정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모든 혁명운동은 대중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하지요. 남민전은 이와 같은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함께 운동한 분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40대 초중반의 나이에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어요. 평생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신 김영옥 선생님이나 지하운동의 신화이고 불굴의 혁명가셨던 김세원 선생님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몸만 버리는 게 아니었어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없으면 지하 비밀조직에 합류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실패한 운동이라고 할지라도 그분들의 삶은 존경해요. 그분들은 지사형 혁명가들이에요.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는데도 지식인의 의무를 배반할 수 없어 참여한 것이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들의 삶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김남주 시인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요? 선생님의 회고록을 보니 “나는 남주 형의 시에 대해서도 한 번도 공감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는데요.
박석삼 : 제가 김남주 형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냥 전사였기 때문이지 훌륭한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에요. 김남주 형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 앞에서 시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형의 시가 얼마나 위대한지 잘 몰랐습니다. 김남주 형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나 자신을 노래한다」가 떠오르네요.
언젠가 이강 형이 민청학련으로 재판받고 수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남주 형이 『창작과비평』에 시를 투고해서 실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잡지에 실린 시를 읽고 우리의 대의를 글로 표현해주어 엄청난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시가 그러한 힘도 가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는 시의 힘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하려 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나는 듣고 있다 감옥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좀 더 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경박한 짓이었어
그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 10년 후퇴되었어
한마디로 미친놈들이었어 미친 짓이었어
이에 상당한 책임을 그들은 져야 할 거야” 하는 소리를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불을 달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가
스스로 제 왕궁을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 아무개와 박 아무개가
제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희생 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은 전쟁이고
피를 흘림으로써만이 해결되는 것
나는 부르겠다 나의 노래를
죽어가는 내 손아귀에서 칼자루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혁명 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 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 사나운 적과 만나야 한다 싸워야 한다
나는 해방전사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도 용감 둘도 용감 셋도 용감해야 한다는 것
투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 속에서 그 속에서
자유의 맛 빵의 맛을 보고 싶다는 것 그뿐이다.
― 김남주, 「나 자신을 노래한다」 전문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의 부인인 박광숙 선생님의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는데요. 박광숙 선생님도 남민전에서 『민중의 소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남주 시인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고 배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석삼 : 김남주 형하고 형수님이 1989년 1월 29일 결혼한 뒤 두 분이 함께 산 기간이 5년밖에 안 되어요. 밖에서는 유명한 시인이라고 추종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형수님의 삶은 쉽지만은 않았지요. 끊임없이 본인이 배제된 채 누구의 아내라고 불리는 것은 굴레일 수 있지요. 제가 형수님한테 여쭈어본 것은 아닌데 제 마음이 그래요. 지금 강화에서 사시는데, 작년에 아들 김토일이 결혼했어요. 저를 시동생처럼 여기고 챙겨주세요.
[남민전 사건 : 박석률, 이강, 홍세화]
맹문재 : 남민전 활동에는 김남주 시인과 박석률 선생님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지요. 박석삼 선생님께서는 두 분의 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는 부분도 있을 텐데, 아시는 사항만 편안하게 말씀해주시면 되겠네요. 말씀을 듣기 전에 『그 시절, 광주 사람들』에 정리된 박석률 선생님의 약력을 소개해볼게요.
“박석률은 임동규 선생의 권유로 남민전에 가입하여,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한 분이다. 박석률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남민전 사건으로 9년, 다시 범민련 사건으로 1년, 도합 11년의 삶을 감옥에서 보낸 분이다.” (5쪽)
이 책에 수록된 「혁명가 박석률」이란 꼭지를 보니 박석률 선생님은 1977년 9월 하순 임동규(1939년생) 선생님의 안내를 받았고, 그해 10월 22일 이재문 선생님의 주도로 가입식을 치렀네요. 조직명으로 김혁을 받았습니다.
박석률 선생님의 옥중 시와 서간 모음집인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에는 김남주 시인의 서문이 실려 있어요. 이 글에 따르면 김남주 시인은 1979년 박석률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권유를 받아들여 혁명적 조직에 가입했다고 밝히고 있어요. 남민전 가입으로 보이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김남주 시인은 「오늘은 그날이다 1」라는 작품으로 그 상황을 담고 있네요.
