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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로 거듭난 애견 새벽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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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 어느 본당에서 <복음 따라 사는 기쁜 삶>이라는 열린 강좌를 끝냈을 때 중년부인이 다가와서 딸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빠. 그 동안 잘 계셨어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젊고, 목소리도 그대로네요.” "건강이 회복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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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개와 함께 살았다. 개들도 우리와 함께 살다가 강아지도 낳고 때가 되면 죽기도 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장이 되었을 때는, 좋아하는 여러 종의 개를 한꺼번에 키우는 바람에 온 집이 개판이 된 적도 있었다. 가장 많았을 때는 스물두 마리였다. 경노수녀회에서 데려온 아롱이와 다롱이가 새끼를 네 마리 낳았고, 함께 살았던 대형견 콜리 부부가 두 번째 새끼를 낳았는데 열 네 마리였다. 다 키울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새끼를 갖은 바보 같은 유리는 대여섯 마리쯤 낳다가 혼절하였다. 나머지는 아홉 살 박이 이삭이가 엄마와 함께 애기보를 손으로 빼내어 일일이 찢어서 새끼를 꺼내주었다.
어려움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미의 젖꼭지가 새끼 숫자와 맞지 않기에 세 개 조로 나누어 젖을 먹여야 했다. 강아지 뒷다리에 빨강 노랑 리본을 묶어 조를 구분하여 젖을 먹이는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날마다 해낸 이삭이도 개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방학을 이용하여 한자를 가르쳐 주셨는데, 순우리말로 된 이삭이라는 이름을 한자로도 써보고 싶다면서 ‘들개 이’자에 ‘개가 사람 잘 따를 삭’자를 옥편에서 찾아내어 써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아무리 좋아해도 개는 개일 뿐, 사람과 혼돈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개를 집안으로 끌어들이지는 않고 마당에서 키우며, 강아지 때라면 몰라도 다 큰 개를 안고 다니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 동생 수녀의 친구인 성자네 남편이 폐결핵에 걸려 시립병원에 있는데 병세가 깊어 회복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때는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는데 성자네 가족은 당시 극빈층에 해당하였고, 가난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잘 놀고 있는 새벽이를 보니 견종에 비해 체구가 크고 마침 통통하게 살이 잘 올라있어서, 개로 태어난 보람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개고기로 거듭나게 해 주고 싶었다.
시골에 살면서 닭을 잡아본 일이 있지만 개를 잡아보지는 않았기에 스스로 처리할 방법이 없었는데, 앞집 청년에게 부탁하니 쉽게 해결해 주었다. 그는 종종 우리 애들을 까치산에서 데리고 놀다가 매미나 잠자리 같은 곤충을 잡아서 구워주기도 했었다. 어찌 생각하면 소름 돋을 일일 수도 있지만, 매미나 메뚜기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갔다. 이삭에게 물으니 맛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늘 하는 일없이 놀고 있는 그 청년에게 수고비를 주니 깨끗하게 처리해 주었다. 개고기가 된 새벽이는 잘 전달되었고, 꼭 그것이 보신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얼마 후 성자 남편은 회복되었다.
▲ 꽃님이네 아가들 - 사진 김정식 |
▲ 꽃님이와 아가들 - 사진 김정식 |
유신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1970년대 후반에 우리 집안은 기울대로 기울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은 칠남매를 가능하면 끝까지 가르치고 싶어 하셨고, 그 결과는 너무나 빤했다. 전라도 장성에서 시골 오일장을 보시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는 새마을운동 때문에 파산하셨다. 동네마다 들어선 슈퍼연쇄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생필품 잡화상을 하셨던 아버지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그런 일로만 따지자면 박근혜 씨와 나는 집안끼리 서로 원한관계인 셈인데, 상대 쪽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도 박근혜 씨 얼굴을 매스컴에서 보면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오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아버지는 동생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하셨다. 막일을 하더라도 같은 고생을 서울에서 하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영등포 모랫말 시장 근처에 있는 쌀가게 옥탑방을 얻어 두부와 어묵 행상을 하셨다.
아버지는 육십 오세까지 그 일을 하시고 그만 두셨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어묵을 못 먹는다.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남은 나는 대학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동네 중딩들 영어수학 그룹과외를 하고, 시골집에서 1시간 반 이상 떨어진 광주로 통학버스를 타고 간다. 아침마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에서 시달리고 나면 멀미를 하지 않아도 정신이 외출하고 만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대학 학생처에서 주선해준 방문과외를 한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학생들에게 특별히 배려해주는 고액과외인데 그 시절이기에 가능한 얘기다. 그 다음은 밤무대다. 당시 유행했던 통키타 생음악가수부터 캬바레나 나이트클럽의 피아노악사까지,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나 했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었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2시가 넘어서야 시골집에 돌아와 서너 시간을 자고 다시 일어나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곡예나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냈다.