오늘은 그날이다
투쟁의 칼을 세워놓고 내가
민족해방전선에 가입한 날이다
그날 나는 다짐했다 손 위에 손을 포개고
동지와 함께 한 별을 우러러보며
해방의 한길에서 우리 변함없자고
천 고비 만 고비 넘어야 할 시련의 고비에서
너와 나 우리 굴함 없자고
그날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그날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우리 불사하자고
오늘은 그날이다
해방전사로서 내가 최초로
밤의 담벼락을 넘어
부잣집의 편안한 잠자리에 칼을 들이댄 날이다
최초로 부자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날이다 살려달라고 그때
역사의 입김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모가지에 칼이 들어가야 그들은
착취의 손을 놓더라고
― 김남주, 「오늘은 그날이다 1」 전문
박석삼 : 이 시는 사실과 경험에 관한 묘사가 아니라 어떤 행위들의 이상을 사후적으로 추상한 시로 보아야 될 듯합니다.
맹문재: 기록에 따르면 이재문 선생님이 김남주 형의 가입식을 주재하고 한무성이라는 조직명도 주었다고 되어 있네요. 이재문 선생님은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어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되었네요.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1924), 하재완(1932), 이수병(1937) 선생님이 모두 이재문 선생님의 동지들이고, 1976년 2월 남민전을 결성하면서 사형당한 8열사의 수의를 모아 깃발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또한 박석률 선생님의 저서 『자주와 평화, 개혁으로 일어서는 땅』(백산서당, 2003)에 수록된 「내가 만난 김남주」의 글에도 두 분의 인연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1978년 김남주 시인이 서울로 피신해 왔는데, 마땅히 있을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박석률 선생님이 3월 1일 성공회 주최의 ‘문학낭독의 밤’에 찾아가 만났어요. 박석률 선생님은 남민전의 지하신문 『민중의 소리』 창간호에 실을 시를 구하다가 김남주 시인이 민중해방을 노래한 시 「해방자」를 읽고 감동해 김남주 시인을 1978년 9월 남민전에 천거했어요. 이 상황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는지요?
또한 이 글에는 김남주 시인이 남민전에서 불린 이름 한무성(韓茂成)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요. 무성할 무, 이룰 성인데, 구속과 취조 과정에서 잘못 불리도록 의도한 것이라고 했어요. 실제로는 무성(武聲)으로 김남주 시인의 목소리가 쇳소리, 즉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쇳소리를 대변한다는 의미이지요. 김남주 시인과 박석률 선생님이 남민전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지하신문 『민중의 소리(民聲)』의 원고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발행자의 이름은 한민성(韓民聲)이었네요.
박석삼 : 조직명은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가명이나 닉네임을 지은 것입니다. 무성할 무(茂)이든 호반 무(武)이든 김남주 형은 그런 소리를 내겠다고 한 것이고 각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중에 김남주 형은 민산(民山)이란 호를 썼어요. 민중들로 이루어진 혹은 민중들이 이루어낸 산이란 뜻인데, 그런 가명이나 호 속에 어떤 지향이 들어있다고 보아야지요.
남민전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8인의 동지를 사형으로 잃은 이재문 선생이 주도하여 통일운동 세력이나 민주화 운동에 열정적인 학생과 지식인들을 결집한 운동이예요. 박정희의 독재가 남민전을 결성하게 만든 배경이지요. 남민전을 주도적으로 결성한 이재문 선생님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했어요. 신향식 선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고,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김남주 이수일 박석삼 등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요.
맹문재 : 1988년 6월 박석률 선생님이 미국에 있는 윤한봉 선생님에게 보낸 서신도 수록되어 있네요. 두 분의 관계를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박석삼 : 박석률 형은 운동의 이론가라는 평을 많이 받았고, 박정희 타도는 지하운동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분은 모든 것을 헌신하는 자세로 자기를 던졌어요. 박석률 형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 분이었어요. 평생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처자식도 있는데도 돈을 벌지 않았어요. 장남으로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생들을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오로지 운동에 모든 걸 던졌어요.
윤한봉 형은 나중에 미국으로 가 통일운동가로서 역할을 하셨지요. 저는 그분으로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하는 운동을 배웠어요. 대중운동이 아니라 뒤에서 사람들을 키우고 지휘하는 조직자로서의 모습을 기억해요. 박석률 형과 윤한봉 형은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어요. 윤한봉 형은 혁명적 조직의 지속성에 대한 불신 혹은 불안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이강 선생님도 김남주 시인, 박석률 선생님과 깊은 인연이 있지요?
박석삼 : 이강 형은 그야말로 대중운동의 리더이고 지도자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하지요. 이강 형은 『함성』지 사건을 비롯해 민청학련, 1987년 6월항쟁, 이철규 열사 죽음 진상규명 등으로 감옥에 여러 차례 다녀왔어요. 이강 형은 사심이 없고 모든 것을 던져버린 훌륭한 미덕을 가진 분이에요. 그렇지만 그분의 가족은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떠안아야 했지요. 그분의 머릿속에는 가족이나 형제가 없고 오로지 운동과 혁명이 전부였어요.
이와 같은 면은 김남주 형도 마찬가지였어요. 김남주 형은 그냥 전사의 화신이었어요. 대중운동, 지하운동, 조직운동 이러한 것을 떠나 그냥 해방전사였어요. 그분은 전사로서 모범이 되기 위해 참으로 철저하게 노력했어요. 전사로서 갖춰야 할 것들을 완벽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내가 만난 홍세화, 21년 만의 재회」(『자주와 평화, 개혁으로 일어서는 땅』)를 읽어보니 홍세화 선생님도 박석률 선생님의 권유로 남민전에 가입했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이 글은 1999년 7월호 『말』에 실린 글로 김소희 기자가 기록한 것이네요. 박석률 선생님은 홍세화 선생님을 호명하는 시도 쓰셨어요. “망우리 너머/양주 땅 교문리에/새벽길 들어서면/수련 같은 딸 하나, 아들 하나/열 평도 안 되는 집터에/제 이름 석 자 또렷이/문패를 붙이고 있었다/목까지 차오는 군화를 끌고 가던/그대는”(「타는 그리움으로 1― 홍세화 동지에게」,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123쪽)으로 시작하네요. 박석삼 선생님과 홍세화 선생님의 인연에 대해서도 듣고 싶네요.
박석삼 : 홍세화 형은 박석률 형과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박석률 형이 김남주, 이강과 함께 홍세화 형을 남민전에 합류시켰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친한 정도가 아니라 동지적인 관계였지요. 홍세화 형은 1979년 봄 독일로 출국했고, 거기에서 다시 프랑스로 갔어요.
홍세화 형이 출국하는 날까지 박석률 형이 부탁해서 제가 그 집에서 피신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분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고 눈치 없이 밥을 얻어먹은 것이지요. 그 댁에 2살과 4살 정도 되는 애들과 형수님이 계셨고, 아이들의 할머니도 계셨어요. 그때 홍세화 형의 나이가 32살 정도 되었을 것이에요. 처자식과 부모님이 있어 가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한데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겠다고 지하 조식에 들어간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유인물을 뿌리고 데모를 하다가 잡혀가면 2∼3년 징역을 살겠지만, 지하 조직 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최하가 15년이고 무기 아니면 사형이지요. 그래서인지 박석률 형이 홍세화 형에게 어떤 마음의 빚이 있었던가 봐요. 감옥에서 나와서도 가장 먼저 홍세화 형한테 연락하고, 대담도 두 번이나 했어요.
언젠가 이재문 선생님의 추모식을 마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홍세화 형이 선배들께 술을 따르는데,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홍세화 형은 위대한 지도자는 아니지만 자기 가치에서 벗어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원칙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목표를 최선을 다해 수행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은 것이지요. 홍세화 형이 그렇게 실천한 것은 굉장한 결단과 반성이 있었을 것이에요. 좌파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운동의 끈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라 생각해요. 홍세화 형이 주도한 여러 가지 작은 운동은 남민전 운동과는 결이 다르지만, 반성 없이는 나오기 힘든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홍세화 형은 여전히 좌파로서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실천 가능한 혹은 소박한 실천을 중시했던 것 같아요. 홍세화 형이 만든 독서 모임의 이름도 “소박한 자유인”이에요. 소박한 자유인이란 선언 속에 자신의 지향과 실천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말씀해주신 분들 외에 남민전 및 김남주 시인과의 관계에서 소개해주실 분이 있으신지요?