이런 가난이 원인이 되어, 한 살 터울이었던 동생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술을 많이 마시고 철길을 걷다가 열차에 치어 죽었다.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서울로 상경하여, 행상하는 아버지와 남은 세 남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동생이 죽고 난 후 어머니도 상경하시자 여동생은 일터로 나갔다. 어렵사리 취직된 대형서점 일을 하면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알게 되었고, 동료들의 삶을 따라 구로공단으로 갔다. 월급은 서점보다 절반도 안 되게 줄었지만 힘든 노동을 통해 회원들과 연대하는 삶은 새로운 기쁨이었다. 그 삶이 바탕이 되어 노동수도회인 <프라도수녀회>의 수도자가 되었다.
이십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이 있다. 여동생에게 전할 물건이 있어, 자동차용 라디오를 만드는 공장이었던 구로공단 <남성전기>로 갔다. 수녀회에 입회했더라도 수련을 받기 전까지의 지원기 동안에는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수련을 받고 허원을 한 후에도 노동은 그만두지 않는다. 회사 입구에서 기다리는데 멀리서 동생이 일을 하다가 나오고 있었다. 그 때 입고나온 하늘색 작업복과 「김경옥」이라고 수인처럼 걸린 이름표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다. 가을 하늘은 왜 그리 높고 파랬는지 모른다. 그날의 슬픔은, 내 동생뿐 아니라 그 시절 구로공단에서 힘겨운 노동과 고단한 삶에 시달리던 모든 노동자들의 아픔이 하늘색 작업복과 함께 오버랩 된 것이다.
콘베이어를 타고 오는 조립라디오에 하루 종일 정해진 부품을 납땜하는 이 일은, 사람의 피를 말리고 정신을 말린다. 동생은 나중에 이 라디오 공장에서 얻은 직업병으로 한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그리고 날마다 납땜 연기를 맡은 결과 콧구멍과 냄새 맡는 신경기관에 치명적인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눈 친구들은 늘 서로에게 고마운 위로가 되어주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가톨릭 노동청년회원 경숙이가 다른 라인의 미혜와 친구가 되었고, 미혜와 같은 라인에 있는 성자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 꽃님이와 아가들 - 사진 김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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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님이와 아가들 - 사진 김정식 |
그러던 성자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따라 친척의 소개로 공주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남성전기의 투사들은 공주까지 가 성자의 면사포를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꿈은 거기까지였다. 알콜 중독인 남편은 술을 먹으면 인사불성이 되어 온 동네를 뒤집었고, 그래서 술을 못 먹게 하면 금단현상으로 아무에게나 행패를 부려서 견딜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면 술을 덜 먹을 거라는 희망으로 서울 근교인 성남으로 이사를 했는데, 술은 여전했고 우환 중에 폐결핵까지 앓게 된 것이다.
동생은 성자를 <알콜중독자와 함께 사는 가족들의 모임(Alanon)> 으로 안내를 했다. 벌이는 한 푼도 없는데, 속절없이 태어난 남매와 함께 술과 병으로 폐인이 되어가는 남편까지 수발을 하느라고 성자도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방을 얻었던 보증금이 점점 줄었고, 더욱 열악한 곳으로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비용 조차 없어서 내가 동생들과 함께 트럭을 몰고 가 이사를 해준 적도 있다. 좁고 가파른 성남의 골목길을 따라 볕도 안 드는 작은 셋방으로 짐을 나르면서, 지난 날 우리 가족이 겪어내었던 가난과 슬픔이 녹아내렸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그 후로 간간히 성자씨에 관한 마음 편치 않은 소식을 몇 차례 더 들었다. 그렇지만 짐덩이일 뿐인 한심한 남편을 끝까지 돌보면서, 애들 데리고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애써 위안을 삼고 싶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 만난 성자 씨의 잘 살고 있는 모습은 안심을 넘어 감동이다.
“애들 아빠가 술을 끊지는 못했지만 건강은 많이 회복되어서 다행이구요. 저도 어렵게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여 자격증을 땄어요. 애들도 건강하게 잘 있구요. 이제야 제 삶이 안정이 되나 봐요. 늘 고마운 마음 잊지 않을께요.”
내 마음이 가벼워졌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운 마음이 되어 돌아오는 길에, 눈망울이 예뻤던 새벽이 생각이 났다. 이른 아침에 우리 집으로 왔었던 흰둥이 강아지. 이런 저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동물이 사랑스럽더라도 사람보다 귀할 수는 없다.’
(2009년 복날)
(*이 글은 격월간 <공동선 9~10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권오순 시 / 김정식 곡 / 김이슬 노래 「초가을 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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