박석삼 : 광주권에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주 많지요. 그중에서 김세원 선생님을 소개하고 싶네요. 1931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일찍이 민청을 조직해 통일운동에 나섰어요. 1948년 단독 선거 반대 투쟁으로 구속되었는데, 강제 징집되어 장교로 복무했어요. 4·19혁명 뒤 사회당 창당을 주도하다가 5·16쿠데타로 수배되어 은신하셨어요. 그 뒤 지하운동을 조직했고,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었어요. 1980년 5·18항쟁과 6월항쟁에도 참여했어요. 그 후로도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에 가담해 10번이나 투옥되었어요. 처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평생 운동에 몸을 던져 이강, 김정길, 박현채, 윤상원 등 많은 사람을 키워냈지요. 『비트』상·하(일과놀이, 1993)라는 자전적인 책을 내셨어요.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운동의 목표를 얼마나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운동에 자신을 던졌는가입니다.
맹문재 : 박석률 선생님께서 박석삼 동생에게 많은 편지를 썼어요. 아마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되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애정과 걱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요. 박석률 선생님의 서신으로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박석삼 선생님이 쓰신 「혁명적 낭만주의자 박석률을 회고함」(『그 시절, 광주 사람들』)을 보니 위의 형인 박석조 선생님도 큰형을 위해 헌신하셨네요. 박석률 선생님 형제들이 어떻게 되는지요?
박석삼 : 박석률 형이 맏이이고, 그 아래로 석조, 현순, 석삼, 석준, 석현, 강수가 있어요. 6남 1녀에요. 석조 형님이 가장 헌신했어요. 석률 형과 제가 수배 중일 때 석조 형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한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석률 형과 저의 석방 운동을 위해 자기의 삶이 없었어요.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어 지내다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저의 집은 광주에서 몇째 갈 정도로 아주 잘살았어요. 밀가루 대리점을 했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되었어요. 창고에 밀가루가 3천 포 정도 쌓여 있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학교 선생님들을 집에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부도가 나 1972년 무렵부터 매우 어려웠어요. 제가 중학교 2, 3학년 때였어요. 집안이 망하고 나니 형제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학업이 중단되었어요. 그래서 봉제공장의 시다(보조원)가 되거나 빵을 배달했어요. 대학에서 공부를 한 장남의 경우와는 아주 환경이 달랐던 것이지요. 석현은 현재 택시 운전을 하고 있고, 강수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누구보다도 아버지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 시대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아버지에게는 장남이 전부였지요. 장남이 공부를 잘해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니 기대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장남이 민청학련과 남민전에 관련되어 아버지의 꿈이 짓밟힌 것이지요.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셔서 조그마한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녔어요. 그렇게 돈을 모아 장남의 영치금을 넣어준 것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다시 그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애쓰는데, 아버지는 다 던져버리고 당신의 몸을 움직여 살았어요. 그것은 아마 당신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만주에서 노동자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형제 중에 박석준 동생은 시인이잖아요. 저하고 인연이 깊어 『카페 가난한 비』(2013),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2023) 등의 시집을 내었어요. 특히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는 남민전 사건을 집중적으로 쓴 시집이어서 의미가 크지요. 제가 시집 해설을 쓰기도 했어요.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을 소개해볼게요. 박석준 동생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오늘 아침 충무로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여니,
여러 갈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가난한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태풍이 소멸해 사라져갔지만, 막내가 텐트를 치고
삼형이 담당하여 낮 12시에 마석모란공원에서 시작한
고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엔 그 비가 스몄다.
해직 교수와 시인 둘이 광주에서 올라와 빗속에 참석했다.
비가 그치고, 광명으로 가 병원에서
3년 6개월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작은형을 보고,
7시에 충무로로 돌아와 밤 10시까지 사람들을 만났다.
추모식에 온 세 사람, 서울의 시인, 그리고 89년 전교조
건설 및 교사 해직 과정에 고등학생 운동을 한 두 제자를.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된 박석률 형이 9년 세월이 지난 후 풀려났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고문과 폭력으로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고, 동생들은 남의집살이하거나 학교를 중단해서, 교사인 내가 번 돈을 모아 88년에 마련한 두 칸 셋방만이 무기수였던 형이 쉴 곳이었다.
식구들은 하룻밤을 함께 자고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해직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나의 길을 갔다.
다시 교사로 살아가면서, 50살이 넘어 시를 짓는 사람,
시인의 길을 모색했다. 2017년 2월에 중도퇴직한 후로는
교사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교사도, 노동자도, 농민도, 작가도 아닌 형은
74년에도, 95년에도 수감되어 10개월씩 살았으나
과장됨 없이 2017년 7월에 세상을 떴다.
그냥 ‘전사’로 남았다.
사람마다 지향이 달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고 그리워할 사람이 따로 남는다.
형을 그리워하는 때 나에겐 분리와 반항, 가난함과 삶의
진실이 문제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비 내리는 오늘
아침 나에겐 그리워할 사람으로 박석률 형이 남았다.
― 박석준,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전문
박석삼 : 석준 동생은 형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는데, 교사 발령이 안 나는 거예요. 결국 공립학교는 안 되고 중앙정보부에 각서를 쓰고 사립학교에 취직했어요. 동생은 형들의 뒷바라지와 집안을 돕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또한 교사 생활하면서 전교조 운동을 했어요. 동생이 쓴 산문집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상, 하(일월서각·한ᄀᆞᄅᆞᆷ, 1999)을 읽어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교조 운동으로 해직되어 어려웠는데 꿋꿋하게 견뎌내었어요.
[전망 : 박석삼의 저서 활동]
맹문재 : 선생님께서 2010년 『2008년 촛불항쟁 배반당한 개미 떼들의 꿈』(문화과학)을 간행하셨고, 2020년 ‘타흐리르’에서 개정증보판으로 내셨어요. 저서를 간행한 동기나 의도 등을 듣고 싶네요.
박석삼 : 2008년 촛불항쟁은 그렇게 먼 옛날 일이 아니지요. 그 당시 저는 촛불 연행자 모임이라고 하는 카페를 만들었어요. 정원이 한 800명 정도 되었으니 굉장히 영향력 있는 조직체였지요. 연행자 모임은 헌신할 의무 외에 특권이 없는 머슴단과 머슴단 대표를 두었고, 개방적인 회의체로 운영했어요.
저는 촛불운동에 본격적으로 함께하면서 느꼈던 점들, 방향이 잘못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가 등에 대한 고민 끝에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2008년 촛불 시민항쟁, 2016년 촛불 국민행동이 역사의 흐름에 전진하지 못했다고 평가해요. 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민중, 노동자, 시민, 국민이 될 수 있는 다면적 존재이지요. 다시 말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지요. 그런데 역사의 전진은 민중이 이루는 것입니다. 촛불항쟁에서 민중이 시민으로, 시민이 국민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즉 민중의 정체성이 약화되면서 역사가 전진을 못하고 좌절하게 된 것이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은 “투쟁파와 평화파가 대립했고, 평화파의 수는 적었지만 전투파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항쟁지도부인 광우병―대책회의는 촛불 시민이 민중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중략) 성실한 시민이었던 개미 떼들은 시민운동에게 배반당했다.”(290쪽)라고 기술한 데서 확인되네요.
선생님께서는 2020년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타흐리르)도 간행하셨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 글은 자본의 세상이 반드시 바뀌어야 하고 바꿔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고, 특히 혁명 없는 시기의 진지한 혁명가들을 위해 쓴 글이다.”라고 밝히고 있네요. 좀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홍세화 선생님께서 뒤표지 글도 쓰셨네요.
박석삼 : 저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낸 것이에요. 여전히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세상을 바꿔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떠한 인식과 방법론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유럽의 좌파당 운동에서 찾아본 것이에요. 세상을 바꾸려면 다수의 대중을 설득하고 열정을 이끌어내어 다른 대중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요. 제2차 세계대전 후 좌파들은 대부분 고립되고 주변화되었지요. 그래서 외국에서 좌파 운동이 성공한 사례와 그 이유를 분석하고 방안을 고민해 보았어요. 좌파 운동에 대한 반성이 들어 있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은 “유럽 좌파 정당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요인을 분석한 책”(정병기 영남대 정치학과 교수), “21세기 포스트 자본주의 변혁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상상력을 제공”(정성진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교수), “유럽 좌파세력의 정당운동을 갈무리한 책”(홍세화 전 진보신당 대표), “유럽 좌파를 사례로 들어” “현재의 세계적 난국을 돌파”하려는 책(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과 교수), “한국 좌파 운동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결과물”(이광일 전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장) 등의 뒤표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네요.
선생님의 저서에는 『아랍의 봄과 겨울―혁명·반혁명·내전』(타흐리르, 2021)도 있네요. 관심이 가는 책이네요.
박석삼 : 2011년에 일어난 아랍 민중들의 봉기와 그 이후 전개된 혁명, 반혁명, 내전에 관해 쓴 것입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먼 나라의 얘기로 들리겠지만, 아랍 민중들의 항쟁이 전 지구화된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투쟁이자 가장 격렬한 투쟁이어서 우리에게 시사점이 크다고 생각해요. 민중의 도전이 승리한 튀니지와 요르단, 반혁명을 허용한 이집트와 바레인, 내전으로 발전한 리비아, 시리아, 예맨 등으로 나누고 봉기 배경, 양상, 봉기 이후의 이행 과정을 분석하고 평가했어요. 민중혁명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살피면서 교훈을 얻고자 했어요. 민중혁명은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반국가적으로 나가는 순간 패배할 수밖에 없어요. 2011년 리비아 항쟁이 좋은 사례이지요.
맹문재 : 앞으로 어떠한 책들을 출간할 계획인지요?
박석삼 : 그동안 삶에 쫓기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어요. 출옥한 뒤 10년 동안 신문이며 텔레비전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차분하게 앉아서 연구하고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해요. 무언가 할 일이 많아 앞으로 책을 쓸 기회가 올지 모르겠네요. 자본주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와는 다소 다른 것 같아요. 구체성이 없는 사회주의를 실천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혁명이 가능한지 등을 생각하고 있어요. 진도가 안 나가고 있는데,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맹문재 : 겸손한 말씀이시네요. 선생님의 새로운 저서 출간을 기대하고 응원해요. 선생님께서는 진보전략회의 대표를 역임하셨고, 현재는 국제포럼의 대표를 맡고 계시네요.
박석삼 : 저는 원래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을 몹시 싫어해요. 생색내기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돕는 스타일이에요. 2007년 한미 FTA 반대 투쟁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주노총, 전농, 지식인들이 결합했어요. 그 FTA 투쟁이 끝난 뒤 함께했던 지식인, 교수 등이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운동체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해서 결성된 것이 진보전략회의에요. 교수들이 한 80명 정도 모였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제를 잡고 발표와 토론을 했어요. 그런데 취지는 좋은데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해 모임이 해체되었어요. 제가 처음부터 대표를 맡은 것은 아니었어요.
국제포럼은 어떤 세력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학술 모임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운동을 파악해보려고 만든 것이었지요. 즉 국내 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운동도 살펴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의도와 달리 성과는 없는 듯합니다.
맹문재 :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듣도록 할게요. 늘 건강하세요.
■ 박석삼
1955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윤한봉과 이강의 사랑을 받았고, 박기순 등과 함께 학생운동과 야학운동에 관여했다. 1978년 함평 고구마 투쟁에 앞장섰고,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수배되었다. 김남주, 박석률과 함께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79년 11월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고, 1988년 12월 출소하였다. 1995년 보안관찰취소청구소송을 내어 승소판례를 만들었고, 김대중 정권 때 복권되었다. 좌파 정치조직에서 활동했고, 2008년 촛불항쟁 때는 촛불연행자모임에서 서른즈음에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진보전략회의 대표를 지냈고, 현재는 국제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2008년 촛불항쟁― 배반당한 개미 떼들의 꿈』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아랍의 봄과 겨울― 혁명·반혁명·내전』등이 있다.
■ 맹문재
1993년 김남주, 신경림 시인의 심사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했다. 김남주기념홀 건립 전문위원, 김남주 시인 개인화 음성합성 기술(P-TTS) 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안양대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